[미디어스=김혜인 기자] 임순례 영화감독이 최근 KBS '태종 이방원' 촬영현장에서 발생한 말 사고와 관련해 “한 생명의 희생을 담보로 제작할 장면은 없다”고 쓴소리했다. 재발 방지를 위해 출연 동물 보호를 위한 법제화와 제작진의 의식 제고를 강조했다. 임 감독은 동물권행동 카라 대표를 역임한 바 있다.

임순례 감독은 26일 CBS ‘김현정의 뉴스쇼’에서 “동물들이 사극 촬영 현장에서 소중하게 대우받지 못하리라는 것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는데 제보받은 영상을 보니까 잔인하고 원시적인 방법으로 촬영했구나 싶어 굉장히 놀랐다”고 밝혔다. 이어 “제보 영상에 대한 일반 시민들의 반응이 이렇게까지 뜨거울지도 (몰랐다). 동물권에 대해 관심이 굉장히 상승하였다는 걸 느꼈다”고 말했다.

2010년 개봉한 영화 <소와 함께 여행하는 법>을 연출한 임순례 감독의 스틸컷 (출처: 네이버 영화 페이지)

임 감독은 “훈련으로 연기가 가능한 동물들은 많지 않다”며 “소나 말은 구체적으로 연기를 한다기보다는 그들의 습성을 앵글에 담아 CG 등 특수효과로 전달하는 게 대부분이다. 10년 전 영화 촬영 시 굉장히 오랫동안 훈련된 소와 함께했다”고 말했다. 임 감독은 2010년 영화 <소와 함께 여행하는 법>을 연출했다.

임 감독은 “말이 달리는 장면이 쓰이는 전투장면이나 전쟁영화, 사극영화에서는 소품처럼 사용되다 버려지는 경우가 많다”며 “KBS에서 사고당해 사망한 말은 ‘깜이’로 원래 경주마였다. 외국은 12살까지 경주마를 시키는데 우리나라는 4, 5살에 경주마에서 퇴역한다”고 전했다.

임 감독은 “촬영하다가 상해를 입거나 죽어도 사람들은 별로 손해 볼 일이 없다”면서 “다쳤다고 해서 상해보험을 타는 식으로 얼마든지 다른 말로 대체될 수 있다는 게 소모품 논쟁의 핵심”이라고 설명했다.

‘이성계의 낙마 장면’은 심각한 부상을 입히면서까지 촬영할 장면은 아니었다고 임 감독은 지적했다. 임 감독은 “동물을 대하는 제작진의 의식이 가장 큰 문제로, 제작비와 일정에 쫓겨 시간이 많이 소용되는 CG 대신에 손쉬운 방법을 택한 것 같다”고 말했다. 임 감독은 2년 전 130페이지 분량의 ‘동물촬영 미디어 가이드라인’을 만들어 배포한 바 있다.

임 감독은 만약 자신이 <태종 이방원>의 ‘이성계 낙마 장면’을 연출했더라면 콘티부터 수정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임 감독은 “동물이 출연하는 장면은 정확한 콘티가 굉장히 중요하다”며 “동물을 다루는 분과 제작진 촬영팀이랑 안전하게 찍을 수 있는 시뮬레이션을 충분히 협의한 뒤 만약 안 된다면 앵글이나 CG로 촬영해야 한다. 카메라 앵글만 잘 조절한다고 하더라도 굳이 저렇게까지 한 생명의 희생을 담보 받을 필요는 없다”고 지적했다.

농림축산식품부는 25일 영화, 드라마, 광고 등 촬영 시 출연하는 동물에 대한 보호·복지 제고 대책을 마련하겠다고 밝혔다. 촬영현장에서 고려해야 할 ‘출연동물 보호 가이드라인’을 마련하고, 출연동물의 보호·복지를 위한 제도 개선방안도 적극적으로 검토한다는 계획이다. 이와 관련해 임 감독은 ‘실제 동물과 흡사하게 촬영할 수 있는 CG 등 대안이 있다면 동물에게 위험한 촬영을 시키지 않는다’는 내용이 법제화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임 감독은 “제일 중요한 것은 제작진의 마인드”라며 “동물이 소품이나 소모품이 아니고 생명이 있는 존재라는 인식이 굉장히 중요하고, 많은 배우들이 이런 연출자와는 일하지 않겠다는 선언을 하는 등 촬영장에 동물권을 존중하는 등 의식 향상이 굉장히 중요할 것 같다”고 설명했다.

동물자유연대가 19일 페이스북에 올린 '태종 이방원' 촬영 장면. 말 다리에 줄을 묶어놓고 넘어지게 만드는 낙마 장면을 촬영했다. (자료제공=동물자유연대)

지난해 11월 2일 KBS드라마 <태종 이방원>에서 이성계의 낙마 장면이 방영된 이후 동물권보호단체에서 잇따라 문제를 제기했다. 19일 동물자유연대, 동물권행동 ‘카라’ 등은 “극 중 이성계 역할을 맡은 배우가 말에서 낙마하면서 말의 몸이 90도 가까이 들리며 머리가 바닥에 곤두박질치는 모습이 그대로 전파를 탔다”며 말의 발목에 밧줄을 달아 잡아당겨 넘어뜨리는 촬영 장면이 담긴 영상을 공개했다.

이후 청와대 국민게시판에 “동물을 소품 취급하는 해당 드라마 연재를 중지해달라”는 글이 올라왔고 KBS는 20일 말의 사망 소식과 함께 공식적으로 사과 입장을 발표했다. 비난 여론이 가라앉지 않자 KBS는 24일 <생명 존중의 기본을 지키는 KBS로 거듭나겠다>는 제목의 보도자료를 통해 “동물의 생명을 위협하면서까지 촬영해야 할 장면은 없습니다. KBS는 이번 사고를 생명 윤리와 동물 복지에 대한 부족한 인식이 불러온 참사라고 판단한다”며 “다시는 이러한 사고가 발생하지 않도록 동물의 안전과 복지를 위한 제작 관련 규정을 조속히 마련하겠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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