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30일 ‘공정방송 쟁취’와 ‘김재철 사장 퇴진’을 내걸고 시작된 MBC 총파업으로 인해 벌써 2명의 MBC 기자가 ‘해고’를 당했다. ‘종군기자’로 이름을 날렸던 이진숙 기자(MBC 홍보국장)를 바라보며 기자의 꿈을 키웠던 MBC 보도국의 한 후배 기자가 이 국장에게 “이제 그만 피 붇은 붓을 내려놓으라”고 호소한다. <미디어스>는 7일 MBC노조 총파업 특보에 실린 해당 글을, 노조 동의를 받아 전문 게재한다.

▲ 이진숙 MBC 홍보국장
“바그다드에서 이진숙입니다.”

이진숙 국장을 처음 뵌 건 그때였습니다. 총성이 곧 배경음이던 바그다드 시내 한복판에서 ‘기자 이진숙’은 MBC 마이크를 들고 당당히 서 있었습니다. 기자가 어떤 일을 하는 사람인지도 제대로 알지 못하던 시절이었지만, ‘어떻게 저길 갔을까?’라는 경외심 때문인지, 무서울 정도로 침착한 표정이 흑백 사진처럼 오랫동안 가슴에 남았습니다.

그렇게 느낀 게 저 뿐만은 아니었나 봅니다. 함께 언론사 시험공부를 하던 동료가, 자신은 “현장을 누비는 기자가 되겠다”고 했을 때 ‘이진숙’이란 이름 석 자는 수식어가 되기도 했고, 그래서 ‘기자 이진숙’이 직접 쓴 경험담이 저희에겐 곧 ‘교재’이기도 했습니다. MBC 기자가 된 이후 명절 때가 되면, ‘기자 이진숙’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는 친지들도 ‘이라크에 있던 여기자’의 안부는 물어오곤 했습니다.

최문순 사장 시절이었던가요. 권재홍 현 보도본부장과 함께 워싱턴 특파원으로 근무하시던 시절, 이진숙 선배는 당시 권재홍 특파원이 회삿돈을 사적인 용도로 쓴다는 의혹을 제기했고, 이 때문에 결국 회사가 감사까지 했던 걸로 알고 있습니다. ‘동료애’와 ‘원칙’ 사이에서 숱한 뒷얘기가 오갔지만, 적어도 제게 이진숙 기자는 ‘공과 사’는 확실히 선을 긋는, 작은 실수도 그냥 넘기지 않는 엄격한 선배로 남아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금 저는 혼란스럽습니다. 전쟁의 참상을 알리던 ‘종군 기자 이진숙’과, 징계 예고와 온갖 협박으로 점철된 서슬 퍼런 회사특보를 찍어내는 ‘홍보국장 이진숙’이 같은 사람인지 의심스럽습니다. 기자들 대부분이 파업에 동참한 것은 물론, 부국장과 앵커들을 비롯한 보직 간부들까지 김재철 사장 사퇴를 요구하며 줄줄이 보직을 사퇴하고 있는 현실에 대해 “일부 구성원의 불법 파업”이란 딱지를 붙인 ‘홍보국장 이진숙’과, 한때 진실을 위해 발로 뛰던 ‘기자 이진숙’이 같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정말 믿기 어렵습니다.

무엇보다도, 사소한 공과 사의 구분에도 그토록 엄격했던 선배가 김재철 사장의 ‘수상한’ 법인카드 내역에 대해선 “일일이 대응할 필요를 못 느낀다”고 하셨던가요. 김재철 사장에 대해선 어떻게 그렇게 관대할 수 있는지, ‘영업 기밀’이란 이유로 어찌 그리 감싸기에 급급한지, 도통 납득할 수 없습니다.

어쩌면 김 사장이 임명한 홍보국장이란 자리가 그런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정권의 입’이 되길 자처한 사장처럼 선배도 어느새 ‘김재철의 입’이 되어버린 건 아닌지요. 공정방송을 외치던 후배들의 절규보다 웃으며 속삭이던 김 사장의 귓속말이 더 크고 선명했던 건 아닌지요.

“나는 내가 생각했을 때 옳은 일을 할 뿐이다.”

재작년 <PD 수첩 4대강 편> 방송이 보류된 직후,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하신 말씀입니다. 아울러 “홍보국장이란 자리 때문에 하고 싶지 않은 일을 억지로 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김 사장이 주도한 수많은 결정과 선배의 신념이 다르지 않다는 뜻이겠지요. 제가 이해한 바가 맞다면, 어쩌면 이 편지는 그저 넋두리에 불과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기어코 이 글을 띄울 수밖에 없는 건, 아직도 적지 않은 후배들이 ‘제 2의 이진숙’을 꿈꾸며 험한 취재 현장을 누비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그다드의 여기자’를 잊지 않고 있는 수많은 시청자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행여나 그들이 제게 ‘기자 이진숙’에 대해 물어올 때, 저는 어떤 이야기를 해 줘야 할까요.

‘이진숙 홍보국장’의 신념처럼, 저 또한 옳다고 믿는 일을 하고 있을 뿐입니다. 사랑하는 내 일터 MBC가 국민의 품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단순한 생각이 전부일 뿐입니다. 그 때문인지, “평판에 신경 쓰지 않는다”고 하신 이 국장의 말씀처럼, 저 또한 이상할 정도로 징계가 두렵지 않습니다.

다시 보고 싶습니다. 포화 속에 가려진 진실을 파헤치던 그 때 그 모습을 다시 보고 싶습니다. 후배들의 진정어린 호소에 귀 기울이던 예전 모습을 다시 보고 싶습니다. 자신의 영달에 눈이 먼 야욕가가 아닌, ‘기자 이진숙’의 모습으로 다시 돌아가십시오. 그 모습을 보고 싶습니다.

이제 후배들의 피로 물든, 그 ‘핏빛 붓’을 내려놓으십시오. 제발 해고자들이 흘린 피로 만든 잉크, 그 ‘핏빛 잉크에 찍어 쓰는 펜’을 던져버리십시오. 너무 때늦은 바람이 아니길, 진심으로 소망합니다.

MBC 보도국의 한 후배 기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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