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3월 양대 공영방송 KBSㆍMBC, 공기업 지분의 YTN, 국가기간뉴스통신사 연합뉴스가 동시에 '총파업'을 진행하는 사상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다. 정부의 입김이 강하게 미칠 수밖에 없는 소유구조를 가진 이들 언론사 기자들은 공통적으로 MB정부 이후 자사 보도의 급격한 퇴행을 지적하며, "더 이상은 참을 수 없다"고 입을 모은다.

펜, 마이크, 카메라를 놓고 거리로 뛰쳐나온 이들은 가슴 속에 어떤 고민과 울분을 품고 있을까? <미디어스>는 KBS, MBC, YTN, 연합뉴스 기자 릴레이 인터뷰를 통해 이들의 마음속을 들여다 보고자 한다.

2009년 2월 입사한 정연욱 KBS 기자(35기)는 '관제사장'이라 불렸던 이병순 KBS 사장이 뽑은 유일한 기수다.

▲ 정연욱 KBS 기자 ⓒ곽상아
35기는 보도국 막내 기자 시절인 2010년 12월, <추적60분> 4대강편 2주불방 등의 사태가 불거지자 '김인규 퇴진 촉구성명'을 발표한 바 있다. 35기 중에는 '눈사람 리포팅'으로 유명한 박대기 기자 외에 지난해 민주당 비공개 회의를 불법도청했다는 의혹을 받은 장 아무개 기자가 포함돼 있기도 하다.

2008년 8월 정연주 사장 불법 해임 이후 KBS의 보도가 급격하게 친정부 편향으로 기울어져 '정권의 나팔수'라는 '오명'에 휩싸이던 무렵 입사한 탓에 사회부 수습기자로서 정연욱 기자가 현장에서 처음 맞닥뜨린 것은 "시민들의 충격적 야유와 욕설"이었다고 한다. 노무현 서거 당시 시민들의 거센 분노로 인해 '인분'을 맞은 동기가 있었을 정도.

입사 4년차인 정연욱 기자는 5일 오후 <미디어스>와의 인터뷰에서 "만약 기자가 안 됐더라면, KBS를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시민의 입장에 서있었을 것"이라며 "그런데 불과 몇 개월 사이에 KBS 사회부 기자가 되어 최전선에서 시민들의 싸늘한 시선을 마주하게 되어 매우 당혹스러웠다"고 털어놓았다.

사회부 소속으로 영등포경찰서 등을 출입하고 있는 정 기자는 "지난해 경찰이 선관위 디도스 공격에 대한 수사결과를 발표할 당시 경찰 수사 내용을 짚어보는 리포트를 발제했지만 편집회의에서 전부 '킬' 됐다"며 "사회부 기자라기 보다는 그냥 회사원 같았다"고 담담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KBS기자협회의 제작거부, KBS 새 노조 총파업 등에 대해 "아주 오랫동안 누적돼온 분노, 절망, 슬픔의 표출"이라고 표현한 정 기자는, 다만 "KBS가 비판받게 된 현 상황의 70~80%가 정치보도로 인한 것인데 막상 제작거부, 총파업에는 정치부 기자들이 남일처럼 발 빼고 있다"고 답답해 했다.

부장, 팀장 등을 제외한 거의 모든 KBS 본사 평기자가 '부끄럽다'며 거리로 나선 상황임에도, 정부 여당에 치우친 정치 보도로 인해 '김비서' 라는 오명의 결정적 원인을 제공한 이들은 정작 보이지 않는다는 뼈아픈 지적이다. 불법도청 의혹의 당사자인 장 아무개 기자 역시 현재 '여행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다음은 정연욱 기자와의 일문일답.

"KBS 수습기자로서 맞닥뜨린 것은 시민들의 야유"

- KBS기자협회가 제작거부 첫 날인 2일, 대국민사과문을 발표했다. 'KBS를 김비서라고 부르는 현실이 비참해서 잠이 오지 않을 정도였다'고 하던데.

"2009년 5월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당시 한창 수습 기자 생활을 하고 있었다. KBS 수습 기자로서 처음 맞닥뜨린 것이 바로 시민들의 충격적 야유, 그리고 욕설이었다. 동기들 중에는 인분을 맞은 이도 있었다. 언론고시 준비생 시절 KBS는 들어오고 싶은 회사였는데, 막상 들어오고 나니 바깥에서 우리를 보는 시선이 너무나 싸늘하더라. 사회부 기자다 보니 최전선에서 시민들을 마주치게 되는데, 매우 당혹스러웠다.

만약 기자가 안됐더라면, 집회에 참석하고 KBS를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시민의 입장에 서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불과 몇 개월 사이에 KBS 기자가 되어 시민들의 부정적 시선을 마주하게 되니까 기자생활 초반부터 자괴감, 조직에 대한 회의, 불신 등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노무현 서거 당시 KBS보도에 대해 안팎의 비판이 쏟아질 때) 기자협회 총회도 개최됐었고…보통 10년차가 될 때까지 한두 번 겪을까 말까한 일들을 초반부터 겪어서 그런지 회사 상황에 대해 짧은 시간내에 체득하게 됐고, 기자로서의 역할을 깊이 생각해볼 수 있었던 것 같다."

- 정권홍보성 아이템을 발주받아 어쩔 수 없이 제작했어야 했던 경우도 있었나?

"눈이 많이 오거나 한파가 몰아치는 날에는 날씨와 관련된 꼭지가 3,4개씩 나간다. 늘 우리가 예상할 수 있는, 그리고 취재도 별로 필요없는 '방송 기능인'으로서의 역할을 주로 했다. 사회부 기자라기 보다는 그냥 회사원 같았다.

예를 들어, 경찰이 선관위 디도스 공격 수사결과를 발표했을 당시 내부에서 경찰 수사 내용을 짚어보는 리포트를 발제했었는데 편집회의에서 전부 '킬' 됐다. 3~4개씩 제안했던 것들은 1개로 합쳐지거나…. 이런 일이 늘 벌어지니까 취재 의욕이 안생기는 측면이 있다."

- 새노조 집행부 13명이 무더기 징계를 받았다는 얘기를 들었을 당시 어떤 생각이 들었나?

"일종의 선전포고라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징계가 없었다면, 제작거부나 파업 국면까지 오지 않았을 수도 있다. 김인규 사장은 KBS 사장으로서, 기자들의 선배로서 회사를 긍정적으로 끌고가려는 생각이 없는 것 같다."

- 이화섭 보도본부장에 대해 평가하자면?

"정권에 따라 처신이 바뀌는 기회주의자다. 그런 사람이 보도를 총괄하는 자리에 오른다는 것부터가 KBS 기자들에게 수치다. 전임 고대영 본부장의 경우도 퇴진 요구를 받았지만, 최소한의 일관성은 있었다. 비록 젊은 기자들과 소신이 다르다고 할지라도."

▲ 제작거부 4일째를 맞이한 5일 오전, KBS 기자 100여명이 서울 여의도 KBS신관 앞 광장에서 '말로는 저널리즘, 대놓고 관제방송, 이제는 끝장내자' 등의 구호를 외치고 있다. ⓒ곽상아

- 회사쪽에서는 제작거부에 대해 '기자 중 10%만 참여한 불법행동에 불과하다'며 의미를 깎아내리고 있는데.

"참여한 평기자가 200여명에 달한다. 부장, 팀장, 정치부 기자를 제외한 KBS보도본부 본사에 소속된 거의 모든 평기자가 참여한 건데, 10%라니 말도 안 된다.

KBS가 비판받게 된 현 상황의 70~80%가 (정부 여당 편향적인) 정치보도로 인한 것인데 막상 제작거부, 총파업에는 정치부 기자들이 남 일처럼 발 빼고 있다. 어떻게 보면 원인 제공자들인데, 부끄러움을 못 느끼는 것 같아 답답하다."

"KBS '뉴스9'에서 나갈 수 없었던 민감 아이템, 'Reset 뉴스9'으로!"

- 2010년 7월 새 노조 파업이 단협체결로 마무리됐고, 공정방송위원회가 설치됐지만 KBS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고 느끼는 시청자들이 많다.

"그동안 KBS 보도를 놓고 나오는 안팎의 지적들이 공방위 안건으로 고스란히 올라가고, 노측 공방위원들이 이를 아주 매섭게 추궁했지만 전혀 반영되지 않았다. 이 역시 사태가 여기까지 온 데 기여했다고 본다. 아무리 공방위가 제도적으로 보장돼 있더라도 편집권을 가진 사람들이 제작자들의 지적을 수용하지 않는다면, 현실이 바뀌기는 굉장히 힘든 것 같다."

- KBS 기자들의 반성이 진정성을 가지려면, 그동안 침묵했던 아이템들을 이제라도 제대로 보도해야 한다는 지적이 있는데.

"그래서 'Reset 뉴스9'을 준비하고 있다. 주로 10년차 미만인 젊은 기자들 15명이 준비 중이다. 내곡동 사저, BBK, 4대강 등을 다루게 될 텐데 다음주 수요일 정도에 첫 방송이 공개될 것이다. 그동안 KBS가 보도해야 했으나 보도할 수 없었던 이슈들을 제약없이 해보자는 것이 기본 취지다."

- 총선이라는 대형 이슈를 앞두고 공영 언론사들이 일대 봉기에 나선 초유의 사태가 일어나게 됐는데.

"언론사 입장에서나, 사회적으로나 '총선'은 굉장히 중요한 이슈다. 그러나 기자들 사이에서는 '우리가 갖고 있던 문제들을 그대로 안고서 아주 민감한 총선 이슈를 왜곡없이 보도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 많은 의구심이 있었다. 언론사 기자들이 울타리를 뛰쳐나와서, 내부에서는 할 수 없었던 취재를 공동으로 진행한다든지 하면 여러 가지 면에서 좋은 기회가 될 수 있을 것이라 판단한다."

"분노, 절망, 슬픔의 표출…시민들에게 용서를 구한다"

- '왜 정권이 힘빠지는 말기에서야 나섰나' 'MBC 파업 보고 따라나선 것 아니냐'는 비판도 있다.

"상당히 부끄럽다. 개인적으로는 KBS내의 제작거부 움직임이 좀 더 일찍 있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저희 기수가 2010년 12월에 김인규 사장 퇴진 촉구 성명서를 발표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다른 기자들의 적극적인 움직임이 있었다면 좋았을 것이다. 'MBC파업 따라하는 것 아니냐'는 비판 역시 이해한다. 그렇게 비치는 것에 대해 일정 정도 책임이 있다고 생각하고, 적극적으로 해나가겠다."

- 검찰이 KBS 도청 의혹에 대해 최종 무혐의 결론을 내렸지만, KBS가 도청 의혹에 연루돼 있다는 국민들의 의구심은 여전한 상황이다.

"(도청의혹을 받은 장 아무개 기자가) 동료이자 동기이기도 해서 말하는 게 조심스럽다. 그런데 실체적 진실을 잘 모르겠다. 저로서는 당사자가 (도청을) 했는지 안했는지 알 방법도 없다.

다만 수사과정에서 회사가 보여준 태도가 상당히 비겁했다. 만약 정말 도청을 안했다면 회사가 적극적으로 나서서 해당 기자를 보호해주고 법정 소송도 불사해야 했던 것 아닌가. 도청 논란이 불거진 것 자체가 언론사로서 부끄러운 일이지만, 실체적 진실을 떠나서 회사의 대응이 상당히 부적절하고 추악했다. 만약 떳떳한 해명이나 적극적 대응이 있었더라면, 이렇게까지 문제가 커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 마지막으로 시민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기자 본연의 역할을 해나갈 수 없다는 절박함에서 최후의 수단인 '제작거부'를 선택하게 됐다. 제작거부가 이미 시작됐고, 곧 파업이 이어지겠지만 시민들이 보기에는 당장 뉴스에서 큰 표시가 나지 않을 것이다. 일선에 남아있는 일부 동료들, 간부들이 있기 때문이다. 때문에 기자들의 절박한 심정이 TV를 통해 전달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아주 오랫동안 누적돼온 분노와 절망, 슬픔이 제작거부와 파업으로써 표출된 것임을 알아주셨으면 한다. 회사를 상대로 진행하는 파업이지만, 동시에 시민들을 향해 용서를 구하는 것이기도 하다. 시청자들께서 적극적으로 관심을 가져주셔서, 거리로 나선 기자들의 목소리가 사회적으로 의미있는 메아리가 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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