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스=윤수현 기자] EU 집행위원회가 지난해 12월 31일 원자력발전을 ‘그린 택소노미’(녹색 분류체계)에 포함시킨 것과 관련해 국민의힘과 보수 언론이 정부의 에너지 정책을 비판하고 나섰다. 한국 정부가 왜 원자력발전을 녹색 분류체계에서 제외했냐는 것이다. 하지만 EU 집행위원회 결정을 한국에 대입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EU는 ‘방사성 폐기물 처분 계획’을 전제조건으로 달았지만, 한국은 고준위 방사성 폐기물 처리 계획을 두고 수십 년간 논란을 이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EU 집행위원회는 신규 원전 건설 자금과 부지확보가 된 경우, 폐기물 안전 처분 계획이 마련된 경우에 한정해 원자력발전을 녹색 분류체계에 포함시키도록 했다. 한국 정부는 지난해 12월 30일 녹색 분류체계에서 원자력발전을 제외했다. 환경부는 "유럽연합의 논의과정을 지속적으로 파악하고 그 기준에 대해서도 면밀하게 검토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한빛 원자력발전소 (사진=한국수력원자력)

이를 두고 국민의힘과 보수 언론은 한국 정부의 결정을 비판하고 나섰다. 왜 EU 집행위원회와 다른 결정을 내렸냐는 것이다. 서울신문은 4일 사설 <‘친환경’이라며 원전 끌어안은 유럽, LNG 택한 한국>에서 “K택소노미에 원전을 빼고 LNG를 넣은 ‘모순’도 바로잡아야 한다”며 “유엔에 따르면 LNG는 전력 1kWh를 만드는 데 온실가스를 490g 배출한다. 원전(12g)보다 훨씬 많다”고 썼다. 서울신문은 “EU도 LNG를 조건부 녹색으로 인정했지만 우리(kWh당 340g)보다 온실가스 배출량 기준(270g)이 더 엄격하다”며 “논리대로라면 원전과 LNG 둘 다 빼든가 아니면 EU처럼 둘 다 조건부로 넣든가 해야 한다”고 밝혔다.

서울경제는 4일 사설 <美·EU도 원전 지원 나서는데 한국만 녹색투자서 빼나>에서 “문재인 정부는 탈원전을 고집하면서 세계의 흐름과 달리 외톨이 행보를 보이고 있다”며 “녹색 분류체계에서 원전이 빠지면 원전 기술 개발과 수출 등을 추진할 때 자금 조달에 차질을 빚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서울경제는 “정부는 녹색분류체계에서 원전을 제외한 주요 근거로 EU를 내세웠지만 이제 근거가 사라진 만큼 재고해야 한다”며 “정부는 지금이라도 오기의 탈원전 정책을 폐기하고 에너지 믹스로 전환해 차기 정부의 정책 부담을 덜어줘야 할 것”이라고 썼다.

조선일보는 3일 사설 <원자력을 ‘녹색 에너지’에서 제외, 임기 끝까지 대못 박기>에서 “원자력은 초기 설비 투자에 막대한 자금이 소요되는 구조여서, 거대 자금의 외면을 받으면 신규 건설이 어려워질 수 있다”며 “LNG를 녹색으로 분류하면서 원자력을 배제한다는 것은 생각하기 힘들다. 원자력에 대해 극도의 편견을 갖고 있는 대통령 한 사람 때문에 전력 에너지의 성격 규정까지 왜곡되고 있는 것”이라고 했다.

한국경제도 같은 날 사설 <EU도 '원전=녹색투자'…한국은 탈원전이 종교>에서 “원전 복귀가 세계적 추세임에도 탈원전을 무슨 종교 교리인 양 떠받드는 정부의 아집으로, 국제적 ‘원전 왕따’를 자초해 스스로 경쟁력을 갉아먹는 형국”이라며 “원전이 EU 택소노미에는 포함되고 ‘K-택소노미’에선 제외된다는 것은 원전 수출에 커다란 악재가 될 것이 자명하다”고 썼다.

국민의힘은 3일 논평에서 “EU는 원전을 녹색에너지에 포함해 기후변화의 주범인 이산화탄소 발생을 줄이는 동시에 가장 싸고 안정적으로 전기를 생산할 방법은 원전밖에 없음을 공식 인정했다”며 “문재인 정부가 자신들이 추진한 탈원전 정책을 합리화하고자 원전을 친환경 에너지에서 억지로 제외하는 ‘과학의 정치화’를 선택한 반면 EU는 ‘과학을 과학 그대로’ 인정하는 정반대 선택을 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사용후핵연료 저장조 (사진=연합뉴스)

국민의힘-보수 언론, 고준위 방사성 폐기물 처리 방안 외면

국민의힘과 서울경제·조선일보·한국경제는 논평·사설에서 EU가 ‘방사성 폐기물 처리 방안’을 조건으로 제시한 것을 언급하지 않았다. 현재 고준위 방사성 폐기물은 처리 방안이 뚜렷하지 않아 각 원전이 임시 보관 중이다. 월성원전 임시 저장시설은 2023년 포화되고, 고리·한빛 원전은 2031년 포화된다. 폐기물의 방사성 물질 양이 ‘자연 방사능 수준’으로 줄어들기 위해선 10만 년이 지나야 한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정부는 사회적 합의 절차를 거쳐 고준위 방사성 폐기물 영구 처분시설 부지를 선정하겠다고 밝혔지만, 관련 논란이 30여 년째 이어지고 있는 점을 고려하면 빠른 시일 내 현실성 있는 대안이 나오리라고 기대하기 어렵다. 또한 당장 부지가 선정된다고 하더라도 중간 저장시설은 2030년, 영구 처분시설은 2050년 이후 가동될 수 있다. 고준위 방사성 폐기물 영구 처분시설을 마련한 국가는 핀란드가 유일하다.

이와 관련해 한겨레는 4일 사설 <‘택소노미’에 원전 포함한 EU, 우리와는 사정 다르다>에서 “침소봉대를 경계해야 한다”며 “나라마다 사정이 다른 것도 유념해야 한다. 무엇보다 유럽연합이 원전을 그린 택소노미에 포함시킨 배경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EU 결정은 프랑스와 동유럽 등 원전 의존 비율이 높은 국가들이 주도했다. 독일 등 탈원전 정책을 추진해 온 국가들은 EU 집행위원회 결정에 반대하고 있다. 오스트리아는 소송을 예고한 상황이다.

한겨레는 “유럽연합 초안에 담긴 까다로운 전제조건도 꼼꼼히 살펴봐야 한다”며 “신규 원전은 방사성폐기물을 안전하게 처분할 계획과 자금, 부지가 있어야 추진할 수 있도록 했다. 이런 조건을 충족하면서 신규 원전이나 원전 수명 연장을 추진할 수 있는 여지는 매우 제한적이고, 경제성을 갖추기도 대단히 어렵다”고 했다.

한겨레는 “유럽연합의 그린 택소노미를 들어 국내 일부 언론은 한국형 녹색 분류체계가 원전 산업의 경쟁력을 무너뜨린다고 공격하고 있다”며 “원전은 탄소중립으로 가기 위한 과도기적 ‘에너지 믹스’ 전략 이상의 경제적 가치를 찾기 어렵다. 원전 밀집도는 세계 최고 수준이어서 추가 부지 확보가 어려울뿐더러, 방사성 폐기물을 처리할 곳을 찾지 못해 최근 기존 원전 부지 안에 임시저장하겠다는 위험천만한 결정을 내리기도 했다”고 지적했다. 한겨레는 “우리에게는 우리에게 맞는 그린 택소노미가 필요한 것”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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