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06년 8월 11일, 안기부 X파일 보도로 법정에 선 MBC 이상호 기자는 판사의 주문을 들으며 그동안 참았던 눈물을 왈칵 쏟아냈다. 무죄였다. 당시 방청석에 앉아 있던 나는 그 순간 이상호 기자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어깨가 들썩이고 있었다. 나 역시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혼자 힘으로 두 어깨에 짊어져야 했던 그 짐이 얼마나 무거웠을까 생각하니 코끝이 시큰해졌다.

1심 재판이 끝난 뒤 법원 입구에서 열린 시민사회단체 공동기자회견에서 이상호 기자는 이런 취지의 말을 했다. “저는 대한민국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삼성을 누구보다 사랑합니다. 삼성에서 일하는 직원들을 가슴 깊이 존경합니다. 제가 미워하는 것은 삼성도, 삼성의 임직원들도 아닙니다. 저는 삼성을 이렇게 만든 총수와 경영진을 비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MBC 이상호 기자 “삼성을 이렇게 만든 총수와 경영진을 비판하는 것”

▲ <고르디우스의 매듭>(두레스 경영연구소)
과거 삼성전자 직원이었던 이 책의 저자 김병윤 씨도 이 점을 명확하게 지적한다. “사실 ‘반기업 정서’란 말은 올바른 말이 아니다. 실제로는 ‘반(反)부패 기업인 정서’가 보다 정확한 표현이다.” 맞는 얘기다. 삼성은 우리가 아무리 자랑해도 아깝지 않은 세계적인 기업이다. 해외에 나가면 글로벌 기업 삼성의 위상을 더 실감할 수 있다. 공항에 내리자마자 목 좋은 자리에 떡 하니 서 있는 ‘SAMSUNG’이라는 큼지막한 광고판을 보았을 때, 한국인으로서 가슴 뿌듯하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을까. 혼동하지 말자. 이상호 기자도, 이 책의 저자도, 삼성을 비판하는 다른 많은 사람들도 결코 삼성을 미워하는 것이 아니다. 저자가 말했듯 그들이 삼성이라는 거대한 자본권력을 상대로 “모든 것을 무릅쓰고 총대를 메”는 이유는 명확하다. 변하라는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이 책이 보여주는 문제제기의 수준은 다소 기대에 못 미칠 수도 있다. 저자가 삼성에 직접 몸을 담고 있었음을 감안하면 더더욱 그렇다. 표현은 신랄하지만 기대했던 새롭고도 충격적인 내용은 많지 않다. 문제해결 방식도 온건하다. 저자는 비자금이나 차명계좌, 편법적인 대물림 같은 핵심들에 관한 구체적인 사례를 제시하지 않는다. 짐작컨대, 이 책은 ‘말할 수 있는 것’과 ‘말해선 안 될 것’ 사이에서 이뤄진 치열한 자기검열의 산물로 보인다. 하지만 이런 담론의 수위가 이 책의 의미를 평가 절하하는 이유가 되지는 않는다. 그 대상이 삼성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저자의 ‘용기’ 있고 ‘의미’ 있는 문제제기는 그것만으로도 높이 평가받아 마땅하다.

‘말할 수 있는 것’과 ‘말해선 안될 것’ 사이에 놓여진 고르디우스의 매듭

삼성 X파일 사건 관련 당사자들이 모두 무혐의 판정을 받은 이유를 저자는 이렇게 적고 있다. “삼성 엑스파일 사건에는 분명 많은 의혹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결과가 나오는 것은 삼성을 위해서라면 온 몸을 다 바쳐 충성하는 외인구단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몸은 정치계, 언론계, 법조계에 두고 있지만 정신적으로는 삼성에 종속되어 있는 인물들이 그만큼 많다는 것이다.”

삼성이 가장 영향력 있다는 언론 가문, 이른바 ‘조중동’ 총수 일가와 이중삼중의 혼맥(婚脈)으로 끈끈한 유착관계를 다져온 것은 유명하다. (삼성 이건희 회장과 중앙일보 홍진기 회장의 딸 홍라희 씨의 결혼을 시작으로 삼성과 조중동의 복잡한 혼맥은 현대, LG를 돌고 돌아 조선일보로 연결된다.) 비판은 무력화되고, 언론은 필경 ‘위기설’을 흘린다. 저자의 비판에는 날이 서 있다. “간혹 특정한 한 인물의 존재 여부에 따라 기업의 사활이 결정되고 나라의 흥망이 좌우되는 것처럼 논조를 펴는 언론인들이 있다. 그들의 배경에 무엇이 있는지는 보지 않아도 알 일이다.”

▲ 한겨레 4월14일자 5면.
따라서 삼성의 문제는 비단 삼성이라는 한 기업의 문제가 아니게 되는 것이다. 사실 지겨울 정도로 들어온 얘기다. 저자의 말대로 정경유착과 불법, 편법을 넘나드는 부의 세습, 독과점과 문어발식 기업 확장, 임금구조의 왜곡, 언론 가문과의 혼맥 등을 통해 잘 정비된 ‘블랙홀 시스템’은 삼성을 비판하고 견제해야 할 주체들까지 한통속으로 만들어버림으로써 ‘삼성 왕국’ 건설에 너도나도 동참하게 만들었다. 수많은 방패막이에 둘러싸인 이런 비정상적인 조직에 민주주의가 끼어들 여지는 없다.

저자는 삼성가의 가신(家臣)들에 대해서도 신랄한 비판을 아끼지 않는다. “삼성의 가신들은 현재 살아 있는 이 회장을 미화하기 위해서 반도체 신화의 공적은 이 회장에게 돌리고, 삼성자동차 인수 정책 실패의 책임은 전문경영인에게 전가하고 있다. 너무나 명백한 사실조차 이렇게 조작하는 사람들이 암약하는 조직이 건강할 수 있겠는가.”

삼성의 문제는 한 기업의 문제에서 그치지 않는다

지난해 경제팀 기자로 삼성을 출입하면서 많은 삼성 직원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들 중에는 비자금이나 차명 계좌의 존재 여부를 한사코 부인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물론 상대가 출입 기자라는 것을 의식한 발언이었음을 이해 못할 바는 아니었지만, 회사와 사주, 자신의 운명을 동일시하는 이런 낙후된 인식의 편린들은 희극(喜劇)이라기보다는 차라리 비극(悲劇)에 가깝다. 바로 이런 점들이 저자가 이 책을 쓴 이유이기도 하다.

▲ 유한양행의 창립자 고(故) 유일한 회장.
저자는 삼성을 비롯한 재벌의 문제가 ‘난마’처럼 얽혀 있는 현실이 한국 경제의 미래를 암담하게 만드는 ‘독버섯’이라고 진단한다. 삼성은 그동안 변화할 수 있는 수많은 기회를 스스로 저버렸고, 그럴수록 삼성이라는 문제는 점점 더 풀기 어려운 ‘매듭’으로 꼬여갔다. 더 암담한 것은 현재 진행되고 있는 삼성 비자금 조성 의혹 사건을 통해 그런 매듭이 속 시원하게 풀릴 수 있을지 회의적인 시각이 적지 않다는 데 있다.

책을 읽어 내려가다 보면 얼마 전에 내한했던 ‘투자의 귀재’ 워런 버핏(Warren Buffett)의 얘기가 나온다. 자선재단에 37조 원에 가까운 천문학적 액수를 기부하고, 자신이 죽으면 자식들에게는 한 푼도 물려주지 않겠다고 공언한 버핏은 아직도 1958년에 구입한 평범한 중산층 주택에서 검소하고 살고 있다고 한다. 버핏은 이렇게 말했다. “돈을 제대로 쓰는 것은 돈을 버는 것보다 훨씬 어렵다.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기로 한 것은 돈을 제대로 쓰기 위해서다. 나는 행운아이며, 이 행운을 남들과 나누고 싶다.”

유한양행의 창립자 고(故) 유일한 회장도 이런 말을 남겼다. “기업은 개인의 것이 아니고 사회의 것이다. 기업에서 얻은 이익은 그 기업을 키워준 사회에 환원하여야 한다. 기업의 소유주는 사회다. 단지 그 관리를 개인이 할 뿐이다. 기업은 사회의 이익 증진을 위해서 존재하는 기구다.” 그렇다면 이건희 회장을 비롯한 국내 굴지의 재벌총수들은 어떤가. 저자는 묻고 있다. “그들에게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바라는 건 정말 과욕일까?”

2001년 KBS에 기자로 입사했다. 2004년 8월부터 2006년 12월까지 KBS 매체비평 프로그램 <미디어포커스>를 제작 담당하면서 언론에 관심 갖게 되고, 2006년 11월부터 1년 동안 50회에 걸쳐 미디어오늘에 <김석의 영화읽기>를 연재했다. 베트남전 당시 미군의 민간인 학살을 추적보도한 탐사저널리스트 시모어 허쉬의 저서 <밀라이 학살과 후유증에 관한 보고>를 번역 출간 준비 중이고, 현재 KBS 사회팀 기자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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