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스=이정희] 한 미술가의 전시회를 관람한다는 건 그 작가가 생산한 미술 작품들을 집중적으로 볼 기회를 갖는 것이다. 하지만 그저 많은 작품을 볼 수 있어서 좋은 것만이 아니다. 작품들을 통해 예술가 한 사람의 인생을 짚어볼 수 있다는 점에서 전시회는 한 편의 '자서전'과도 같다.

마이아트뮤지엄에서 진행 중인 <샤갈 특별전 : Chagall and the Bible> 역시 마찬가지다. 마르크 샤갈은 '색채의 마법사'란 애칭처럼 빨강, 노랑, 파랑, 보라에 이르기까지 선명하고 강렬하게 배치된 그림으로 기억될 것이다. 또한 구도와 상관없이 자유로이 부양한 인물이나 동물들로 기억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혹은 그가 즐겨 그리는 '신랑 신부' 등의 등장인물로 인해 사랑의 화가로 회자되기도 한다.

우리가 아는 마르크 샤갈은 화가이기도 하지만, 무대 예술가 혹은 일러스트였으며 시인이기도 하다. 전시회를 통해 다양한 예술적 면모를 뽐낸 샤갈을 만날 수 있다.

경계인의 초상

샤갈 특별전 : Chagall and the Bible (사진제공=마이아트뮤지엄)

그가 프랑스로 온 193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연대기적으로 전시된 작품들을 통해 '경계인'으로 부유해야 했던 마르크 샤갈이란 인물을 다시금 살펴볼 수 있다.

러시아의 유대인 집안에서 태어난 마르크 샤갈. 그가 처음부터 러시아로부터 배척당한 건 아니었다. 벨라루스 비테스크가 고향이었던 마르크 샤갈은 러시아 혁명에 적극 참여했다. 그래서 자신의 고향이었던 비테스크현 인민 예술분과위원장이 되었고 비테스크에 미술 전문학교를 만들었다.

샤갈과 같은 다수의 진보적 지식인들이 러시아 혁명에 앞장섰고, 그들은 혁명 이후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는 데 자신의 능력을 아낌없이 바쳤다. 하지만 성공한 혁명은 '새로운 볼셰비키 국가'에 어울리는 예술가를 원했다. 샤갈은 그 대상이 아니었다. 형태와 색을 배제한 절대주의 사조의 번성은 샤갈이라는 자유분방한 영혼을 지닌 예술가의 입지를 좁혀간다. 결국 그는 '어제의 동지가 적이 되어버린' 상황에서 스스로 러시아를 떠나 프랑스로 간다.

전시된 '세 명의 곡예사', '투르넬 강변', '에펠탑의 연인들'은 그의 작품 중 후기인 1960년대 작품이지만 샤갈 특유의 강렬한 색조가 여전하다. 특히 검은 테두리 선으로 인해 선명한 색조가 강조되기도 한다. 이런 색조의 원천은 어딜까? 전문가들은 러시아 전통화 '이콘'에서 그 유래를 찾는다.

'에펠탑의 연인들'(좌) '세 명의 곡예사'(우) (사진제공=마이아트뮤지엄)

우리 화가들 그림에서 고유의 단청이나 색동의 원색 배합의 흔적을 찾을 수 있듯이, 마르크 샤갈의 그림에서 원색의 색조 배합을 통해 성서적 이야기를 전달했던 러시아 이콘의 영향을 찾는다.

문자를 아는 이들이 드문 사회에서 그림을 통해 성서 등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건 대중적인 방식이다. 우리나라 사찰의 심우도나 서양 교회의 벽화와 스테인드글라스가 그것이다. 러시아의 이콘 역시 그런 '문화적 매체'였다. 이콘에서 말은 주요 캐릭터였고, 샤갈의 그림에서 찾아볼 수 있다. 고국을 떠났지만 그의 그림에서 러시아는 여전했다.

또 한 가지 샤갈에게 영향을 준 건 18세기 동유럽에서 등장한 '하시디즘'이다. 21세기 뉴욕 거리에서도 볼 수 있는, 검은 수염을 기른 랍비들로 상징되는 보다 강력한 ‘성속일체’를 주장한 이 종교적 분파에서는 수탉, 암소 등에 인간의 영혼이 들어간다는 믿음이 있었다. 하시디즘의 영향력이 큰 집안에서 자란 샤갈의 그림에서 수탉과 염소 등은 빼놓을 수 없는 요소이다.

하지만 그가 평생 자신의 그림에 남긴 러시아적 색채와 유대인의 정체성을 담은 상징들에도 불구하고, 샤갈은 자신의 것을 지킬 수 없었다. 고국에서 떠났고, 유대인이었기에 2차대전 이전 머물던 독일에서 도망쳐 나와야 했고, 독일이 점령한 프랑스에서 친지들의 도움을 얻어 가까스로 미국으로 건너갈 수 있었다. 그의 그림에 등장한 허공에 뜬 인물들과 수탉, 염소, 말 등 다양한 동물들은 자신의 고국을 떠나 전전하며 살아야 했던 경계인의 심정을 대변한 모습일지도 모르겠다.

조국 러시아와 유대교라는 그의 생래적 배경에 더해, 프랑스에서 샤갈은 당시 유행하던 화풍이던 야수파와 피카소와의 만남 등을 통해 입체파라는 새로운 미술사조와 조우하게 된다. 또한 당시 유럽에서 프로이트의 등장과 함께 대두된 무의식이라는 세계는 '초현실주의'라는 영향력을 샤갈에게 입혔다.

하지만 오늘날 샤갈이란 미술가를 입체파나 야수파 혹은 초현실주의 그 어떤 사조로도 정의 내리지 않듯, 샤갈이란 예술가는 그 모든 화풍을 넘어 자신만의 독자적 세계를 만들어갔다.

모세에서 예수로

전시회에는 그가 외뢰인의 부탁을 받고 이스라엘을 방문하여 그린 성서화들이 전시되어 있다. 선명한 색감을 통해 감정을 적나라하게 드러내어 보인 듯한 화가 샤갈과 ‘성서’는 어쩐지 이질적인 조합처럼 여겨진다.

‘푸른 다윗왕’ (사진제공=마이아트뮤지엄)

19세기 후반 옛 이스라엘 지역인 팔레스타인에 자신들의 국가를 다시 세우자는 '시온주의'가 등장했다. 이런 움직임은 러시아 혁명으로 러시아에서 배척당한 유대인들이 대거 팔레스타인 지역에 이주하며 정치적인 움직임으로 실현되기 시작했다. 고향을 떠나 몇천 년 동안 이방을 떠돌던 유대인의 새로운 국가 건설, 의뢰인의 부탁이 아니더라도 그 역시 고국을 떠나온 입장인 샤갈에게 이스라엘의 방문과 성서를 그림으로 구현해내는 건 그만의 '이상향의 구현'으로 보인다.

전시회 그림엔 창세기에 이어 모세, 여호수아, 다윗, 솔로몬 등 익숙한 성서의 인물들이 등장한다. 하지만, 계율로서의 성서에 익숙한 사람들에게 샤갈의 성화는 어쩌면 무안하게 다가왔을지 모를 일이다. 전시회의 해석처럼 많은 성서의 장면 중 샤갈이 선택하여 그린 장면은 샤갈다운 장면들이다. 즉 성서이지만, 마치 그리스 신화나 로마 신화처럼 성서 속 인물들의 선과 악이 가감 없이 적나라하게 그려져 있다. 골리앗을 이긴 다윗과, 장군 밧세바의 아내를 탐해 그녀의 방에 들었다 야반도주하는 다윗이 나란히 걸려 있다.

‘강기슭에서의 부활’ (사진제공=마이아트뮤지엄)

모세를 교조로 가나안 땅에서 시작된 유대교도답게 샤갈의 그림에 모세는 구원자로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하지만 동시에 선민사상에 입각한 유대교에서는 수용하지 않는 ‘메시아’ 예수에 대한 존중 또한 샤갈은 마다하지 않는다. 구원자로서 모세로 시작된 성화는 메시아 예수로 마무리된다. 유대교였으나 본의 아니게 코스모폴리탄으로 살아가야 했던 자유로운 영혼 샤갈다운 성서적 해석이다.

성화 속에서도 샤갈다운 강렬한 색감과 거친 붓 터치는 멈추지 않는다. 또한 주목해야 할 것은 모세와 예수를 담은 태피스트리 대작을 제외하고는, 전시회 작품 대다수는 그가 베를린에서 배워 시작한 동판 기법을 활용했단 점이다. 특히 초판과 완성본의 작품들이 나란히 전시되어 작가가 작품을 완성시켜 가는 과정을 살펴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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