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스=이정희] 아빠가 돌아가신 후 나는 엄마가 행복하기만을 바랐다. 엄마를 돕지 않으면 난 사내도 아니지.

영화 <파워 오브 도그>는 이 문구와 함께 시작된다. 과연 ‘사내답게’ 엄마를 도우려는 주체가 누굴까? 그리고 시작되는 이야기, 사내다운 남자 '필(베네딕트 컴버배치 분)’이 시선을 끈다. 일자무식처럼 보이는데 유려한 필적, 알고 보면 예일대 출신이라니. 하지만 동생 조지(제시 플리먼스 분)와 함께 목장을 경영하고 있는 필은 손님들을 초대한 자리에 동생이 씻고 오라는 부탁이 싫어서 그 자리 참석을 마다하고, 말끝마다 전설의 카우보이 '브롱코 헨리 가라사대'를 외치는 마초남이다. (* 이하 영화 <파워 오브 도그>의 주요 내용이 포함돼 있습니다)

필, 사내답고 사내답고자 하다

영화 <파워 오브 도그> 스틸 이미지

필은 거침없다. 흔히 남자들 군대 이야기하듯 브롱코 헨리와의 거침없는 카우보이 시절 이야기를 연신 쏟아내는 필은 거친 밧줄을 맨손으로 잡으며 목장 카우보이들을 '정신적'으로 제압한다. 또한 오랜 시간 함께 지낸 동생을 여전히 공부도 못해 대학도 못 간 놈이라며 대놓고 무시한다.

그런데 대놓고 무시하면서도 동생이 잠깐이라도 안 보이면 찾아댄다. 그런 필에게 청천벽력 같은 일이 생겼다. 동생이 결혼을 했다며, 그들이 소를 팔러 나간 읍내에서 식당을 하던 로즈(커스틴 던스트 분)를 데려온 것이다. 여자라면 '사서 욕망을 풀면' 그만이라고 생각하던 필에게 로즈는 '동생이 사랑하는 여자'가 아니라 아들 대학 보내기 위해 동생의 돈을 노리는 협잡꾼일 뿐이다.

<파워 오브 도그>는 <피아노> 제인 캠피온 감독의 작품이다. 19세기 말 빅토리아 시대 스코틀랜드와 뉴질랜드를 배경으로 자기 삶에 결정권을 가질 수 없었던 미혼모 에이다의 욕망이 '피아노'를 매개로 절실하게, 그리고 처절하게 그려졌던 작품이 바로 <피아노>였다. 손, 그것도 하얗고 검은 피아노의 건반을 누르는 손가락은 얼마나 '에로틱한 존재'인가. 아니, 인간의 순수한 욕망은 결코 억눌러질 수 없는 감정이라는 걸 피아노를 통해 솔직하게 드러냈던 제인 캠피온의 작품은 그래서 오래도록 회자되는 명작으로 기억된다.

영화 <파워 오브 도그> 스틸 이미지

<파워 오브 도그>에서도 '피아노'는 갈등의 매개체가 된다. 결혼 후 집에 온 로즈가 공손하게 인사를 하지만 내가 왜 당신 시아주버니냐며 필은 대놓고 비아냥거렸다. 로즈에게 피아노를 선물한 조지. 로즈는 손님 초대 자리 연주를 위해 연습을 하지만, 그녀의 서투른 연주는 필의 능숙한 만돌린 연주에 묻혀 버린다. 피아노를 정점으로 안정과 행복을 얻고 싶은 로즈와 그런 로즈를 인정할 수 없는 이 집의 실질적 권력자 필의 갈등이 첨예하게 드러난다. 조지의 아내로서 농장에 왔지만 필에게 철저하게 무시되는 상황에서 로즈는 점점 술에 의지하고 급기야 '알콜릭'의 상태에 빠진다.

변함없이 농장을 자신만의 성채로 유지하며 로즈를 정신적으로 옥죄어 가던 필, 하지만 변수가 등장한다. 방학을 맞이하여 로즈의 아들 피터(코디 스밋 맥피 분)가 농장에 머물게 된 것이다.

두 사람은 '구원(舊怨)'의 사이이다. 로즈의 식당을 찾은 필이 피터를 남자답지 못하다며 조롱한 것도 모자라 그가 정성스레 만든 종이꽃을 담뱃불 쏘시개로 써버렸기 때문이다. 엄마가 사준 청바지에 카우보이 모자를 쓴 채 등장한 피터를 여전히 필은 무시하지만, 피터가 그만 필만의 비밀 장소를 엿보게 됐다.

영화 <파워 오브 도그> 스틸 이미지

연기로 치면 두 말 하면 잔소리가 되는 베네딕트 컴버배치가 연기한 필. 거친 카우보이 그 자체였지만 자신만의 비밀 장소에서 사연이 있는 듯한 스카프로 자신의 벗은 몸을 애무하는 필, 그 양극단의 인물이 바로 <파워 오브 독>의 관건이다.

필이 칭송해 마지않던 전설의 카우보이의 이름은 피터가 엿보게 된, 남성 나신이 게재된 잡지 속에 등장한다. 영화 속 배경이 되는 1925년은 미국에서 게리 쿠퍼와 존 웨인이 등장하는 서부영화가 인기를 끌기 시작하던 시대였다. 게리 쿠퍼와 존 웨인으로 상징되는 '남성다운 남성'이 시대의 아이콘이었던 때, 카우보이를 이끌며 농장주로 살아가야 했던 필은 자신의 정체성을 숨기고 마초로 포장한다.

마초가 쏟아낸 혐오의 종말

손님을 초대한 동생의 유일한 간청이 '제발 좀 씻어달라'가 되듯이, 동생조차 감쪽같이 속인 필의 마초 코스프레. 하지만 그의 억눌린 욕망은 '혐오'라는 형태로 표출된다. 자신은 숨어서야 풀어내는 정체성을 그대로 드러낸 듯한 피터는 그래서 용납할 수 없는 대상이었다. 그리고 집착인지, 가부장으로서 보호인지 모호한 동생이 데리고 온 로즈는 인정할 수 없는 상대였다.

영화 <파워 오브 도그> 스틸 이미지

내 생명을 칼에서 건지시며 내 유일한 것을 개의 세력에서 구하소서- 구약 시편 22편, 20절

'혐오'의 기원에 정작 그 혐오 대상에 대한 ‘애증’이 자리잡고 있다는 분석처럼, 필이라는 인물을 통해 제인 캠피온 감독이 집요하게 주목한 건 바로 그 혐오의 실체이다. 즉, 필에게 로즈는 자신의 정체성을 억누르면서까지 구축한 경제적 공동체를 위협하는 '개'의 세력이지만, 정작 필 그 자신이 개의 성정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존재인 것이다.

그런 필이기에, 자신의 비밀을 아는 듯한 피터에게 접근하다 그가 농장 앞의 산을 개의 형상으로 알아보는 순간, 그저 '개의 세력'이던 피터를 다른 관점에서 보기 시작한다. 하지만 필의 피터에 대한 미묘한 호의는 로즈의 불안감을 더욱 증폭시키고, 결국 필의 파국을 초래한다.

“엄마를 돕지 않으면 난 사내도 아니지”, 영화는 이 서막의 미스터리한 문구를 풀어내는 한 편의 스릴러적 구성으로 마무리된다. 그리고 그 결말을 통해 제인 캠피온 감독은 묻는다. '사내다움'이란? 필이 무시하고 조롱해 마지않던 피터의 여성스러움이 숨긴 '사내다움'은 칼이 되어 필을 겨눈다. 필의 사내다움도 피터의 사내다움도, 모두 왜곡된 남성성이다. 그 왜곡된 남성성이 1925년 몬태나 농장의 비극을 잉태한다. 과연 그 비극은 1925년 미국만의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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