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스=이정희] '신의 심판'을 앞세운 스릴러 <지옥>이 <오징어 게임>에 이어 전 세계 넷플릭스 1위에 등극했다. 21세기에 신이라니! 하지만 21세기에도 여전히 사람들은 신을 빌어 세상을 이해하려 든다는 것을 시리즈 <지옥>은 명쾌하게 설명한다. 하지만 신을 빌어 세상을 이해하기만 할까. 또 다른 면에서 신은 인간의 이기와 탐욕을 위한 편의적인 '도구'가 아니었을까.

넷플릭스를 통해 공개된 2020년 작 <악마는 사라지지 않는다>. 아이러니하게도 제목은 '악마'를 인용하지만, 영화는 런닝타임 내내 '신'을 읊는다. 신의 이름으로 온 악마들. 하지만 그들은 그저 '인간'들이다.

1957년 노컴스티프에는 대략 400명이 살고 있었다. 이런저런 악행과 비운으로 그중 대부분이 혈연관계였다. 이유가 욕망이었든 필요였든 단순한 무지였든 간에 말이다.

영화 <악마는 사라지지 않는다> 포스터

영화는 원작자인 도널드 레이 폴록의 내레이션으로 시작된다. 이야기는 2차대전에 참전했던 윌라드 러셀(빌 스카스가드 분)이 제대하며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에서 시작하여, 그의 아들 아빈 러셀(톰 홀랜드 분)이 베트남전에 참전이라도 할까 하며 길을 떠나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2차대전 종전에서 베트남전까지의 미국, 그리고 오하이오와 웨스트버지니아의 낙후된 도시, 오래된 제지공장과 도축장만이 사람들이 일할 곳이었던 시대적 배경에 우선 주목해야 한다.

1848년 뉴욕주에서 '세계 최초의 여성인권대회'가 열렸다. 이 대회에서는 남녀 모두 자연권이 평등하게 부여된 사회의 대등한 구성원이라는 <소신선언>이 채택되었고, 이것은 여성참정권운동의 기초가 되었다. 하지만 여성에게 법적인 참정권이 비준된 건 1920년대였다. 여성의 법적 권리에 대한 승인은 사회적으로 여성의 존재를 받아들이는 과정이다. 하지만 법이 승인되어도 성평등의 정신이 전 사회적으로 수용되는 데는 시간이 걸린다. 미국의 상대적으로 낙후된 도시에서 여성의 존재는 어떤 대상일까?

우리 사회도 마찬가지지 않은가. 오늘날 한국 사회는 이른바 세대분열 현상이 팽배해있다. 그 세대 간 의식의 균열은 종종 성평등에 대한 의식 차이로 드러난다. 이렇게 사회의 발달은 그 사회를 이루는 성원들의 의식적 발달로 이어진다.

악마와 신의 이야기를 하며 왜 '여성'에 대한 의식적 발전을 논해야 하냐고? 후진의 사회에서, 후진의 의식은 상대의 성을 대상화하며 관습적으로 그들의 행동을 합리화하기 때문이다. 마치 우리나라에서 60, 70년대까지만 해도 처첩제도가 암묵적으로 존재했었고, 동시에 굿판과 같은 종교적 의식을 통한 구복신앙이 관습적 행태로 횡행했던 것과 같다.

악행은 비운을 낳는다

영화 <악마는 사라지지 않는다> 스틸 컷

귀향하던 윌라드는 우연히 들른 식당에서 일하던 샬롯(헤일리 베넷 분)에게 첫눈에 반한다. 그런데 그 식당에서 인연을 만든 사람들은 윌라드와 샬롯만이 아니다. 샬롯과 함께 일하던 샌디(라일리 키오 분) 역시 손님인 칼(제이슨 클락 분)과 통한다. 그리고 이 엇갈린 우연한 만남들은 영화를 여는 내레이션 속 악행과 비운의 씨앗이 된다.

어머니가 권하던 레노라(엘리자 스캔런 분) 대신 샬롯과 노컴스티프에 터전을 잡은 윌라드는 도축장에 일하며 아들 아빈을 낳고 살아간다. 하지만 윌라드의 행복은 그리 길지 못했다. 어느 날 쓰러진 샬롯은 암 말기 판정을 받는다. 그리고 샬롯을 통해 행복한 가정을 추구하던 윌라드는 아노미 상태에 빠진다.

혼란스런 윌라드가 손을 뻗은 건 '신'이다. 2차대전 중 죽은 동료의 시신을 제물로 삼은 일본군의 만행을 목격한 바 있던 윌라드. 그래서 그는 줄곧 교회도 나가지 않은 채 종교를 외면해 왔다. 하지만 이방인으로서의 삶이 고되고, 거기에 샬롯까지 죽어가자 집 뒤에 그저 나뭇가지로 엮은 형상에 불과했던 십자가에 점점 더 매달린다. 심지어 아빈이 애지중지 키우던 애완견을 제물로 삼아 샬롯의 목숨을 구하고자 하는 지경에 이른다.

하지만 윌라드가 사랑하던 샬롯은 애완견을 제물로 삼아도 구할 수 없었다. 그리고 샬롯의 죽음과 함께 낯선 지역에 어떻게든 발붙여 살아보려던 윌라드의 의지도 꺾이고 만다. 결국 고아가 된 아빈은 할머니네 집으로 가 할머니가 윌라드의 배필로 권했던 레노라의 딸, 역시 고아가 된 헬렌(미아 와시코우스카 분)과 피붙이처럼 자란다.

영화 <악마는 사라지지 않는다> 스틸 컷

영화의 구성은 아빈의 잔혹사를 따라간다. 그는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는 이들의 악행으로 인해 사랑하는 이들을 잃고, 그 자신도 목숨을 잃을 뻔 한다. 그런데 그런 삶의 비운에 '성'과 '종교'는 세트 메뉴처럼 함께한다.

레노라의 어머니 헬렌은 독실한 신자였다. 그녀의 신실한 마음을 움직인 건 교회에 나타난 떠돌이 부흥사 형제였다. 그들은 노래를 불러 종교적 분위기를 고양시키고, 자신이 벌을 무서워했는데 신심으로 극복했다며 벌을 뒤집어쓰는 종교적 이벤트를 벌인다. 하지만 그의 신심은 벌로부터 로이를 지켜주지 못했다. 벌에 쏘여 부흥사 자리마저 잃은 채 방문을 잠그고 신께 자신의 구원을 청하던 로이는 신의 대답을 들었을까.

아빈의 아버지 윌라드가 애완견을 죽여 아내의 목숨을 구하듯, 로이는 아내의 목숨을 통해 신의 구원을 확인하려 했다. 하지만 그의 앞에서 피를 쏟으며 쓰러진 아내를 신은 구원하지 않았다. 그저 로이 형제가 줄행랑쳐야 할 일만 남았을 따름이다.

아비들의 야만스런 종교적 구애로 인해 사랑하는 이들을 잃은 아빈과 레노라. 하지만 비극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가족을 잃은 채 서로 위로하며 자란 아빈과 레노라의 처지는 또래 아이들의 놀림감이 되었다. 아버지가 가르쳐준 대로, 레노라를 괴롭히던 아이들을 손봐주기로 작정한 날 하지만 레노라는 또 다른 야만의 제물이 되고 만다.

영화 <악마는 사라지지 않는다> 스틸 컷

아빈의 할머니가 없는 살림에 정성스레 마련한 음식을 싸구려 닭내장이라는 이유로 조롱하던 신임 목사 프레스턴(로버트 패틴슨 분)은 신실한 레노라를 신을 팔아 자기 욕망의 제물로 삼는다. 그러고는 시치미를 뚝 떼어버린 프레스턴. 레노라에 대한 아빈의 사명감은 그로 하여금 아버지의 유일한 물건인 '총'을 사용하도록 만든다. 결국 다시 길을 떠나게 된 아빈. 하지만 그의 비운은 아직 멈추지 않는다.

영화 속 아빈을 비운으로 몰아넣는 악행을 저지른 이들은 아이러니하게도 그 악행에 ‘신’을 판다. 그 자신이 오하이오 출신으로 제지공장 노동자와 트럭운전을 했던 원작가 도널드 레이 폴록의 생생한 경험을 바탕으로 쓰인 작품은 아빈이라는 한 인물을 중심으로 주변 인물들의 악행을 그려내고 있다. 하지만 그건 그저 특수한 개인들의 이야기가 아니다. 1950년대 2차대전의 가장 큰 수혜자, 자본주의의 정점인 미국 사회를 한 꺼풀 벗겨낸 민낯과 다름없다. 외진 도시에서 여전히 신을 팔아 야만적인 욕망을 풀어놓은 인간들의 후진 얼굴이다.

이 기괴한 미국 현대사의 한 장면, 하지만 시대를 연기하는 배우들의 면면은 화려하다. 주인공 아빈 역의 <스파이더 맨> 톰 홀랜드를 비롯하여, 배트맨으로 돌아올 로버트 패틴슨의 파렴치함, 그가 정말 <윈터 솔져>의 버키인가 싶을 정도로 두툼한 배를 주체하지 못하는 보안관으로 돌아온 세바스찬 스탠, <그것>의 삐에로 분장을 지운 빌 스카스카드까지 연기의 만찬을 제대로 만끽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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