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스=장영] 기업은행이 7연패 끝에 겨우 시즌 첫 승을 얻었다. 상대팀이 페퍼저축은행(이하 페퍼저축)라는 점이 어쩌면 다행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만큼 전력 자체가 좋은 건 아니었다.

페퍼저축은 시즌 첫승 후 뭔가 힘이 빠진 모습이었다. 고대했던 첫승을 빠르게 이뤘다는 안도감과 1라운드에 모든 힘을 쏟아 무기력해진 것은 아닌가 하는 우려가 들 정도였다. 2라운드 첫 경기에 비해 기업은행과 경기는 그나마 조금은 달라진 모습이었다. 아무래도 첫승을 거뒀던 팀과 리턴매치라는 점에서 기대 역시 존재했을 듯하다.

7연패의 기업은행으로서는 페퍼저축에게도 지면 이길 수 있는 상대가 없다. 부진이 2라운드에도 지속되며 끝없는 추락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는 의미다. 국가대표 3인방을 앞세워 유력한 우승권으로 분류되었지만, 기업은행의 힘은 외국인 선수에게서 나온다는 사실을 증명했을 뿐이다.

올 시즌 외국인 선수 드래프트가 지난 시즌에 비해 실력이 낮다는 점에서 기업은행은 외국인 선수 의존도를 낮추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외국인 몰빵 배구가 아닌 조화를 이룬 팀으로 만들겠다는 포부였다. 상대적으로 공격력이 약하다고 평가되었던 라셈을 선택한 것 역시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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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팀이 연패에 빠지는 것은 보기 좋지 않다. 실력차가 너무 나면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으니 말이다. 1세트 초반은 라셈과 엘리자벳의 대결 구도였다. 라셈이 공격 물꼬를 트니 김주향의 공격에도 탄력이 붙었다. 다양한 공격 라인이 존재해야 하고, 이를 통해 상대를 압박하지 않으면 경기를 이길 수 없다. 페퍼저축이 엘리자벳을 중심으로 하혜진, 박경현이 공격을 성공하며 대등한 경기를 이끌었다.

기업은행은 부상으로 빠졌었던 김희진을 라셈 대신 아포짓 자리에 올리며 국내 선수들 간의 조합에 집중하는 모습이었다. 외국인 선수가 있을 때와 한국인 선수만 존재할 때의 집중력은 달라지기 때문이다. 이전 경기에서도 라셈을 제외하고 조직력에 보다 집중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기업은행의 이 방법이 통할 수 있었던 이유는 단 하나다. 페퍼저축의 경험치가 낮기 때문이다. 김수지의 이동공격이나 김희진의 공격을 막지 못할 정도로 대단하지 않다. 충분히 대응이 가능한 수준이지만, 페퍼저축으로서는 이들의 다양한 공격을 막기에는 경험이 너무 없다. 패기로 상대를 압도할 수는 있지만, 노련하게 승부하면 경기에 밀리는 성향을 자주 보여주고 있는 것이 페퍼저축이다.

기업은행이 라셈을 빼고 김희진 카드를 일찍 꺼내 든 것은 그런 노련함을 무기로 상대를 제압하겠다는 의지였다. 부상에서 돌아온 김희진이 좋은 활약을 보이며 1세트를 25-21로 잡은 기업은행이지만 2세트는 그리 녹록하지 못했다. 페퍼저축 역시 조금씩 경험치를 쌓고 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여전히 변칙 공격에 취약한 모습을 보이기는 하지만, 상대의 공격을 막는 데 그리 큰 어려움을 보이지는 않았다.

16일 광주 염주체육관(페퍼스타디움)에서 열린 프로배구 V리그 여자부 페퍼저축은행 AI 페퍼스와 IBK기업은행 알토스 경기. 페퍼저축은행 엘리자벳이 블로킹을 뚫는 강타를 날리고 있다. (광주=연합뉴스)

2세트 초반 김주향의 좋은 공격들이 페퍼저축을 압도했고, 15점에도 김하경의 블로킹까지 나오며 먼저 올라서기는 했지만 페퍼저축도 1세트와는 달랐다. 20점까지 페퍼저축을 공략하며 손쉽게 가는 듯했지만 엘리자벳의 공격을 전혀 막지 못하는 상황에서 24-24 듀스까지 경기는 이어졌다.

듀스 상황에서 다시 페퍼저축을 이끈 것은 엘리자벳의 오픈 공격이었다. 25-25로 기업은행을 잡은 페퍼저축은 3세트는 보다 편안하게 경기를 했다. 3세트는 엘리자벳만이 아니라 페퍼저축의 선수들이 다양한 공격을 펼치며 기업은행을 궁지로 내몰았다.

최가은, 이한비의 공격이 거셌다. 하혜진까지 공격에 가담하며 기업은행을 압도한 페퍼저축은 3세트를 25-19로 제압하며 세트 스코어 2-1로 앞서 나갔다. 분위기상 페퍼저축이 시즌 2승을 달성할 수 있는 분위기였다. 국내 선수만으로 대응하는 조직력에도 한계가 오며 범실이 늘어나는 기업은행으로서는 분위기에도 지는 느낌이었기 때문이다.

4세트 라셈과 김희진이 함께 나서며 기업은행은 분위기 반전이 가능했다. 공격의 한계 속에서 기업은행의 선택지는 그리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린 선수들과 경험이 적은 선수들이 전부인 페퍼저축은 다시 승리할 수 있는 상황이 오자 범실이 잦아지기 시작했다.

16일 광주 염주체육관(페퍼스타디움)에서 열린 프로배구 V리그 여자부 페퍼저축은행 AI 페퍼스와 IBK기업은행 알토스 경기. 페퍼저축은행 선수들이 득점한 뒤 환호하고 있다. (광주=연합뉴스)

이미 한 차례 승리 경험이 있었던 페퍼저축은 첫승 상대였던 기업은행과 대결에서 다시 승기를 잡자 욕심이 커졌다. 이는 경기력에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평정심을 유지하며 경기를 이끌어야 하는데 그 역할을 엘리자벳 홀로 해줄 수밖에 없는 팀 사정이 문제다. 하혜진이 언니로서 이끌어주고는 했지만, 그 역시 한계가 명확하다. 가장 어린 주장인 이한비가 그 역할을 하기에는 분명한 한계가 있다.

이런 상황에서 선수들을 다독이고 핀셋으로 문제를 지적하고 풀어내려 노력하는 것은 감독의 몫이었다. 작전 시간을 이용해 선수들의 문제를 바로잡고 방향성을 이야기해도 몸이 움직이지 않는 선수들의 문제는 한순간 고쳐질 수 없다. 그만큼 경험치가 낮은 선수들은 위기상황에서 해결 능력이 떨어진다는 의미다.

이와 달리 기업은행은 국가대표 3인방을 앞세워 노련한 경기를 했다. 여기에 라셈이 엘리자벳의 공격 블로킹까지 잡아내며 분위기를 이끌었다는 점에서 페퍼저축과 대조적일 수밖에 없었다. 위기 상황에 어떻게 해야 하는지 너무 잘 아는 베테랑들이 포진한 팀과 정반대 팀의 경기는 경험에서 차이를 만들어냈다.

페퍼저축이 2, 3세트를 잡으며 분위기를 올렸지만, 다시 2승의 가능성이 보이자 부담이 오히려 선수들을 무너트리는 이유가 되었다. 몸이 무겁고 생각이 많아진 선수들이 실수들을 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 점에서 페퍼저축의 4, 5세트는 너무 아쉬웠다. 4세트를 내줄 수는 있지만 5세트는 충분히 잡을 수 있는 경기였다.

5세트 자멸하듯 범실이 쏟아지며 기업은행이 큰 어려움 없이 경기를 가져갈 수 있게 했다는 것은 아쉽다. 엘리자벳의 경우 매 세트 팀을 이끌어야 했다는 점에서 5세트에서 범실이 나오는 것은 당연했다. 체력적인 문제가 겹치며 공격 범실이 나왔으니 말이다.

결과적으로 기업은행은 시즌 시작 후 8경기 만에 첫 승을 올렸다. 우여곡절 끝에 승리했지만 풀어야 할 과제가 산더미다. 페퍼저축처럼 경험치가 적은 흥국생명과 승부가 비슷하게 이어질 수는 있지만 다른 팀들과 경기에서는 분명한 실력차를 보일 수밖에 없어 보인다.

16일 광주 염주체육관(페퍼스타디움)에서 열린 프로배구 V리그 여자부 페퍼저축은행 AI 페퍼스와 IBK기업은행 알토스 경기. IBK기업은행 선수들이 풀세트 접전 끝에 세트스코어 3-2로 승리한 뒤 기뻐하고 있다. (광주=연합뉴스)

라셈을 능가할 공격력을 가진 선수도 없는 상황에서 기업은행이 갈 길은 여전히 멀어 보인다. 김희진 선수가 고군분투를 하지만, 그 힘으로 다른 팀을 상대하기는 어렵다. 주전 세터인 조송화는 경기에서 완전히 배제되었고, 이런 상황에서 과연 기업은행이 정상적인 경기력을 유지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그나마 김주향의 공격이 살아나고 있다는 점은 고무적이다.

페퍼저축은 부담감에서 벗어나야만 한다. 김형실 감독이 첫승을 올리고 마치 우승이라도 한 듯 즐거워한다며 우려를 표했었다. 이는 선수들이 목표가 흐릿해지며 무너질 수도 있다는 우려였다.

경험은 한순간에 만들어질 수 없다. 그런 경험치의 차이로 지는 경기는 어쩔 수 없다. 당연하게도 선수들 스스로 자신들이 왜 패할 수밖에 없었는지 깨달아야 한다. 승리에 대한 또 다른 조바심이 이번 경기를 망쳤다. 홈에서 첫승을 거둘 수도 있었지만 부담이 지배하며 4, 5세트를 엉망으로 만들고 자멸했다.

페퍼저축이 승리를 노릴 수 있는 팀은 현실적으로 그리 많지 않다. 현대건설이 곤욕을 치른 후 바로 대비해 상대를 압박하고 가볍게 승리를 가져가듯, 강팀들은 페퍼저축을 어떻게 공략할지 이미 전략을 세웠다. 이를 수행할 선수들도 강하다.

페퍼저축은 모든 것을 잊고 새롭게 시작해야 한다. 승리가 없다 생각하고 다시 도전하는 마음으로 매 세트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 주눅 들 필요도 없지만, 승리에 대한 절박함보다 조바심으로 경기를 망치는 일을 다시 해서는 안 되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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