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스=박정환] 보고도 믿기지가 않았다. 영화 ‘007 노 타임 투 다이’에서 제임스 본드가 일본 풍습인 ‘도게자(土下座)’를 행하기에 말이다. 도게자는 바닥에 무릎을 꿇고, 이마가 땅에 닿도록 엎드려 절하는 일본 풍습을 지칭한다.

기존 제임스 본드 역할을 맡았던 숀 코너리나 로저 무어 등은 키 180 이상에, 헤어 컬러는 금발이 아니었다. 하지만 다니엘 크레이그는 달랐다. 키는 180 미만이었고, 금발이었다. 제임스 본드 캐릭터가 확 달라지는 바람에, 기존의 007 시리즈를 사랑하던 팬의 반발은 거셀 수밖에 없었다.

영화 <007 노 타임 투 다이> 스틸 이미지 Ⓒ유니버설 픽쳐스

다니엘 크레이그가 팬들의 반발을 누그러뜨리고, 최첨단 장비에 의존하던 나이브한 007에 염증을 느껴온 대중의 관심을 사로잡은 시발점은 ‘007 카지노 로얄’에서였다. 엉성하지 않은, 날 것 그대로의 격투와 액션을 시리즈에 이식함으로써 007의 매력을 환기하게 만들어준 배우가 다니엘 크레이그였다.

제임스 본드의 마초성은 ‘007 카지노 로얄’에서 대표적으로 나타난다. 제임스 본드가 악당인 르 쉬프에게 고문받는 방법은 ‘더치 스크래칭’. 고문을 당하면서도 악당에게 무너지지 않고 농담을 즐기던 이가 다니엘 크레이그가 연기한 제임스 본드였다.

그런데 ‘007 노 타임 투 다이’에서 제임스 본드는 사핀(라미 말렉 분)에게 일반적인 항복 의사도 아니고 도게자를 하고 만다. 일본계 미국인 감독 캐리 후쿠나가는 다니엘 크레이그가 시리즈 초창기부터 구축해온 제임스 본드의 타협하지 않는 마초성을, 도게자로 단숨에 거세시켜 버렸다.

사핀이 구축한 본거지가 쿠릴 열도 안에 있다는 영화적 설정도 제임스 본드의 도게자와 연관해 고려할 필요가 있다. 쿠릴 열도인 이투루프섬과 쿠나시르섬, 시코탄섬 및 하보마이 군도는 일본의 제2차 세계대전 패배 후 러시아가 실효 지배하고 있다.

영화 <007 노 타임 투 다이> 스틸 이미지 Ⓒ유니버설 픽쳐스

영화 속 악당 사핀은 기지 안에서 일본풍 정원을 꾸미고, 일본식 의상을 입고 일본인처럼 무릎을 꿇고 제임스 본드를 맞이한다. 서양인인 사핀이 왜 일본 풍습에 도취했으며, 제임스 본드는 왜 일본 풍습인 도게자를 할까. 이는 사핀의 기지가 러시아와 일본의 영토 분쟁 지역인 쿠릴 열도 안에 설치되어 있음에 주목해야 한다.

쿠릴 영토의 영유권은 일본이 아닌 러시아가 갖고 있다. 때문에 제임스 본드의 도게자 및 사핀의 일본식 풍습 답습, 기지가 구축된 위치가 쿠릴 열도 안이라는 영화적 설정은 문제적이다. 러시아가 영유권을 갖는 분쟁 지역에서 제임스 본드와 사핀이 일본 풍습에 경도돼 진행되는 서사는 해당 분쟁 지역이 일본의 관할 아래 있다고 착각하게 만들 여지가 충분하다. 만일 감독이 일본계 미국인이 아니었다면 과연 이런 설정이 가능했을까를 묻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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