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스=이정희] 생각해 보면 '만화'에 대한 역사가 깊다. 나는 소위 <소년중앙> <어깨동무> 세대이다. 매달 나오는 잡지를 첫 장부터 마지막 장까지 빠짐없이 훑어보았다. 곰팡이에 대해 공포를 느끼게 된 것도 잡지에 부록처럼 끼워진 과학 SF만화를 통해서였고, 바벨탑을 알게 된 것도 '바벨'이란 만화를 통해서였다. 어린이 종합 잡지를 표방했기에 다양한 분야의 기사들이 많았지만 그래도 여전히 기억 속에 남은 건 만화들이다.

이모의 문방구점에서 팔던 '클로버 문고'의 6면 책장을 빼곡하게 채우던 책들의 열혈 독자는 나였고, 그 혼란의 대학시절에도 도서관 6층 정간실의 고우영 만화 섭렵을 놓치지 않았다. 그런데 소싯적 만화방까지 들락거리던 취미였지만 아이를 키우며 '짱구'를 보는 걸로 아이와 실랑이를 벌이는 어른의 입장이 되었다. 그런데 취향이 어디 가랴. <코난>의 열렬한 광팬은 '엄마'였으며, 징하게 길다 하면서도 <원피스> 몇 시즌을 아이들과 함께 정주행했다.

<귀멸의 칼날>에 빠져들다

영화 <극장판 귀멸의 칼날: 무한열차편> 포스터

아이들은 크면서 만화 볼 시간이 없어졌다. 나 역시 '먹고사니즘'에 바빠 내가 만화를 좋아하던 사람이란 걸 잊고 지냈다. 그러다 지난 연초 집에 와서 연휴를 보내던 큰아이가 자신이 요즘 즐겨보는 만화라며 <귀멸의 칼날>을 보기 시작했다. 아들과 함께 앉아 들여다보기 시작했는데 웬걸, 내가 점점 더 빠져들었다. 아들은 극장판까지 섭렵했다. 코로나 팬데믹 속에서도 당당하게 박스오피스 1위를 차지한 저력은 아마도 아들과 같은 젊은이들의 열렬한 성원에 힘입은 바가 크지 않을까 싶다.

아들과 함께 본 에피소드는 탄지로가 번화가 거리에서 이 시리즈의 최종 악의 보스 무잔과 마주하는 장면이다. 후에 귀멸대 본부에서 혈귀로 변한 동생을 죽이지 않고 동행한다는 이유로 재판에 회부된 탄지로, 그와 그의 동생이 목숨을 건지게 된 이유 중에는 바로 그만이 무잔을 마주했다는 '사건'도 있었다.

이야기 구조는 단순하다면 단순하다. 혈귀와 그 혈귀를 없애려는 귀살대와의 전쟁, 거기에 배경이 일본 사회의 격동기 다이쇼 시대이다. 중세와 근대의 분기점이 된 시대. 산골에서 숯장수를 하던 탄지로는 가족들이 혈귀에게 몰살당하고 유일하게 살아남은 여동생마저 혈귀가 되자, 여동생을 구하기 위해 혈귀를 처단하는 '귀살대'에 자원한다.

일본 애니메이션 시리즈 <귀멸의 칼날> (사진=넷플릭스)

숯을 팔러 동네에 내려가서 궂은일을 처리하던 소년, 아버지가 없는 집안의 맏아들이자 가장이었던 소년은 그 마음 그대로 귀살대의 길을 간다. 혈귀가 된 동생을 짊어지고 싸움에 나서듯이, 약한 이들을 못살게 구는 악에 대한 정의감으로 혈귀 사냥꾼으로 성장해가는 이야기이다. 하지만 산골에서 숯을 팔던 소년에게 혈귀 사냥꾼의 길은 멀고도 험하다. 동생을 구한다는 마음 하나로 소년은 늘 자신의 한계와 마주한다. 그때마다 소년은 늘, 맏아들이었지만 가족을 구하지 못한 자신을 돌아보며 채찍질한다. 험난한 상황에서 자신을 다그치며 견뎌내는 소년의 모습이 묘하게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소년의 성장 스토리는 그와 맞물려 귀살대 요원들과 혈귀들의 스토리와 함께 풍성하게 서사를 확장시켜 나간다. 온몸에 북을 둥둥 울리던 혈귀는 알고 보니 글을 쓰고 싶었지만 문체를 조롱당하던 문사였다. 또 혈귀 가족들을 이끌던 혈귀 소년은 자신의 부모님을 살해한 원죄를 지니고 있었다. 이런 식으로 작품은 인간사의 욕망과 절망을 악의 서사로 변주한다.

모처럼 <귀멸의 칼날>을 통해 잊었던 취향을 복기하고 나니, 넷플릭스에 포진한 다양한 애니메이션이 내게 손을 흔드는 것 같다. 혈귀와 같은 이족의 악당을 상대로 한 애니메이션은 무궁무진했다. 다음으로 시선이 간 건 작가 이름부터 아사기라 카프가의 <문호 스트레이독스>이다.

내 애니 취향은?

일본 애니메이션 시리즈 <문호 스트레이독스> (사진=넷플릭스)

<귀멸의 칼날>에 흥미를 느끼게 된 이유 중 하나는 아사다 지로의 <칼에 지다> 등 다이쇼 배경의 소설들을 흥미롭게 읽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가상의 공간 요코하마시를 배경으로 다자이 오사무,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등 실제 일본 문호들의 이름을 빌린 주인공들이 등장하여 보통 사람이 갖지 못한 능력으로 혈귀와 맞먹는 힘을 가진 악의 세력에 대항하여 싸움을 벌인다는 '탐정사' 사건을 다룬 애니메이션 <문호 스트레이독스> 역시 내 취향에 맞았다. 드라마 <손 the guest>에 열광했는데, 애니메이션 속 상상력은 무궁무진했다. 드라마에서는 펼쳐내기 힘든 상상의 세계 속 선악의 대결이 흥미진진하다.

<귀멸의 칼날>과 <문호 스트레이독스>를 경유하며 취향을 찾아가게 되었다. 그래서 만나게 된 다음 작품이 무신 아토가 죽은 혼령을 자신의 무기로 삼아 세상을 혼란에 빠뜨리는 적과 싸우는 <노라가미>이다. 세 작품에는 일관되게 '악과 싸우는 영웅적인 주인공'이 등장한다. 하지만 그 악은 혈귀라거나 이능의 능력자거나 혹은 악신처럼, 보통 세상과는 다른 세상의 악들이다. 배경은 평범한 세상이지만, 그 세상에서 주인공은 그 평범한 세상을 위협하는 악의 세력을 향해 칼을 빼어 든다.

일본 애니메이션 시리즈 <나츠메 우인장> (사진=넷플릭스)

<괴물 사변>을 거쳐 요즘은 <나츠메 우인장>을 흥미롭게 보는 중이다. 역시나 이종의 악의 세력에 맞서 성장하는 소년들의 이야기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또한 <나츠메 우인장>에 이르러 불우한 환경에서도 꿋꿋하게 자신의 능력을 통해 자신을 찾아가는 성장 서사에 내가 흥미를 느낀다는 걸 새삼 확인하게 된다. 거기에 더불어 일본 애니메이션 특유의 성적인 묘사가 덜하고 순정 만화풍의 그림체에 친숙함을 느낀다는 점도 알게 되었다.

뒤늦게 빠져들게 된 애니메이션, 물론 그렇게 된 지점에는 드라마가 예전만큼 재미있지 않다는 요인도 빼놓을 수 없다. 대신 20여 분 정도의 부담 없는 러닝타임에 인간미를 놓치지 않으려는 주인공들의 소박한 성장 서사가 좋다. <귀멸의 칼날>을 소개해준 아들에게 외려 <나츠메 우인장>을 보라 권유하는 경지에 이르렀으니 말이다. 하지만 아들은 <귀멸의 칼날>을 넘어 <진격의 거인>을 경유하여 <하이큐>를 주행 중이다. 같은 애니메이션 덕후이지만 길이 다른 처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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