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스=이정희] 배우 '줄리 델피'라 하면 여전히 비포 시리즈(비포 선라이즈(1995), 비포 선셋(2004), 비포 미드나잇(2013))의 청순한 금발머리의 프랑스 여배우를 떠올리지 않을까 싶다. 하지만 그녀가 에단 호크와의 세 번째 작품 <비포 미드나잇>에서 감독, 에단 호크와 함께 각본 작업에 참여했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줄리 델피는 2007년 첫 연출작 <뉴욕에서 온 남자, 파리에서 온 여자>로 유럽 영화상, 뮌헨 국제 영화제 등에 노미네이트 되며 실력을 인정받은 이래 9편의 작품 연출을 맡았다. <스카이랩>으로는 산세바스티안 국제 영화제 심사위원 특별상을 수상했다. 연출만이 아니다. <비포 선셋> <비포 미드나잇> 이래 <카운테스> <2 데이즈 인 뉴욕> <스카이랩> 등 다수 작품에서 각본을 직접 쓰기도 하였고 제작에 참여는 건 물론 음악, 편집에 이르기까지 다재다능한 능력을 발휘해 온 여성 영화인이다.

넷플릭스에서 새로이 선보인 미니 시리즈 <지금부터 시작일까>에서도 줄리 델피는 주연 쥐스틴 역과 함께 '크리에이터'로서 참여한다. 줄리 델피가 쓴, 인생 후반전을 맞이한 여성들의 이야기. 비포 시리즈를 기억하는 이들에게는 낯설지 모르지만 어느덧 그녀는 중년의 '아줌마'가 되었다.

인생 후반전, 삶의 무게

넷플릭스 드라마 <지금부터 시작일까>

중년의 아줌마 '쥐스틴'이 된 줄리 델피가 사는 곳은 LA의 한적한 주택가이다. 그녀에게는 '어디선가 무슨 일이 생기면' 달려와 주는 친구들 엘라, 앤, 야스민이 있다. 여유로운 중산층의 삶, 하지만 들여다보면 저마다 심상찮은 삶의 무게에 짓눌리고 있다.

줄리 델피가 크리에이터로 참여한 작품답게 <지금부터 시작일까>는 프랑스 영화적 페이소스로 시작된다. ‘웃어야 하나’ 싶은 어정쩡한 삶의 아이러니 상황이 극 초반에 펼쳐진다. 아마도 극중 인물 모두를 우스꽝스럽게 만들어 버리는 프롤로그를 지나면 등장인물 각자의 사연이 조금씩 풀어진다.

줄리 델피가 분한 쥐스틴은 프랑스인이다. 하지만 프랑스를 떠나 미국의 레스토랑에서 셰프로 일한다. 함께 프랑스를 떠나온 남편은 건축가이지만 아직 미국에서 자신의 입지를 찾지 못했다. 자신이 아내보다 능력 있다고 생각하는 남편은 그로 인해 매사에 짜증을 퍼붓고, 아내는 그런 남편을 연민으로 대하지만 점점 지쳐간다. 셰프로서 일을 사랑하지만, 아들 학교에서 보낸 메일 확인조차 힘들 정도로 일에 쫓긴다. 거기에 자신만의 레시피북을 쓰느라 마음이 늘 분주하다.

넷플릭스 드라마 <지금부터 시작일까>

그녀의 친구 엘라(알렉시아 렌도 분)는 아이 셋을 키우는 싱글맘이다. 유대계 혈통, 하지만 그녀의 아이들은 다 인종이 다르다. 흑인, 백인, 동양인의 피가 흐른다. 전남편이 셋이나 되지만, 그녀는 현재 남편도 없고 심지어 아이들 양육비를 보내주는 전남편이 한 명밖에 없어 늘 생활고에 시달린다. 자연사 박물관 공룡부터 시작해 돈이 되는 일이라면 그 무엇이든 마다하지 않지만 스스로 주의력 결핍증이라는 그녀가 벌이는 일은 어쩐지 '허당끼'가 가득하다.

열 살 어린 연하의 남편, 부인복 사업에 아이 돌보미까지 두고 살아가는 앤. 청춘스타로서 이름이 익숙한 엘리자베스 슈가 분한 앤은 네 명의 친구 중 상대적으로 여유로워 보인다. 사업도 승승장구해 걱정할 것이 없어 보이는데, 그녀는 대마초를 손에서 놓지 않는다. 사업이 잘되는 것 같아 확장하고자 변호사와 의논하려 했더니 다 장부 조작이었다. 그녀는 여전히 부유한 어머니가 주는 돈을 받아 사는 '상속녀' 처지에서 한 발도 나아지지 않은 상태였다. 거기다 연하의 남편은 갑자기 시험 별거를 하자고 한다.

야스민은 그 이름처럼 아랍계의 여성으로 IT 전문가인 아일랜드인 남편과 함께 아들 하나를 키우는 여성이다. 남편은 물론 친구들 그 누구에게도 이야기하지 않았지만 그녀는 한때 국가 비밀조직에 몸담았을 만큼 능력 있는 커리어우먼이었다. 하지만 결혼해 아이를 낳고 '경력 단절'이 점점 야스민을 불안하게 한다. 하다못해 다시 취업을 하려 해도 그녀의 나이와 커리어가 외려 그녀의 새 출발을 막는다.

프랑스인, 아랍인, 유대인, 미국인 등 다양한 인종의 등장인물이지만 아내로, 엄마로 살아가며 저마다의 위기를 겪는 그녀들의 모습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공감을 자아낸다. 하늘의 새를 쥐스틴이 까마귀라고 하면 독수리라고 박박 우기는 남편에, 셰프로서 인지도를 올리기 위해 인스타 조회수에 연연하는 모습은 상황만 다를 뿐, 우리라고 차이가 있을까 싶다.

넷플릭스 드라마 <지금부터 시작일까>

제목처럼 그녀들은 저마다 이제는 인생 후반전에 들어섰음을 실감하는 상황을 맞이한다. 부부 사이는 예전 같지 않고, 아이들은 커가고, 자신들은 점점 더 초라해지는 처지에 놓인다. 그런 가운데, 한때 비밀조직에 일하던 야스민에게 뜻밖의 기회가 찾아오고, 야스민은 두려워하면서도 남편과 아이 몰래 비밀작전을 수행하느라 고군분투한다. 자신의 옷방 긴 장화 속에 조직이 준 핸드폰을 숨겨놓고, 수영복을 가지러 간다며 단 몇십 분의 시간을 이용해서 이동하는 그녀의 모습은 그 어느 때보다도 비장하다.

그렇게 가족들을 속이며 전전긍긍하던 일이 결국 남편의 뒷조사를 하는 것이었지만 그것마저도 기꺼이 감수하던 야스민. 정작 남편에 대한 의심이 사라지며 더는 일을 할 이유가 없어졌음을 통보받았을 때, 야스민을 그 어느 때보다도 낙심한 표정이다. 행복한 가정 속 아내의 자리라 했지만, 레몬청만 만들며 살기에 그녀의 열망이 너무나 컸음을 비밀 요원 해프닝은 보여준다.

시즌 1의 마지막, 그녀들은 이제 정말 '지금부터 시작'인 상황을 스스로 만들어간다. 직장맘으로 남편 앞에서 죄인처럼 살던 쥐스틴도, 엄마를 싫어하면서도 엄마의 돈에서 자유로울 수 없던 앤, 그리고 어떻게든 아이들과 돈 걱정 없이 살려 발버둥치던 엘라도 새로운 도전을 한다. 인생 후반전이라 자조하던 그녀들은 이제 삶의 새로운 길 위에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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