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미디어스=고브릭의 실눈뜨기] 믿고 싶지 않은 소식이 중국에서 연이어 들린다. 영화 <소림축구>, 드라마 <황제의 딸>로 유명한 배우 조미가 프랑스로 도피했다는 소문과 함께 인물 정보가 중국의 포털에서 사라졌다. 중국의 부패상을 다뤘다는 이유로 주성치의 영화를 비롯한 여러 작품의 허가를 취소할 것이란 전망도 들린다.

하지만 중국의 이런 풍경이 낯설지만은 않다. 멀리 문화대혁명까지 갈 것도 없이 2014년 홍콩의 우산혁명에 찬성했단 이유로 블랙리스트에 올라 연예계 활동을 제한받았던 주윤발, 유덕화의 사례가 있다. 이렇게 어수선한 와중에 아이러니하게도 2014년 당시 블랙리스트에 올랐던 양조위가 빌런으로 출연하고, 중국계 인물들이 활약하는 할리우드 영화이자 마블의 신작 <샹치와 텐링즈의 전설>(이하 <샹치>)이 개봉했다.

텐링즈는 사실상 MCU의 개국공신(?)이다. <아이언맨 1>에서 토니 스타크를 납치한 조직이 바로 텐링즈였기 때문이다. <아이언맨 3>에서는 텐링즈의 리더 ‘만다린(벤 킹슬리)’가 등장하는 줄 알았으나 가짜로 밝혀지며 궁금증을 더하기도 했다. 결국 아이언맨이 퇴장한 페이즈4가 되어서야 드디어 텐링즈의 수장 ‘웬우(양조위)’가 전면에 등장한다. 웬우는 열 개의 고리(Ten Rings)가 가진 신비한 힘으로 수천년 간 전쟁과 테러, 암살 등으로 인류를 조정해온 인물이다.

주인공인 샹치(시무 리우)는 웬우의 아들로 킬러로 키워졌지만, 비정하고 잔혹한 아버지에게서 도망쳐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살고 있다. 대학교를 졸업하고 주차요원으로 평범하게 일하던 어느 날 샹치는 텐링즈에게 습격을 받는다. 어머니에게 물려받은 펜던트가 어떤 사건을 해결하는 열쇠이기 때문이다. 텐링즈와 아버지인 웬우의 추격에서 벗어나 펜던트를 지키기 위해 여동생 샤링(장멍얼)이 있는 마카오로 날아간다.

샹치와 텐 링즈의 전설 스틸 이미지

새롭지도, 진보적이지도 않은 동양인 히어로 무비

<샹치>는 동양인 히어로가 주인공인 첫 번째 영화다. 마틴 루서 킹과 맬컴 X가 대립했던 흑인민권 운동의 역사를 강력한 모티브로 삼고 아프리카의 전통문화를 현대적으로 표현한 <블랙 펜서>. 가스라이팅 때문에 재능을 드러낼 수 없었던 페미니즘 이슈를 전면에 내세운 <캡틴 마블>처럼 소수자를 대표하는 캐릭터로서 백인/남성 위주라는 한계를 확장하는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샹치는 영어에 능숙하다. 기상할 때도 중국음악이 아니라 미국의 팝음악을 들으며 하루를 시작한다. 청명절에 맞춰 성묘를 하러 가자고 말하는 앞선 세대와 달리 멜팅팟에 완벽하게 녹아든 이민 3세대의 전형을 보인다. 영화 중반부터는 배경이 ‘탈로’라는 가상세계로 이동하며 동양인이 백인사회에서 겪는 문제도 드러나지 않는다. 캐릭터만 소수자일 뿐 영화에서 진행되는 갈등은 차별과 전혀 무관하다는 점에서 <블랙 펜서>, <캡틴 마블>과는 다른 결을 지니고 있다.

인종을 제외하면 <샹치>는 사실 전형적인 히어로 영화의 영향 아래 있다. <아이언 맨>의 토니 스타크는 아버지처럼 자신을 돌봐준 ‘오베디아’에 음모를 밝혀내고,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의 피터 퀼은 어린 시절 헤어진 친부 ‘에고’를 죽인다. 가모라의 아버지는 ‘타노스’다. 이처럼 (유사)아버지로부터 잘못된 가르침 혹은 악의적인 속임수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신만의 가치관을 각성해 영웅의 자격을 획득하는 히어로는 익숙한 MCU의 테마다.

MCU의 세계관 확장을 위해 소모됐다는 일부의 지적도 일리가 있다. ‘탈로’라는 환상적인 공간과 차원을 넘어온 빌런의 존재가 밝혀지고, 전작의 친숙한 캐릭터들이 등장하며 자연스럽게 MCU 세계관에 편입을 시키지만 샹치가 히어로로 각성하는 계기가 뚜렷하지 않은 탓이다. 테마를 중심으로 살펴본다면 MCU에서도 여러 번 반복된 ‘살부신화’라는 안정적 노선만 좇는 다소 뻔한 작품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샹치와 텐 링즈의 전설 스틸 이미지

홍콩 영화 팬들을 위한 MCU의 무협

다만 ‘텐링즈의 전설’에 방점을 찍는다면 영화는 전혀 다르게 보인다. MCU의 색을 덧입힌 정통무협 영화인 덕분이다. 무협의 사전적 의미는 무술이 뛰어난 협객이지만 ‘무술’와 ‘협의’을 추구하는 삶의 태도이기도 하다. 무술은 육체적 강인함을 추구하며 영화에서는 액션으로 표현된다. <샹치>는 홍콩의 무협/액션 명작들이 쌓아온 레퍼런스를 현대적이고 감성적으로 풀어냈다.

<와호장룡>의 성취가 느껴지는 웬우와 장리의 대결을 보자. 웬우는 파괴적인 힘으로 상대를 몰아부치고, 장리는 부드러운 반격을 통해 그 힘을 되받아친다. 파괴하려는 자와 지키려는 자의 대립은 주먹과 주먹, 발과 발이 엉킬수록 낭만적인 춤을 추듯 바뀌고 음과 양의 대립에서 차차 음양의 조화로 바뀌어 간다. 이 결투를 통해 부부로 이어지는 둘의 모습이 구구절절한 설명 없이도 관객을 설득시킨다.

버스와 마카오 전투 역시 근거와 감정을 덧대는 훌륭한 액션이다. 펜던트를 노리고 갑자기 나타난 텐링즈에 맞서 버스라는 운송수단과 샌프란시스코의 지형지물을 이용한 전투에서는 샹치의 전투 센스를 가늠할 수 있다. 고층건물 창밖에 설치된 나무구조물에서 공중 곡예 하듯 이어지는 마카오 전투는 아버지에게서 벗어날 수 없고, 여동생에게도 마음의 빚이 있는 샹치의 위태로운 상황과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강호의 도리를 뜻하는 협은 어머니의 가르침을 통해 드러난다. 웬우는 장리와의 만남을 통해 텐링즈를 해산하며 피로 물든 악의 세계와 결별하려 하지만 ‘사람이 있는 곳이 강호’라는 말처럼 그 바람은 이뤄지지 않는다. 결국 다시 텐링즈를 착용하고 피바람을 일으키며 ‘피는 피로 갚아야 한다’는 무시무시한 신념을 아들 샹치에게 주입하려 한다. 그러나 샹치는 단호히 아버지의 가르침을 거부하고 맞서 싸우며 협객으로 거듭나 텐링즈의 새로운 주인이 된다.

<샹치>는 이 부분에서 호불호가 갈릴 수밖에 없다. 새로운 영웅의 탄생을 기대한 MCU 팬들의 기대치를 충족시키기에는 부족하다. 샹치가 극복해야 할 문제도 소수자에 대한 차별이 아니고, 웬우의 막강한 존재감 탓에 활약상이 두드러지지 않는다. 그러나 홍콩의 무협/액션 영화를 보고 자란 세대에게는 막강한 자본으로 되살아난 그 시절에 대한 향수를 즐기는 것만으로도 감동적인 시간이다.

샹치와 텐 링즈의 전설 스틸 이미지

만약에 말야, 새로운 MCU 사가의 테마

동양인과 무협 영화를 벗어나 페이즈 4를 여는 첫 작품으로 <샹치>는 어떨까. 웬우의 죽음을 넘어선 ‘사랑’ 때문에 벌어지는 사건이라는 측면에서 그동안 MCU의 약점으로 지적받았던 정서적 측면으로의 확장을 시도했다는 점에서 성공적으로 평가할 수 있다. 명배우들이 총출동한 MCU지만 양조위만큼 짧은 시간 동안 강력하고 입체적인 존재감을 보인 배우도 드물다. 이는 비정한 아버지, 로맨틱한 연인, 잔혹한 킬러를 자유롭게 넘나든 양조위 덕이다.

새로운 페이즈를 꿰뚫는 테마도 과감하게 상상해볼 수 있다. 인피니티 스톤을 둘러싼 연대기였던 ‘인피니티 사가’의 메인 빌런 타노스는 자신을 ‘필연적인 존재’라고 말했다. 맬서스 트랩에 기반해 전 우주 생명체 절반의 목숨을 없애는 게 자신의 역할이라고. 어벤져스는 거부할 수 없는 궁극의 마침표와 싸워 전 우주의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이때 타노스를 무찌르기 위해 선택한 수단은 시간 이동이었고, 시간 축이 엉키며 다중세계의 사건이 중첩되는 멀티버스가 예고된 상황이다.

<샹치>에서 웬우가 탈로로 쳐들어간 이유는 ‘만약(IF)’에서 출발한다. 죽은 줄 알았던 아내가 만약 탈로에 살아있어서 구출해주길 원한다면? 강력한 힘을 가진 빌런의 물음표로 또 하나의 비극이 시작됐다. 더 두려운 점은 정의로운 히어로라고 해도 물음표 없는 삶을 살기는 어렵다. 스칼렛 위치가 비전이 살아있는 세상을 원한다면? 닥터 스트레인지가 블립 이전의 세계를 상상한다면?

다양한 가치와 믿음, 인식범위와 상식을 넘어선 수많은 물음표에 직면하는 게 새로운 페이즈의 중심 테마라면 ‘당신 없는 세상은 상상할 수 없다’는 보편적 가치에 운을 띄운 <샹치>는 성공적인 페이즈4의 첫 작품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지금, 이 순간도 ‘만약’이라는 가치들이 매일 격렬하게 충돌하고 있는 우리의 세계를 MCU의 하나의 우주라고 생각본다면 더더욱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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