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스=조현옥] 경기도 수원 만석거(萬石渠) 둘레길을 절반쯤 걸으면 오른쪽 옆에 누각이 서 있습니다. 여의루(如意樓)라는 이름의 이 누각을 봄이면 분홍 철쭉꽃이 둘러싸고, 여름에는 진분홍 배롱꽃이 저수지 쪽으로 드는 볕을 가려 줍니다. 예의 바른 배롱나무는 누각의 우아한 모습을 완전히 가리지 않고 한쪽 면만 발을 친 듯 꽃가지를 뻗습니다. 이렇게 살짝 자신의 존재를 나타낸 꽃을 보며 몇 걸음 더 가면 저수지 수문 옆에 진분홍 꽃구름이 파란 하늘 아래 펼쳐집니다.

공원의 조경사가 어떤 마음으로 이곳에 배롱나무를 심었는지 모르나, 이 꽃이 핀 풍경은 맑고 푸른 하늘 아래에서는 화려한 꽃구름이 되고, 흐린 밤하늘 회색 구름 아래서는 따뜻한 꽃구름으로 보입니다.

배롱나무꽃 (사진=조현옥)

배롱나무는 목백일홍이라고도 하는데 7월에서 9월까지 백일 이상 피어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고 합니다. 백일홍을 빨리 발음하며 배롱나무가 되었다고도 합니다. 약초학자 최진규 씨는 옥황상제의 정원인 자미궁(紫微宮)에 심는 꽃이라 자미화(紫薇花)라고도 하며 강희안, 백거이의 사랑을 받았던 꽃이라고 합니다. 간지럼 나무라는 재미있는 이름이 있는데, 이는 나뭇가지를 문지르면 잎이 떤다고 생긴 이름이라고 합니다.

껍질이 벗어지는 탈피를 해서 양반집에서는 심지 않았고, 탈피를 세속의 때를 벗는다고 보고 불당 앞에는 심었다고 합니다. 똑같은 탈피를 어떤 시각으로 보느냐에 따라 성스럽게 여기기도 하고 그렇지 않게도 여기니 관점과 입장의 차이가 나무의 삶에도 영향을 주네요.

3km가 조금 넘는 저수지 둘레길을 걸으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풍경 덕분에 걷는 것이 지루하지 않고 때로는 가벼운 여행을 하는 느낌을 주기도 합니다. 무더운 여름날, 여기에서 땀을 닦으며 활짝 핀 꽃을 보노라면 금세 더위를 잊고 그 정취에 빠집니다. 사진을 찍어 보지만 눈에 들어오는 아름다운 꽃구름을 제대로 담지 못해 안타깝기만 합니다.아름다운 풍경은 마음에 담는다는 말로 위로를 삼습니다.

배롱나무꽃 (사진=조현옥)

배롱나무가 여기 심어진 지는 오래되었지만, 꽃의 아름다움을 제대로 바라보기 시작한 것은 작년부터였던 것 같습니다. 겨울에서 벗어나 날씨가 풀릴 무렵 피어나는 봄꽃도 있고, 무더운 여름 지나 시원한 바람 타고 피는 꽃도 있는데 배롱꽃은 7월에 촛대처럼 꽃가지를 올리기 시작합니다.

30℃를 넘나드는 한여름, 가지 끝에 솟은 꽃봉오리에서 하나씩 붉은 등이 켜집니다. 잔잔한 분홍 주름이 있는 꽃등이 태양을 향해 행진합니다. 그 모습은 마치 희생이고 사명을 다하는 듯 보였습니다.

작년 여름은 뚜렷한 정체가 알려지지 않고 치료제도 백신도 없는 코로나19 때문에 무거운 방역복을 입은 의료진들의 피로가 높아질 때였습니다. 그때 이글거리는 태양 아래 피어있는 이 꽃이 의료진들의 수고와 희생을 닮았다고 생각했습니다. 어느 여름날 붉게 피어난 배롱꽃이 도종환 시인의 마음도 붙잡았나 봅니다.

가장 뜨거울 때 가장 화사한 꽃을 피워 놓고는
가녀린 자태로 소리 없이
물러서 있는 모습을 발견하고
남모르게 배롱나무 좋아하게 되었는데

사랑하면 어디에 가 있어도 함께 있는 게 보인다고 하며 시를 맺는 시인의 마음에 깊이 공감이 됩니다. 그 자리에 늘 피어있는데도 보이지 않다가 꽃이 유난히도 아름답게 보이던 날부터 그 꽃을 사랑하게 된 것인가 봅니다. 사람의 일도 당연히 그렇겠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며칠 전, 근무했던 학교에서 하얀 배롱꽃을 만났습니다. 화려한 진분홍 꽃과 달리 하얀색 배롱꽃 가지가 하늘로 뻗은 모습은 시원하면서도 자유로워 보였습니다.

배롱나무꽃 (사진=조현옥)

학교에서 근무한 지 사 년째 되던 해였습니다. 새로 근무할 학교 행정실에 서류를 내러 가다가, 마침 문으로 나오는 교장 선생님과 마주쳤습니다. 웃으며 한쪽으로 비켜서서 굳이 저를 먼저 들어오라고 하셨습니다. 연배로나 경력으로 한참 어른이신데, 양보하는 모습이 참 인상 깊었습니다.

그 학교에서 근무하는 동안 좋은 수업을 위해 연구하고 협력하는 분위기에서 참 행복했습니다. 여름 방학식 날 떠났던 1박 2일의 연수가 대학시절 M.T.처럼 느껴져 대학 때 좋아했던 노래 ‘별이 진다네’까지 불렀습니다. 그때 그 교장 선생님이 곧 퇴직한다고 해서 학교를 방문했습니다. 몇 년 만에 근무했던 학교를 찾으니 처음 그 학교에 가던 날처럼 마음이 설레었습니다.

그런데 근무할 때는 보지 못했던 배롱꽃이 학교 앞에 하얗게 피어있었습니다. 이 꽃이 활짝 피는 시기가 여름방학 때이고, 꽃이 막 피기 시작할 무렵에는 방학 전 업무로 한창 바쁠 때라 보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저를 반갑게 맞아주시며 손수 만든 꽃 액자를 선물로 주신 교장 선생님을 뵙고 돌아오는 길에 한 번 더 하얀 배롱꽃을 돌아보았습니다. 초등학교 입학해서 교사로 퇴직하기까지 59년간 다녔던 학교를 떠나니 생각이 많다는 교장 선생님. 피부가 하얀 그분의 미소와 학생들 가르치는 일에 보람을 느끼던 동료 교사들의 순수한 마음이 하얀 배롱꽃을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배롱나무꽃 (사진=조현옥)

백일이나 피었다 지는 배롱꽃 그늘 아래에는 추억도 많고 그리워할 일도 많을 듯합니다. 그래서인지 배롱나무의 꽃말은 ‘떠나간 벗을 그리워함’이라고 합니다. 저도 이제 분홍 배롱꽃을 보면 무더위 아래 누군가를 위해 열심히 일하는 고마운 분들을 떠올리고, 하얀 배롱꽃을 보면 교직에서 만났다 헤어진 좋은 동료들을 떠올릴 것 같습니다.

배롱꽃은 성삼문, 강희안도 좋아했으며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배롱나무도 있다 하니, 이 여름이 가기 전에 경주의 ‘서출지’에 핀 배롱꽃을 만나 친구삼아 보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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