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을 사고판다고 치자. 그 집에 대해 가장 잘 아는 사람은 집주인이다. 집을 사려는 사람이 집주인보다 모르는 건 당연하다. 만일 사는 사람이 일반적인 부동산 거래에 그리 밝지 않을 때, 파는 사람이 집의 상태와 가격을 속이면 사는 사람은 꼼짝없이 속아 넘어갈 가능성이 커진다. 이럴 경우 상식적으로 사는 사람이 현명하기를 바라는 것보다는 파는 사람이 공정하기를 바라는 편이 훨씬 더 좋다. 집주인이 그 집의 상태와 적정 가격을 제시하면 공정한 매매가 이뤄진다. 하지만, 그렇지 않으면 불공정한 거래에 따른 부당한 이익이 집주인에게 돌아가게 될 것이다.

▲ 조지프 스티글리츠
이 책의 저자들 가운데 한 사람인 조지프 스티글리츠 교수가 시장의 작동과 왜곡을 설명하기 위해 착안한 ‘정보의 비대칭성’(asymmetries of information)이라는 개념은 이렇게 가장 기초적인 개인과 개인의 거래관계에서도 잘 드러난다. 범위를 더 넓혀 기업과 기업의 관계에도 이 개념은 그대로 들어맞는다. 급등하는 원자재 가격을 견디지 못한 주물업계와 레미콘 업계가 납품 중단이라는 초강수까지 꺼내들며 납품 단가를 현실화해달라고 대기업에 요구했다. 사실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불공정한 거래는 하루 이틀 얘기가 아니다. 그 수많은 갑(甲)과 을(乙)의 관계 속에서 중소 하청업체의 목소리는 언제나처럼 잘 들리지 않았다. 그들의 바람대로 납품단가를 올려주면 대기업의 이익이 줄어 분기별, 또는 연간 매출액 숫자가 작아지고, 그래서 기업 실적에 대한 시장의 불안감이 주식 가격에 반영돼 투자자들이 슬슬 등을 돌릴까봐서? 납품 중단이라는 협박에 굴해선 안 된다고? 공정한 거래에는 분명 신뢰가 필요하다. 새 정부 들어서는 그 자취를 찾아보기도 어려운 이른바 ‘상생(相生)’을 많은 기업들이 한동안 너도나도 부르짖은 이유가 다른 데 있는 게 아니다.

국가와 국가, 특히 선진국과 개발도상국 사이의 공정한 무역이란 과연 어떤 것일까? 저자들은 국가와 국가의 무역이 개발을 위한 긍정적인 추동력일 수 있다는 전제에서 출발하고 있다. 2001년 11월 카타르 도하에서 채택된 각료선언 제2항의 내용은 이렇다.

“국제무역은 경제개발과 빈곤완화에 주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 다자간 무역 체제가 창출하는 증대된 기회와 복지이익으로부터 모든 사람들이 이익을 얻어야 한다는 것을 우리는 인식한다. 세계무역기구 회원국 대부분은 개발도상국이다. 우리는 이 선언에서 채택된 실행 프로그램의 중심에 그들의 욕구를 어떻게 배치할 것인지 그 방법을 모색한다.”

하지만, 이런 겉보기에 진전된 인식이 실질적인 성과로 이어지기는커녕 ‘개발 라운드’가 이름값도 제대로 못하고 있다는 것이 저자들의 진단이다. 저자들은 이 책에서 다양한 실증적 자료를 근거로 선진국과 개발도상국 사이의 ‘이상하기 짝이 없는’ 불공정 무역 관행을 살핀다.

지난 2001년에 선진국이 내놓은 개발원조는 5백50억 달러였는데 비해, 이 기간에 선진국이 자국 농민에게 지원한 보조금은 그 6배에 이르는 3천 백10억 달러였다. 같은 해에 미국의 의류 신발 수입액은 전체의 6.5퍼센트였는데, 이 두 품목의 관세 수입이 전체의 절반에 육박했다. 미국의 자동차 수입금액은 의류․신발 수입액의 10배나 됐지만, 미국 정부는 자동차 수입보다 신발 수입에서 관세를 더 많이 징수했다. 오죽했으면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조차 이렇게 비판했을까. “우리는 개발도상국에게, 그들이 모든 방식을 통해 받는 모든 개발원조보다 3배나 많은 비용을 무역제한을 통해 부과한다.”

한미 자유무역협정 협상이 한창일 때, 비교 사례로 자주 거론됐던 북미자유무역협정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저자들은 이렇게 말한다. “북미자유무역협정은 사실 자유무역협정이 아니었다. 미국은 자국의 농업 보조금을 여전히 유지하고 있었다. 북미자유무역협정은 엄청난 보조금을 받는 미국의 기업농과, 멕시코의 자작농 및 가족농장과 맞붙어 싸우게 했다.” 저자들이 강조하는 것처럼, 자유무역협정을 통한 경제통합의 목표는 협정 당사국 국민들의 생활수준을 끌어올리기 위한 것이지만, 무역자유화 자체가 이런 목표를 담보하는 것은 아니라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자리하고 있다.

부자 나라들의 이런 이해할 수 없는 보호주의 무역정책은 미국이 자국 시장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긴급수입제한조치와 반덤핑 법률을 마음대로 써먹고 있다는 데서도 잘 드러난다. “현행 무역협상에는 근본적으로 긴장이 존재한다. 선진국들은 자국의 사양 산업은 보호하고 성장산업을 위해서는 시장접근을 얻고 싶어 한다. 하지만 그들의 사양 산업이 내리막을 타고 있는 것은 대체로 개발도상국들의 경쟁압력 때문이다. 그러므로 선진국들이 노심초사하며 보호하려는 부문은 개발도상국들의 가장 큰 이익이 걸린 부문과 정확히 일치한다.” 찢어지게 가난한 나라들이 세계무역기구에 가입하는 과정이 얼마나 험난한지를 서술한 대목만 보더라도 선진국의 지나친 욕심에 근거한 ‘상호주의’가 지배하는 무역협상이 아직은 장밋빛 구호에 그치고 있음을 분명하게 알 수 있다.

▲ 고 이경해씨
저자들이 선언적 의미에 머물러 있는 자유무역협정(FTA: Free Trade Agreement)이 아닌 모두에게 공정한 무역(FTA: Fair Trade for All)으로 나아가기 위한 선진국들의 분발과 각성을 촉구하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민감한 농업분야와 지적재산권 분야의 경우 장기적인 관점에서 협상 대상국의 특수성을 존중해가며 신중하게 접근해야 한다는 저자들의 주장은 한-미, 한-EU 자유무역협정을 추진하고 있는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개발도상국은 구속력 없는 지원의무를 구속력 있는 이행의무와 교환했다.”는 평가를 받아야 했던 우루과이라운드의 참담한 결과를 넘어, 이제 국경을 허무는 공정한 무역은 경제적 분석의 원칙이나 경제력, 특수이익에만 좌우돼서는 안 될 것이다. 그래서 ‘사회정의’에 기초한 협정에 희망을 갖는 저자들의 시선은 따뜻하다. 지난 2003년 9월, 멕시코 칸쿤에서 “세계무역기구가 농민을 죽인다.”고 외치며 스스로 목숨을 끊은 고 이경해 씨를 비롯한 전 세계 수많은 농민들과 행동가들의 죽음, 그 외침이 헛되지 않기 위해서는 말이다.

2001년 KBS에 기자로 입사했다. 2004년 8월부터 2006년 12월까지 KBS 매체비평 프로그램 <미디어포커스>를 제작 담당하면서 언론에 관심 갖게 되고, 2006년 11월부터 1년 동안 50회에 걸쳐 미디어오늘에 <김석의 영화읽기>를 연재했다. 베트남전 당시 미군의 민간인 학살을 추적보도한 탐사저널리스트 시모어 허쉬의 저서 <밀라이 학살과 후유증에 관한 보고>를 번역 출간 준비 중이고, 현재 KBS 사회팀 기자로 활동 중이다.

저작권자 © 미디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