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블랙 위도우>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미디어스=고브릭의 실눈뜨기] 의미심장한 오프닝 곡이었다. 팝의 황제 마이클 잭슨의 명반 <Dangerous>을 제치고 빌보드 1위를 차지한, 너바나의 명곡 Smells like teen spirit이 말리아 J라는 젊은 여성 보컬의 목소리로 다시 태어난 것이다. 메탈(Metal)의 전성기를 끝내고 얼터너티브(Alternative) 시대를 열었다는 ‘Smell~‘의 평가처럼, 엔드게임 이후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MCU) 페이즈 4의 포문을 여는 <블랙 위도우>도 새로운 대안을 찾아 떠난다.

영화는 <시빌 워>와 <인피니티 워> 사이의 시간을 다룬다. 소코비치 사태의 여파로 잠정 해체되고 뿔뿔이 흩어지게 된 어벤져스. 캡틴의 편에 서며 반정부 인사가 된 나타샤(스칼렛 요한슨)는 선더볼트 로스 장군의 추적을 뿌리치고 노르웨이로 숨어들지만, 갑자기 나타난 새로운 적 태스크마스터의 강력한 공격을 받는다. 접전 끝에 겨우 태스크마스터의 추적을 뿌리치고 부다페스트로 향하는 나타샤. 킬러 시절 사용하던 은신처에서 동생 옐레나(플로렌스 퓨)와 21년 만에 재회하며 그동안 MCU에서 가끔 언급되던 부다페스트 사건이 드러난다.

부다페스트 사건의 전말은 이렇다. 나타샤는 어벤져스 합류를 위한 마지막 미션으로 부다페스트에서 빌딩을 폭발시켜 자신을 킬러로 키워낸 구소련의 비밀집단 레드룸의 수장 드레이코프를 처치한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그의 어린 딸이 함께 폭발에 휘말리게 한 것에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런데 옐레나는 놀라운 사실을 전한다. 죽은 줄 알았던 드레이코프가 건재하고 레드룸이 화학적 방법을 통해 세뇌한 위도우들이 계속 길러지고 있다는 것. 나타샤는 잘못된 과거를 바로 잡기 위해 옐레나와 함께 레드룸을 박살 내기로 결정한다.

영화 <블랙 위도우> 스틸 이미지

본과 007 사이에서 갈팡질팡

<블랙 위도우>는 자신을 길러낸 악의 조직에 저항하는 킬러라는 설정으로 <본 시리즈>를 떠올리게 한다. 은밀한 조력자를 통해 신분을 위장하고 요원 시절 사용하던 은신처에서 추적의 실마리를 발견하는 등 첩보물의 공식도 따르고 있다. 특히 옐레나와 재회할 때 서로를 의심하며 격투를 펼치는데 주변의 사물과 지형지물을 이용한 생활 액션까지 영락없는 제이슨 본이다. 하지만 감옥에 갇힌 알렉세이(데이빗 하버)를 구하러 가는 장면부터는 감각적인 오프닝처럼 화려한 볼거리로 치장한 90년대 <007시리즈>로 갑자기 노선이 바뀐다.

알렉세이가 갇힌 설원의 감옥에 헬기를 타고 요란하게 진입할 땐 첩보 요원이란 본분을 망각한 듯 보이기도 하고, 여전히 레드룸에서 활동하고 있다는 멜리나(레이첼 바이즈)와 접선할 땐 어떤 의심이나 안전장치도 없다. 플랜B가 없는 허술한 작전에도 불구하고 레드룸에 침입한 이후에도 그런대로 일이 술술 풀리며 나타샤와 옐레나는 결국 미션을 성공시킨다. 하지만 <본 시리즈>와 <007시리즈>에서 갈팡질팡하는 모습은 슈퍼히어로에 다양한 장르를 결합하려던 마블의 시도가 항상 성공할 수는 없다는 한계를 드러낸다.

우선 빌런의 활용도 아쉽다. 자기가 본 것을 그대로 복제하는 재주를 가진 태스크마스터는 그간 어벤져스의 전투에서 돋보이지 못했던 나타샤를 부각할 기회였는데 충분히 살리지 못했다. 본다고 따라 할 수 없는 아이언맨, 토르를 제외하고서라도 캡틴 아메리카, 호크아이, 블랙팬서의 스타일이 잠깐 등장하지만 그것들을 나타샤의 전투력으로 파훼하기보다 파괴할 수 없는 유리 감옥에 가두는 방식으로 저지하는 데 그쳐 액션의 쾌감을 끌어내지 못한다.

영화의 메시지와도 연결되는 메인 빌런 드레이코프의 희미한 존재감과, 가볍게 처리된 몰락과정은 영화가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까지 희석한다. 드레이코프는 자궁을 적출하고 심리적, 화학적 방법을 통해 육체와 정신을 지배해 여성들의 자유의지를 박탈한다. 캐릭터 외형을 비롯해 타인의 감정에 무관심한 사이코패스적인 행동은 미투 운동을 촉발한 하비 와인스타인을 떠올리게 하는데 너무 직설적이라 투박해 보일 정도다.

영화 <블랙 위도우> 스틸 이미지

어쨌든 나타샤 옐레나, 멜리나 그리고 세뇌에서 풀려난 위도우들까지. 시스터후드로 뭉친 여성연대가 그를 처치하지만, 뒷맛은 영 찜찜하다. 공중요새가 추락하고 드레이코프가 죽는 바람에 반인륜적, 비인도적이고 국가 주도하에 이루어진 범죄가 전면에 드러날 기회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공적 시스템을 심판받지 않고 사적 제재에 그친 것도 개인의 노력으로 사회의 부조리를 극복할 수 있다는 잘못된 메시지로 오해되지 않을까 우려스럽다.

이는 <블랙 위도우>를 둘러싼 외적 환경과 직접적으로 연결된다. 이미 결말이 공개된 캐릭터라는 핸디캡을 안고 출발했고 코로나바이러스 때문에 개봉이 연기되기도 했다. 그러나 근본적인 문제는 제작이 늦었다는 것이다. MCU의 대성공에도 불구하고 어벤져스의 유일한 여성 원년멤버의 솔로 무비가 결정되기까지는 너무 오랜 시간이 걸렸다. 사회적 여건 탓에 재능을 피우지 못하고 사라진 수많은 현실의 여성들처럼 말이다.

여러 아쉬움이 남지만, 또 하나의 테마인 ‘가족’을 통해 <어벤져스 시리즈>의 개연성을 보충하는 역할로는 제 몫을 다한다. 어린 시절 나타샤가 함께 보낸 이들은 작전상 결성된 유사가족이다. 때로는 작은 오해가 쌓여 싸우기도 하며 억지로 놓인 책임감 탓에 부담을 갖기도 하지만 결국은 ‘가족’이라는 이름 아래 어려움을 헤쳐나간다. 이는 나타샤의 두 번째 가족인 ‘어벤져스’와 유사하다.

<시빌 워>에서 캡틴 아메리카와 아이언 맨의 갈등으로 분열된 어벤져스를 다시 하나로 뭉쳐 타노스와 맞서고, 핑거 스냅 이후의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끝내 어벤져스를 놓지 않았던 나타샤의 강인함의 원동력이 무엇인지 <블랙 위도우>를 통해 충분히 설명된 것이다. 또한 <엔드게임>에서 숭고한 희생을 선택한 나타샤의 심정에 조금은 더 가깝게 다가갈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이기도 하다. 페이즈 4의 첫 번째 작품으로 선택한 <블랙 위도우>를 통해 앞으로 진행될 MCU가 어떤 메시지를 주제로 전달할지 조심스레 유추해볼 수 있는 것이다.

영화 <블랙 위도우> 스틸 이미지

늦게 도착한 미래에도 희망은 있다

얼마 전 운동용으로 바지를 하나 샀다. 택배를 받고 보니 주머니가 없는 옷이었다. 황당해서 주머니 없는 바지를 어떻게 입냐고 투덜거리니 여자 옷은 주머니가 없는 게 태반이라는 대답을 듣고 철없는 투정을 멈춰야 했다.

세뇌에서 풀려난 옐레나가 처음으로 본인을 위해 한 일은 뜻밖에도 주머니가 여러 개 달린 군용조끼를 사는 것이었다. 나타샤는 뭐 그런 걸 사냐고 옐레나를 나무라지만 모든 사건이 지난 후 옐레나는 조끼를 나타샤에게 선물로 준다. 나타샤는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에 이 조끼를 입고 등장해 스코틀랜드에서 타노스의 심복을 물리친다.

기억을 되살려보면 나타샤의 첫 등장은 2010년 개봉한 <아이언 맨 2>였다. 쉴드와 닉 퓨리의 계획 아래에 토니 스타크를 감시하기 그녀는 웨이브를 살린 화려한 헤어스타일과 함께 몸매가 강조된 오피스룩을 입고 나타나 토니의 비서를 지원한다. 무난히(?) 토니의 비서로 채용되고 어벤져스에 합류한 후에도 전개상 필요 없는 노출이 있기도 했고 일명 ‘블랙 위도우 자세’처럼 전투와 상관없는 자세를 취하기도 했다. 하지만 10년의 세월이 흐른 뒤. 활동성을 강조한 슈트를 거쳐 실용성을 겸비한 조끼를 입고 짧은 단발로 헤어스타일을 바꾼다.

<블랙 위도우>의 스텝 롤이 오른 뒤 나오는 쿠키 영상에서는 옐레나는 나타샤의 묘지를 찾아 그녀를 애도한다. 나타샤의 생전, 그녀의 착지자세를 따라 하며 놀리던 옐레나는 또 다른 사건을 통해 자연스럽게 MCU에 합류할 듯 보인다. 2010년대에 나타샤가 통과하며 극복해야 했던 고난 없이, 담백하고 묵묵하게 전문성으로 인정받는 여성 슈퍼히어로의 대안(Alternative)이 되리라 믿는다. 늦게 도착한 미래에도 희망은 있고 용기 있는 이들은 항상 그것을 찾아내는 법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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