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스=송창한 기자] 일제강점기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손해배상 청구를 각하한 1심 재판부의 판단에 법리가 아닌 정치논리가 작용했다는 비판이 일고 있다.

'한강의 기적', '한미동맹 악화' 등 재판부의 주관적 견해가 강하게 담긴 이번 판결은 보수언론의 기사·사설과 맥락이 같다. 2018년 대법원 판단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1심 판결에 주요 보수언론은 정부와 사법부가 '초법적 판결'을 내려 사법 혼란이 불거졌다는 식의 비판을 내놓고 있다.

7일 강제징용 노동자와 유족 85명이 일본제철·닛산화학·미쓰비시중공업 등 일본 기업 16곳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소송에서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34부는 각하결정을 내렸다. 이날 재판에 참석한 관계자들이 재판 후 법정 앞에서 벌인 기자회견에서 의견을 말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7일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 34부(재판장 김양호)는 강제동원 피해자 등 85명이 일본기업 16곳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를 각하했다. 1심 재판부의 주된 논리는 한·일 청구권협정에 따라 피해자들의 배상청구권이 "완전히 최종적으로 해결"됐다는 것이다.

1심 재판부는 2018년 일본 식민지배의 불법성을 바탕으로 일본 전범기업의 배상책임을 인정한 대법원 판결을 문제삼았다. 재판부는 "유감스럽지만 식민지배와 징용의 불법성을 전제로 한 국내법적 해석에 불과하다"며 한·일 청구권협정을 깨고 배상청구권을 인정하면 국제법을 위반하는 것이라고 했다.

1심 재판부가 이런 결론에 이르게 된 근거들이 법리가 아닌 국가안보·외교 논리에 치중돼 있어 논란은 증폭되고 있다. 재판부는 "대한민국이 한일협정으로 얻은 외화는 이른바 '한강의 기적'이라고 평가되는 세계 경제사에 기록되는 눈부신 경제성장에 큰 기여를 했다"고 판결문에 썼다.

이어 배상청구권을 인정한 판결이 유엔국제사법재판소로 갔다가 패소하면 "이제 막 세계 10강에 들어선 대한민국 위신은 바닥으로 추락할 것"이라며 "대표적 자유민주주의 국가인 일본과의 관계가 훼손되고, 이는 결국 한미 동맹으로 우리의 안보와 직결된 미국과의 관계 훼손으로 이어진다"고 했다. 또 재판부는 독도·위안부 문제까지 거론하며 "국제재판에 회부되면 대한민국은 승소해도 얻는 게 없고, 패소해도 국격에 치명적 손상"이라고 판결했다.

이 같은 1심 재판부 판결은 2018년 대법원 판결 이후 보수언론의 논조와 유사하다. 일본이 강제징용 배상을 거부하고 경제보복을 이어가자 보수언론에서는 한국정부의 책임을 묻는 기사와 칼럼 등이 이어졌다.

조선일보는 2019년 7월 5일 최상용 전 주일 한국대사 인터뷰를 통해 "정상 간 신뢰가 없는 상황에서 일제 강제징용 배상 문제가 장기화돼 사태가 이 지경까지 왔다"는 발언을 전했다. 최 전 대사는 "문재인 정부는 도덕적 우위의 관점에서 한·일 관계를 바라본다. 도덕성은 매우 중요한 가치이지만 외교를 도덕화해 상대국을 선악 이분법으로 보면 협상이 불가능하고 아무 문제도 해결할 수 없다"며 한국정부의 책임을 강조했다.

2019년 7월 8일 송호근 중앙일보 칼럼니스트는 <되살아나는 제국>에서 "식민배상 문제가 불거질 때마다 한일청구권협정으로 입막음해 온 일본에 개별 청구권은 아직 유효하다고 주장하는 한국은 어쨌든 '믿을 수 없는 국가'가 됐다"며 "대법원이 내린 결정을 어쩔 수 없다고 방관하는 것은 정치가 아니다. 대통령의 용단만이 길을 뚫는다"고 했다.

2019년 7월 15일 전영기 중앙일보 칼럼니스트는 <대법관들이 잘못 끼운 첫 단추>에서 "사고는 대법원이 치고 고통은 국민이 속절없이 당하는 형국"이라고 했다. 그는 2012년, 2018년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단에 대해 "세계 일반의 상식과 법의식에 부합하는 논리의 자연스러운 전개는 찾기 어렵다"고 했다.

같은 날 동아일보 박제균 논설주간은 <韓美동맹 흔드는 日 경제보복>에서 "국가 간 합의마저 무시하는 한국은 ‘경기 중에 골대를 옮기는 나라’라는 인식이 일본 사회에 기름을 뿌렸고, 결국 강제징용 판결이 불을 지른 것"이라고 썼다.

그러나 1심 재판부의 판결은 '법리가 부족한 주관적 판결'이라는 지적이 제기되고 있다. 한겨레는 9일 사설<인권 무시한 판결로는 한일관계 미래로 갈 수 없다>에서 "편향된 외교·안보 논리를 앞세워 피해자들의 인권을 무시한 조악한 판결 내용에 법조계 안팎에서 비판의 목소리가 높다"며 "엄정한 법리에 근거해 인권 침해 피해자들의 권리를 보호해야 할 사법부가 외교와 국제적 힘의 논리를 내세워 이해할 수 없는 판결을 내린 것은 극히 유감"이라고 적었다.

한겨레는 "법적 판단은 법리에 따라 엄정히 하되, 외교적 노력도 병행하는 게 올바른 방향"이라며 "정부는 대법원 판결 이후 ‘사법부 판결에 개입할 수 없다’는 논리만 내세워 피해자들이 실제로 일본의 사과와 배상을 받을 수 있도록 외교적 노력을 제대로 하지 않았다는 지적을 겸허히 받아들이고, 더욱 적극적인 외교로 해법 마련과 한-일 관계 개선을 위한 실질적 노력을 계속해나가길 바란다"고 제언했다.

경향신문은 8일 사설에서 '국내법적 해석에 불과하다'는 1심 판결에 대해 "대법원 판결은 한일협정이 식민지배의 불법성을 전제한 협정이 아니므로 강제징용 위자료 청구권은 한일협정이 적용되지 않는다고 한 것임을 잘못 해석했거나 무시한 오독(誤讀)과 다름없다"고 지적했다.

경향신문은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행정부의 외교권에 대한 간섭으로 볼 소지도 있다"면서 "강제집행이 ‘국가의 안전보장과 질서유지라는 헌법상의 대원칙을 침해한다’는 인식은 논리의 비약이다. 일본 정부와 법원조차 개인청구권이 소멸되지 않았음을 인정하는 터에 국가 우선의 논리를 동원한 일장훈시와 같은 주장이 당혹스럽다"고 평했다.

한국일보는 7일 기사 <주관적 견해 가득 강제동원 판결 논란… '한미동맹' '한강의 기적'까지 등장>에서 "판결문에 재판부 견해가 구체적으로 담긴 것을 두고 법조계 안팎에선 의아함을 넘어 부적절하다는 지적까지 나온다"며 "한일 문제에 정통한 법조인들도 '판사는 법적 판단만 하면 되는데, 언제부터 판사들이 그렇게 정치·외교적 식견이 넓어졌는지 모르겠다'고 꼬집었다"고 보도했다.

반면 주요 보수언론은 1심 재판부를 치켜 세웠다. 조선일보는 8일 사설 <전례 없는 사법 혼란, 선거용 反日몰이의 필연적 결과>에서 "과거사를 정치적으로 이용해온 문재인 정부와 초법적 판결을 한 김명수 사법부의 책임"이라고 주장했다. 조선일보는 이날 기사에서 1심 재판부가 대법원 판결을 '조목조목' 반박했다고 평가했다. (사법부 혼선… 김명수 대법원 '11대 판결, 1심이 조목조목 반박)

조선일보 선우정 논설위원은 9일 칼럼 <文 정권에선 검사가 정치하고 판사가 외교한다>에서 일본과의 관계와 한미동맹 훼손 우려를 언급한 1심 재판부 판결을 인용하며 "국제 무대에서 실제로 벌어지는 일이다. 법원이 법리만이 아니라 외교까지 걱정한다"고 썼다.

중앙일보는 하급심인 1심 판결로 대법원 판결이 '뒤집혔다'는 식의 보도를 내놨다. 중앙일보는 8일 기사 <G7회의 앞두고 뒤집힌 판결… 이제 '외교의 시간' 왔다>에서 "법원이 한·일 관계에 던졌던 ‘시한폭탄’의 타이머를 스스로 멈췄다"며 "문재인 정부 들어 한·일 간 악순환 고리의 시작점이나 마찬가지였던 대법원의 강제징용 피해 배상 판결을 하급심에서 뒤집었다"고 보도했다.

☞ 네이버 뉴스스탠드에서 ‘미디어스’를 만나보세요~ 구독하기 클릭!

저작권자 © 미디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