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조한 날씨 탓인지 손톱 주변의 살이 제 멋대로 갈라지더니 약을 발라도 쉬 아물지 않는다. 서점에서 책을 고르다가 날카로운 모서리에 상처 난 곳이 자극을 받았는지 피가 뚝뚝 떨어졌다. 그 모양을 본 종업원이 얼른 핸드백에서 1회용 밴드를 꺼내 손톱 주변을 야무지게 싸매줬다. 넘어진 어린아이가 상처에 피가 난걸 보고 그제야 갑자기 울음을 터뜨린다는 말 처럼, 피가 날 때는 책에 묻지 않을까 당황해서 아무 생각도 나지 않더니, 1회용 밴드로 감싸인 손톱을 보면서 비로소 '아주 쬐금' 아픈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사무실에서도 작업을 하다가 종이에 스르르 스친 듯 만 듯 손가락을 베이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크게 고통스럽진 않지만 사소한 번거로움 때문에 얼른 나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공통적인 사실은 '화장실에 갈 때 마음 다르고 나올 때 마음 다르다'는 말처럼 아주 작은 기원이라도 절실하게 간구할 때 보다 성사되고 나서 잊는 경우가 더 많다는 것이다.

라디오 출연자들의 정성스런 편지 낭송은 '성찰의 시간'

사람과 사람 사이에도 마음 드나듦이 참 성가시다. 고맙고, 고맙고 또 고마워도 모자랄 은혜의 관계가 사소한 일로 마음 다치고 원망한다. 그 단계를 극복하고 나면 베인 손가락이 아물고, 덧난 자리에 새살 돋은 것처럼 고맙고 감사해야 하는데, 언제 그랬냐는 듯 새까맣게 잊고 만다. 그래서 은혜로움은 없고 상처와 고통의 기억만 되풀이 된다.

종교방송에서 일하는 복덕 중의 하나는 이처럼 '사소한 인간스러움'을 극복하기 위한 다양한 환경이 조성된다는 점이다. 경건하게 자주 마음을 추스르게 되면 인간스러움으로 얼룩진 마음도 얼른 돌이킬 수 있고 본래 내 마음 자리를 돌아보기 위해 성찰의 기회를 갖게 된다.

▲ 김사은 PD가 제작하는 원음방송 라디오프로그램 '원음의 소리' 홈페이지
내가 제작하고 있는 <원음의 소리>라는 프로그램에서는 '은혜발견 릴레이-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코너를 마련하고 있다. 개인적으로도 성찰하며 공부하는 시간이기도 하다. 은혜라는 건, 매일 말짱하게 살아갈 때는 드러나지 않다가 뭔가 부족하고 아쉽고 그리하여 삶의 경계에 이르렀을 때 문득 문득 드러나는 존재인 것 같다.

이 코너는 '나에게 은혜의 씨앗이 되어준 사람, 은혜를 일궈준 사랑을 발견하는' 시간으로 은혜의 연결 고리로 모두 하나되는 세상을 기원하는 취지에서 기획되었다. 너무 당연해서 잊고 사는 것들, 그 소중한 가치를 되새겨 보자는 것이다. 은혜 편지를 써오시라고 권유하고 있는데, 출연자들은 한결같이 귀찮은 기색없이 정성스런 편지를 준비해서 낭송을 하신다.

공중파에 실려 날아가는 '은혜'의 편지 "고맙습니다"

아시겠지만 편지를 쓰는 것, 그리고 방송을 통해 낭송하는 일은 각각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쓸 때 마음 새롭고, 낭송하는 순간은 더욱 경건해져 감동이 배가된다. 은혜 편지를 띄우는 대상자들은 60% 이상은 단연 배우자인듯 하다. 남편 혹은 아내에 대한 고마움, 감사, 미안함, 그리고 다짐 등이 자연스럽게 묻어 나온다. 그 다음으로 법연에 대한 감사의 마음이 많고 사제의 정도 새록 새록 감동이다.

며칠 전 여성단체에서 일하고 있다는 아주 밝은 표정의 여성 출연자 한분이 남편에게 편지를 보낸다고 하여 귀를 기울이니, 먼저 세상을 떠난 남편에 대한 그리움이었다.

"그리운 사람, 보고싶은 당신에게…. 여보, 얼마나 불러보고 싶은 호칭인지요, 당신이 떠난지 벌써 9년이라는 세월이 흘렀군요. 세월은 너무나 빨리 흘러가는데 내 마음속에 남아있는 당신은 언제나 그 자리에 있어요. 우리의 소중한 아이들은 벌써 18살, 16살 청소년이랍니다. 아빠 없이 한부모 밑에서 성장하며 겪었을 아픔을 생각하면 말로 뭐라 어떻게 표현할 수 있겠어요? 그렇지만 우리 아이들, 넘 멋있게 자랐답니다."

이렇게 시작된 편지는 성장한 아이들에 대한 대견함, 고마움, 그리고 남편이 떠난 후 지금까지 가족을 돌봐주는 동료 교사들에 대한 은혜로 이어지면서 남편에게 부탁의 말로 마무리하고 있다.

"여보, 나 잘하고 있죠? 그럼 나 응원해 줘요. 나 열심히 잘, 살라고. 그리고 당신과의 약속, 우리 보물들 매사에 감사하는 마음을 갖고 또한 오늘에 충실할 수 있도록 잘 키워서 세상에 보은하는 사람이 되도록 키우겠다는 약속 잘 지킬거예요. 지켜봐줘요. 사랑해요 여보."

스튜디오는 이내 출연자와 더불어 울음바다가 되고 여운은 잠시 음악에 파묻혔다. 자신의 아픔을 삭이며 씩씩하게 봉사활동으로 은혜를 실천하는 그 분이 다시 보였다. 무엇보다 자녀들을 세상에 보은하는 사람으로 키우겠다는 약속이 값져보였다. 하늘에 계신 남편은 아내의 목소리를 들었을까? 아마도, 구구절절 편지에 담은 사랑하는 가족의 안부를 모두 챙겨 들었을 것이라고 믿고 싶다. 마음의 소리도 전해진다는데, 공중파를 통해 전한 은혜의 편지가 어딘들 닿지 않겠는가? 저 세상에도 전해지는 은혜의 마음이 가까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얼마나 잘 전해지겠는가?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해도 해도 넘침이 없는 말이다. 방송 마치고 스튜디오를 나오며 나는 오늘도 잊고 살았던 은혜의 마음을 들춰본다. 고마운 사람…, 너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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