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15일, 1천 500억원 상당을 기부하겠다고 밝힌 안철수 원장이 취재진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안 원장은 기부는 당연한 일로 오래 전부터 생각해왔던 일이라고 짧게 입장을 밝혔다. ⓒ 연합뉴스
안철수 원장이 계속해서 정치권의 핵심 키워드로 떠오르고 있다. 이제 '안철수'라는 세 글자를 빼놓고는 어떤 정치세력도 이후의 전망을 이야기하는 것이 어렵게 됐다.

최근 발표된 여러 여론조사 결과에서도 이러한 상황은 쉽게 발견된다. 다수의 여론조사에 따르면 안철수 원장은 양자대결구도에서 박근혜 전 대표의 것을 상회하는 지지율을 얻고 있으며 다자대결구도에서도 박근혜 전 대표와 비슷한 수준의 지지를 받고 있다. 연령별로는 20대에서 40대까지, 지역별로는 영남을 제외한 거의 전 지역에서 고른 지지를 받고 있다.

정치인들의 계속되는 정치개혁 관련 발언과 이와 관련한 '신당 창당' 논의도 안철수 원장이 정치권에 미치고 있는 커다란 영향력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진보, 보수를 가릴 것 없이 거의 모든 정당이 '리모델링'을 기획하고 있다. 민주노동당을 중심으로한 진보정치세력의 재편과 혁신과 통합과 민주당이 기획하는 새로운 통합정당, 그리고 한나라당을 중심으로 기획된 여러 종류의 신당창당론이 이러한 것들에 해당한다.

그러나 이러한 여러 가지 기획이 안철수 원장을 지지하는 다수의 지지를 획득할 수 있을지는 아직 미지수다. 안철수 원장이 획득하는 지지는 이념적으로는 중도-개혁에 가깝고 지금까지 여론조사에서 부동층에 머물러 있던 측면이 강하다. 아무리 당명을 바꾸고 재창당을 해도 기성 정치권의 모습을 조금이라도 담고 있다면 안철수 원장이 받는 지지를 가져올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은 근본적으로 대중이 가지고 있는 정치적 냉소주의에 기인하고 있는 것 같다. 오늘날 대중은 자신들이 삶에서 겪고 있는 여러 가지 곤란이 거짓말만 일삼고 자신들의 사익만 추구하는 정치인들의 부패에서 비롯된 것이며 이것은 진보, 보수를 가리지 않고 모두가 일반적으로 처해 있는 상황일 것이라고 추측한다. 이러한 생각 때문에 이들은 기성 정치권의 어떤 정당도 지지하지 않는 상태로 남아있게 된 것이다.

보수세력의 정권이나 개혁세력의 정권이나 대중의 삶을 행복한 것으로 만들어 주지 못한 것은 사실이다. 또 대중이 기억하는 자신들의 삶에 영향을 미친 정치인은 보통 독재자이거나 제왕적 리더십을 발휘해 온 정치적 거물들이다. 때문에 이들의 이러한 바람은 민주주의의 원칙의 확산이나 심지어 복지국가의 완성으로도 채워질 수 없는 것일 가능성이 크다. 대중에게 중요한 것은 그러한 많은 '말'들이 아니라 어떤 '믿을만한 사람'이 '힘'을 발휘해야 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안철수 원장의 등장 이전까지 범야권은 거의 브레이크 없는 좌클릭을 되풀이해왔다. 이전까지 민주노동당 등의 진보정당이 주장해왔던 여러 가지 정책을 선거 때마다 과감하게 받아들여 공약으로 만들었으며 무상급식과 같은 주장을 현실에서 실현할 수 있도록 강제하기도 했다. 하지만 대중이 과연 범야권의 이러한 좌클릭 행보에 커다란 지지와 환호를 보냈는가에 대해서는 다시 한 번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여전히 한나라당의 지지율에 밀리고 있던 범야권이 아니던가?

대권주자들을 중심에 놓고 생각을 해봐도 그렇다. 노무현 대통령의 서거 이후 친노의 정치적 적자로 평가됐던 유시민 국민참여당 대표가 가장 높은 지지율을 획득했을 때조차 지금의 안철수 열풍을 감당하기엔 역부족이었다. 손학규 대표가 분당 을 보궐선거에서 승리해 수도권에서 민주당이 승리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었을 때 그가 획득한 대권주자로서의 지지율은 20% 정도 밖에 안 됐다.

오히려 대중이 강력하게 반응하는 것은 안철수 원장이 1500억 원을 사회를 위해 내놓겠다는 선언이었다. 이 선언 이후 그렇잖아도 높은 수준에서 형성된 안철수 원장의 지지율이 또 한 번 상승세를 그렸다. 버핏세 도입도 아니고, 부자 증세도 아니며, 사회적 안전망 확충도 아닌 '1500억 원 기부'가 대중에게 어필한 이유는 도대체 무엇인가?

이것은 당연히 앞서 언급한 '믿을만한 사람'에 대한 대중의 갈구를 증명하는 것이다. 정치인들의 조세제도를 개편한다, 복지예산을 확충한다, 비정규직을 정규직화 한다하는 수많은 '말'들은 이제 믿을 수 없는 얘기들이 되어버렸다. 그런 허망한 것들보다는 '나는 평생 벌어본 적도 없는 1500억 원이라는 거금을 남을 위해 실제로 내놓을 수 있는 사람'이 대중의 눈 앞에 나타나 버린 것이다.

이러한 상황은 어떤 측면에서 보면 '정치의 위기'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대중이 '갈등의 조정을 통한 타협'이라는 정치의 근본적인 원리를 거부하고 있는 것으로 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 대중이 원하는 것은 다양한 주장이 공론의 공간에서 서로 부딪치며 최선의 결과를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어떤 훌륭한 사람이 나타나서 단칼에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라는 거다.

그런데 이 문제를 좀 더 깊게 생각해보자. 실제로 안철수 원장이 대통령이 되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그가 진보적이지 못하고 보수적 지향을 가졌기 때문에 사람들이 만족할만한 세상이 만들어지지 않고 때문에 사람들은 또 실망하게 될 것이라는 분석은 분명 맞는 말이지만 그래서 오히려 단순하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그의 이념적 지향이 아니라 그의 '방식'이다.

대통령이 된다면 국가를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줄 수 있는 방식으로 운영해야 하고 이를 위한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하지만 대중이 지금 안철수 원장에게 환호하고 있는 방식으로는 이러한 노력에 많은 어려움이 따를 것이다. 일례를 들면 안철수 원장이 매월 1500억 원 씩 계속해서 기부를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설령 그렇게 한다고 해도 안철수 대통령에 대한 대중의 지지는 치솟을지 모르겠으나 국가가 돌아가는 방식은 별로 바뀌지 않을 것이다. 안철수 대통령이 국민과 직접 소통하기 위한 파격적인 행보를 하고 보다 국민들에게 친화적인 의견수렴 창구를 만들고 부패한 공무원들을 과단성 있게 퇴출시키고 청와대를 그야말로 도덕의 성지로 만든다고 해도 여전히 우리는 하루 10시간의 고된 노동에 시달릴 것이고, 아이들은 사교육을 받느라 놀 시간이 없을 것이며, 자본의 효율을 위해 해고되는 노동자들의 투쟁으로 거리는 혼란스러울 것이다.

즉, 문제를 해결하는 것의 핵심은 사회구조를 개혁하는 것이고 제도를 개선하는 것이며 국가를 사회정의가 작동하는 방식으로 설계하는 것이다. 이러한 방법론을 전통적으로 주장해온 것이 '진보주의'이다. 즉, 안철수 원장을 향한 대중의 지지가 나타내고 있는 정치의 위기는 실은 진보의 위기이다. 그리고 여기에 편승해서 진보주의의 고전적 방법론을 포기하는 것은 진보의 정치적 무책임일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시기상조인 생각이라고 폄하할지 모르겠지만, 안철수 현상은 범야권이 2012년에 집권하면 이후 반드시 부메랑이 되어 돌아올 것이다. 그리고 이때 생겨날 대중의 열망에 어필해야 하는 것이 진보정치의 임무이다. 한국사회의 진보정당들은 안철수 현상에서 다른 쓸데없는 것 말고 바로 이러한 교훈을 얻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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