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스=김민하 칼럼] 윤석열 전 검찰총장이 “5.18은 현재도 진행 중인 살아있는 역사”라고 했다고 한다. 맞는 말이다. 그런데 조선일보의 인용을 보면 발언에 정파적 고려가 있는 듯하다. 조선일보는 <윤석열 “정부, 5·18 선택적으로 써먹고 던져”>란 제목을 달아 보도했다. “선택적으로 써먹었다”는 게 뭘까? 보도를 보면 윤석열 전 총장은 유엔 북한인권결의안 표결 문제와 미얀마 사태에 대한 규탄에 미온적이라는 점 등을 겨냥해 발언하고 있다. 여기까지라면 그런 비판도 의미는 있을 것 같다.

다만 “자유민주주의의 반대는 독재와 전체주의”, “그런데 현 정부는 헌법의 ‘자유민주주의’에서 ‘자유’를 빼려 하지 않았느냐”라고 주장한 건 의문이다. 일각에서 ‘자유민주주의’를 ‘민주주의’로 대체하자는 주장이 나온 것은 북한이나 중국의 공산주의를 지지하자는 얘기가 아니었다. 첫째, 자유주의적 가치는 일반적 차원의 민주주의라는 개념만으로도 충분히 대변할 수 있다. 둘째, 과거 독재정권은 자유민주주의라는 개념을 악용해 민주화 요구를 ‘불순한 의도’를 가진 사람들의 것으로 몰아 탄압하였는데, 이러한 역사로부터의 단절이 필요하다. 셋째, 자유민주주의란 개념을 시장주의적 경쟁의 정당화로 쓰는 경우가 많은데 시장원리주의의 폐해가 강조되는 오늘날에 있어선 적절치 않은 개념일 수 있다.

이런 맥락을 다 무시하고 “자유민주주의의 반대는 독재와 전체주의”라고 하는 건 발언한 본인이 이념적 편향에 빠져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현직 검찰총장직에 있을 때는 이와 유사한 발언을 직무와 한정된 개념으로 해석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정치 입문을 눈앞에 둔 상황에선 사회 일반에 대한 발언으로 봐야 한다. 이런 태도로는 5.18 정신의 계승을 말할 자격이 없다는 평가가 불가피한 것이다.

윤석열 전 검찰총장 (연합뉴스)

최근의 여러 상황들은 과연 민주주의란 무엇인지에 대한 의문을 낳게 한다. 가령 여당은 연일 부동산 정책의 변화를 시사하고 있다. 경제부총리 출신 김진표 의원이 위원장을 맡는 더불어민주당의 부동산 특위는 재산세, 종부세, 양도소득세, 대출규제 완화 등에 대하여 기존 정책의 수정 등을 논의하고 있는데, 이는 변화된 ’민심’에 호응하기 위해서이다. 현실 정치 세력으로서는 불가피한 행보이다.

그러나 이게 무엇을 어떻게 대변하고 설득할 것인지에 대한 평가를 피해갈 이유는 되지 못한다. 그런 점에서 보면 비판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민주주의를 현실정치가 ‘민의’를 ‘대변’하는 것으로 볼 때, ‘민의’와 ‘대변’ 사이엔 일종의 정치적 ‘번역’이 존재할 수밖에 없다. 이 ‘번역’을 어떻게 하는가가 정치세력의 노선이 되는 것이다.

가령 언론이 GTX-D 노선이라고 부르는 문제를 보자. 김포신도시 주민들의 교통 불편은 외면할 수 없는 현실이다. 그러나 이들이 요구하는 ‘GTX-D 원안 관철’과 ‘강남 직결’을 그대로 수용하는 것이 대안인지는 따져볼 문제다. ‘GTX-D 원안’이라는 게 의미하는 바가 불분명할 뿐더러(애초에 GTX-D라는 개념 자체에 실체가 없다) ‘강남직결’의 필요성은 이 지역뿐만이 아니라 수도권 전체의 요구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수도권 모든 지역에서 환승 없이 강남권에 접근할 수 있는 교통망 설계라는 게 과연 가능하겠는가?

따라서 김포신도시 주민들의 불편을 어느정도 해소하면서 기존 구조 내 해결책을 모색하는 게 필요하다. 애초 비용 대비 편익이 낮아 논란의 대상이 돼왔던 GTX-B 노선에 연결하자는 대안이 제시된 건 이 과정에 따른 것이다. 물론 불만은 여전할 것이다. 남은 건 지도자와 정치세력이 ‘큰 그림’을 갖고 설득을 하는 일이다. 이걸로 끝이 아니다. 이게 결국 신도시 정책의 사각지대를 보여 준다는 점에 대해 평가하고 보완책을 마련해야 한다. 신도시의 실질적 조성과 입주가 늦어질 경우 교통망 확충은 어느 시점에 어떤 방식으로 이뤄져야 하는지, 그 기준은 무엇이 되어야 하는지 등의 대목에서 보완의 여지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정치권이 이런 방식으로 이러한 문제를 사고하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특히 부동산 정책의 경우가 그렇다. 언론은 종부세 및 재산세 기준 완화와 LTV 비율 상향에 초점을 맞춰 보도하고 있는데, 이러한 디테일이 무슨 그림의 일부인 것인지는 이야기하지 않고 있다. 큰 그림이 무엇이냐에 따라서 개별 정책의 의미는 크게 달라질 수 있다. 그런데 지금 여당 내의 논의는 어느 정도 구매력을 갖춘 무주택자들의 집을 꼭 사야만 하겠다는 여론과 주택 소유자들의 세금 부담을 지고 싶지 않다는 심리를 거의 그대로 반영하는 것에 초점이 맞춰지고 있는 게 아닌가 의문이다. ‘그림’이 없는 것에 가깝다는 거다.

‘집을 살 수 있게 해달라’, ‘세금 부담을 감경해달라’는 요구가 제도에 그대로 반영되도록 하는 것은 민주주의의 원리에 충실한 것일까? 가령 대학생이 한강에서 안타깝게 사망한 사건에 대해 사실상 같이 있던 ‘친구’를 별다른 근거 없이 ‘의심’만으로 처벌하라는 요구를 체제가 그대로 수용해야 한다고 한다면, 그건 민주주의일까? 여당에 실망해 야당에 투표하고, 다시 그 야당에 실망해 여당에 투표하는 행태를 유권자가 반복하는 것을 민주주의의 구현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지금의 여당은 역사적으로 ‘야당’의 위치에 놓인 적이 많았기에 이러한 질문들에 대해 손쉽게 ‘그렇다’고 답하는 것에 익숙해져 있다. 이제 세 번째 집권기를 맞아 모처럼 ‘아니다’라고 하려니 온갖 괴이한 논리를 동원하는 무리수를 두게 된 것이다. 이게 우리가 이 정권에서 본 ‘개혁적 파탄’의 실체이다. 역사적으로 세 번째로 야당의 위치에 놓인 보수정당도 마찬가지의 길을 가고 있다.

새로운 시대의 민주주의는 기성의 엘리트 체제가 ‘민의’를 단지 반영하는 것만을 의미할 수 없게 되었다. ‘민’은 ‘요구’하는 것을 넘어 체제를 스스로 책임질 수 있어야 한다. 민주주의는 이를 가능케 하는 과정이다. 5.18이 정말 ‘살아있는 역사’라면,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따로 있다. 그것은 5.18에 참여한 시민들이 타의에 의한 고립의 상황에서도 스스로를 책임지는 체제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는 사실이다. 이걸 계승하겠다고 하지 않는 한 지금의 자칭 ‘민주세력’부터 윤석열에 이르기까지, 5.18을 선택적으로 써먹고 마는 사람들의 범주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걸 알아야 한다.

☞ 네이버 뉴스스탠드에서 ‘미디어스’를 만나보세요~ 구독하기 클릭!

저작권자 © 미디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