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여곡절 끝에 한미FTA 비준안이 통과됐다. 한나라당의 마치 군사작전을 방불케하는 치밀한 움직임에 민주당이 속절없이 당한 것 아니냐는 지적과, 협상 과정에서 불분명한 태도를 보인 민주당 내 협상파 의원 등이 사실상 비준안 처리를 눈감아 준 것 아니냐는 비판도 있다. 그런 진실이야 어쨌든 지금 시점에서는 한미FTA 협상 타결로 인해 정치권에 휘몰아치게 될 바람에 대해 한 번쯤 생각해봐야 할 시간이 필요하다.

일단 민주당의 처지부터 되짚어보자. 민주당이 한나라당의 움직임을 사전에 캐치했는지 여부가 인터넷에서는 큰 관심사인 것 같다. 단적으로 말하자면 나는 민주당 지도부가 사전에 한나라당의 강행처리 움직임을 모르고 있었을 것이라고 판단하고 있다. 일각에서는 원래 국회에서 일어나는 일은 양당이 다 서로 예측할 수 있는 창구가 있다는 점을 들어 민주당의 '의도'를 의심하고 있는 모양인데 이러한 의심은 몇 가지 단서를 통해 해소할 수 있을 것이라는 게 내 생각이다.

▲ 민주당 김진표 원내대표가 24일 오전 국회 원내대표실에서 열린 고위정책회의를 주재하고 있다. ⓒ연합뉴스
첫 번째 단서는 한나라당 의원들도 당일 한미FTA 비준안 강행처리 계획을 모르고 있던 사람들이 많았다는 것이다. 원희룡 의원이나 이재오 의원 같은 나름대로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의원들도 강행처리 계획을 모른 채 다른 일정을 수행하느라 본회의에 참석하지 못했다. 다른 의원들의 경우도 1시간 전에야 의원총회에서 이 사실을 알게 됐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상황이다.

두 번째 단서는 민주당 지도부도 실제 미리 통지받지 못했다는 증언을 적극적으로 하고 있다는 점이다. 민주당 박지원 전 원내대표는 CBS와의 전화 인터뷰를 통해 '한나라당에서 강행처리를 할 때는 대개 미리 얘기를 해주지만 이번에는 그런 것이 없었고 때문에 원내지도부에서도 외통위실만 지키라 해서 착실히 지키고 있었다.'고 발언했는데, 이 얘기를 참고하면 처리 당일 민주당 의원들의 혼란상도 이해가 되는 점이 있다. 애초에 정치권에서 추측한 디데이는 23일 또는 24일이었고 그 전에 한 번쯤 외통위에서의 안건 상정 시도가 있을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했던 상황에서 한나라당의 기습적인 움직임은 민주당 의원들에게도 그야말로 전광석화와 같은 것이었다고 판단할 수 있다.

이런 상황인 것을 아마 서로 이심전심이기 때문에 가장 격렬하게 한미FTA 비준을 반대했던 민주노동당도 민주당의 당일 태도에 대해 공개적으로 비난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하는 추측도 가능하다. 아니, 오히려 민주당의 이런 '이해할만한 혼란'은 민주노동당 김선동 의원의 최루탄과 더불어 향후 야권연대에 중요한 실마리를 제공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다.

그렇지 않아도 야권연대에 관한 민주당 내부의 혼란이 매일 뉴스에 오르는 상황이다. 통합신당을 어떻게 만들 것이냐에 관한 문제인데 이와 관련한 두 가지 어려움이 논쟁을 과열시키고 있는 모양이다. 첫째는 이렇든 저렇든 한나라당과 1대 1 구도를 만들어야 정권교체가 가능하다는 점에 누구나 동감하고 있다는 점이며, 둘째는 이것을 위한 정계개편이 작동할 경우 2003년의 열린우리당과 같은 상황으로 치달을 수 있다는 점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만일 한미FTA 비준과 관련하여 어떤 형태로든 민주당이 이를 눈감아주는 그림이 그려졌다면 당장 진보정당과의 야권통합 시나리오가 어그러졌을 것이다. 물론 지금 상황에서 진보정당까지 포괄한 야권통합은 실제로 작동하지 않을 가능성이 훨씬 크지만 문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거연합을 해야 한다는 점이다. 민주당이 한미FTA 비준에 손을 들어주었거나 강행처리를 방기했다면 내년 총선에서 진보정당 측에 훨씬 큰 지분을 양보해야 할 어려움이 닥칠 수 있었다. 어쨌든 대선을 양보받기 위한 명분을 서로 만들어 나가야 하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 민주노동당 김선동 의원이 22일 국회 본회의장 발언대에서 여당의 한미FTA(자유무역협정) 비준안 강행처리를 저지하기 위해 최루탄을 터뜨리고 있다.ⓒ연합뉴스
반대로 한미FTA 비준과 관련하여 민주당이 매우 강경한 자세를 고수하며 국회를 때려부수는 방향으로 사태가 진행됐다면 통합의 주도권이 좀 더 좌측으로 옮겨지고 있는 상황을 좌시할 수 없는 민주당 내 온건파들이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을 것이다. 이런 경우 사실상 민주당의 분당이나 그에 준하는 격렬한 반발이 내부적으로 제기되었을 상황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현실은 민주당이 적극적으로 강행처리를 막아내지 못했다는 질책을 들었고 국회 내에서의 과격한 행위는 민주노동당 김선동 의원의 최루탄 투척으로 상징되는 상황이 됐다. 결과적으로 이런 상황은 한미FTA라는 변수가 기존에 진행된 통합논의의 프로세스를 크게 훼손하지 않는 결과로 이어지게 된 것이다.

그러나 범야권 내부의 입장에서는 이것이 다행스러운 일이 됐을지 몰라도 정치를 바라보는 국민들의 입장에서는 그렇지 않은 것 같다. 그것이 어떤 형태이든 국회 내에서의 혼란과 갈등은 국민의 다수가 가지고 있는 냉소적 감수성을 계속해서 자극하고 있고 이는 '새로운 정치세력의 출현'을 계속해서 갈망하는 방식으로 표출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것은 여권의 입장에서도 마찬가지의 곤란함으로 다가올 수 있다. 이를테면 박근혜 전 대표의 처신이 그렇다. 박근혜 전 대표는 '생애주기별 맞춤형 복지', '부자증세' 등의 이슈를 통해 이명박 대통령과의 정책적 차별화를 도모하고 차기 대권경쟁에서 유리한 고지를 놓치지 않으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다. 만일 그렇다고 한다면 한미FTA 비준동의안 처리 과정에서도 기권을 선택하거나 처리에 참여하지 않는 것이 자연스럽다. 실제로 다른 일정을 핑계로 본회의장에 오지 않을 수 있는 선택지는 얼마든지 있었다. 하지만 박근혜 전 대표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아마 가장 큰 이유는 '분당'을 우려했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게 내 생각이다. 한미FTA는 이명박 대통령과 친이계 정치인들이 가장 적극적으로 밀어붙였던 프로젝트이다. 여기에 반대를 표명하는 것은 당 내에 박근혜 전 대표를 중심으로 한 친박계와 이들의 의사를 간접적으로 대변하고 있는 당 내 소장파의 연합전선 대 비-박근혜계의 대결 구도를 만들어낼 수 있는 선택이다. 이미 당 밖에서는 박세일 이사장의 보수신당 논의가 점차 흐름을 갖춰가고 있고 김문수 도지사나 정운천 전 총리 같은 '박근혜 대체재'로 여겨질 수 있는 사람들이 연일 박근혜 전 대표와 한나라당에 대한 비난의 목소리를 높여가고 있는 상황에서 이러한 선택은 사실상의 분당을 초래할 수 있다.

꼭 분당이 아니더라도 한미FTA 이후의 당 쇄신 논의에 이것이 일정한 영향을 끼칠 수도 있었다는 얘기다. 한나라당에서 가장 큰 힘을 갖고 있는 박근혜 전 대표의 입장에서는 어떻게 자신이 마음대로 당을 좌지우지 할 것인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얼마나 힘 조절을 잘해서 대권을 향한 단일한 대오가 흐트러지지 않고 끝까지 가게 할 것이냐가 중요한 것이다. 따라서 박근혜 전 대표의 한미FTA 찬성 표결은 예측된 것이었고 불가피한 것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앞서 언급했듯이 이는 결과적으로 박근혜 전 대표가 기존의 정치시스템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사람이라는 점을 계속해서 상기시키는 사건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이를 바라보는 국민들의 입장에서는 탐탁지 않은 선택으로 작용했을 가능성이 크다. 때문에 국민들의 이러한 '아직 출현하기에는 시기상조인 새로운 정치세력'에 대한 열망이 어디로 수렴되느냐가 이후 정국의 핵심적인 키워드로 작동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최근 법륜 스님이 계속해서 언급하고 있는 '안철수 신당'과 같은 프로젝트를 눈여겨볼 필요가 있는 이유다.

저작권자 © 미디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