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스=김민하 칼럼] 지난 재보선에서 거대 양당에 표를 준 유권자들은 지금 어떤 마음일까? “그러면 그렇지”와 “이게 아닌데”가 교차할 것 같다. 재보선 결과가 양당의 반성과 변화로 이어지기를 기대하면서도 그게 쉽게 될 리는 없다는 반쯤의 체념이 있을 거다. 그렇다면 기대는 살리고 우려는 불식시키는 노력으로 신뢰를 회복해야 하는데, 기대는 저버리고 우려는 키우는 이상한 정치를 하고 있다.

국민의힘은 또 전직 대통령 사면론에 발목을 잡힌 모양새다. 그동안 박근혜 이명박 전 대통령 사면 주장은 다소 조심스러운 버전으로 제기돼 왔다. 앞뒤가 어찌됐든 고령의 전 국가지도자들이 오랜기간 감옥에 갇혀 있는 것은 좋지 않으니 대통령의 전향적 판단을 기대한다는 것이었다. 탄핵의 정당성은 부정할 수 없으나 도의적 차원에서 사면이 필요하다는 유승민 전 의원의 주장은 여기에 담긴 의미를 좀 더 노골적으로 드러낸 것이다.

여기까지였다면 민심의 동요는 제한적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서병수 의원이 지난 20일 대정부질문에서 “과연 박 전 대통령이 탄핵당할 만큼 위법한 짓을 저질렀는지, 사법처리 되어 징역형에, 벌금에, 추징금을 내야 할 정도로 범죄를 저질렀는지, 전직 대통령을 이렇게까지 괴롭히고 방치해도 되는 것인지, 보통의 상식을 가진 저로서는 이해하기가 힘들다”고 말하면서 사면론은 ‘탄핵부정’이 됐다. 이 국면에서 오세훈 박형준 두 시장이 대통령과 만나 다시 한 번 사면을 거론하면서 파장은 더욱 커졌다.

이명박ㆍ박근혜 전직 두 대통령 사면론 (PG) (연합뉴스 자료사진)

언론에 이른바 ‘중도’로 표현되는 유권자층은 자신의 이념 지향에 ‘합리적’이란 단서를 붙이는 계층이라고 봐야 한다. 가령 국민의힘 지지 가능성이 있는 ‘중도’라면 자신을 ‘합리적 보수’라고 부를 것이다.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과 촛불시위는 ‘합리적 보수’가 보수정치에 실망한 나머지 지금의 더불어민주당을 지지한 결과였다. 문재인 정권 4년을 거치면서 이들은 다시 더불어민주당에 실망해 공중에 떠있는 상태다. 지난 재보선 결과는 이 ‘합리적 보수’에 더해 정권에 비판적 입장을 갖게 된 여당 지지층, 즉 언론의 표현을 빌자면 ‘합리적 진보’의 일부가 일시적으로 국민의힘 후보에 표를 던진 결과이다.

이들의 공통분모는 이 정권이 성에 차지 않지만 그렇다고 ‘탄핵’ 이전으로 되돌아 갈 수는 없다는 정서이다. 따라서 여야의 ‘변화’란 여당 입장에선 ‘성에 차지 않는 것’을 고치는 것이고 보수정치 입장에선 ‘탄핵 이전으로 되돌아가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런데 탄핵부정과 사면론은 ‘탄핵 이전’을 떠올릴 수밖에 없게 한다. 득이 될 리가 없다.

그럼에도 이런 주장을 하는 이유는 뭘까? 이런 사정을 몰라서 일까? 그렇지 않다. 이런 뻔한 얘기를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겠나. 결국 대선까지 이어지는 당내선거 국면에서 기존 지지층을 만족시켜야 하는 부담이 있기 때문이다. ‘집토끼’를 공략하지 않고서는 전당대회든 대선후보 경선이든 좋은 결과를 내기 어렵다는 것이다. 서울시장이 됐지만 여전히 대권주자로 분류되는 오세훈 시장이 사면론은 박형준 후보가 제기했으나 자신도 마음 속에 품고 있던 얘기였다는 애매한 태도를 취한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상황에 따라 “박형준 시장과 사면 설득에 앞장섰다”와 “나는 적극적으로 말하지 않았다”를 취사선택하겠다는 거다.

그나마 보수정치는 스스로 시험지에 자꾸 오답을 적어서 그렇지 답이 무엇인지는 명확한 편이니 상황이 좀 낫다. 여당으로 시선을 옮겨 오면 정답이 무엇인지부터 합의가 필요한 것 같아서 혼란스럽다. 대표적인 게 부동산 대책을 손보겠다는 건데 이미 오른 집값은 잡을 수 없으니 대출이나 좀 더 해주고 세금은 깎아주겠다는 건지, 아니면 집값 안정을 위해 좀 더 노력해보겠다는 것인지, 그도 아니면 그냥 가만히 있겠다는 것인지 알 수 없게 돼버렸다. 백신이나 가상화폐 논란도 따지고 보면 마찬가지다.

왜 이런 상태가 된 것일까? 답을 ‘하던 걸 계속 하자’와 ‘시류에 편승하자’란 양자택일에서 찾으려 하기 때문이다. 전자는 정체성 문제이고 후자는 득표 전략의 문제이다. 그래서 좀 손해를 보더라도 정체성을 지키자는 주장, 정체성을 훼손하더라도 표심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는 주장이 부딪치며 중간 정도에서 절충해 어정쩡하게 있는 결과로 이어지고 있는 셈이다.

문제는 이 구도 자체가 허상이라는 거다. 조국 수호와 윤석열 쫓아내기, 김어준 구하기가 여당 ‘정체성’의 전부일까? 지금은 어떨지 모르지만 과거엔 아니었다. ‘정체성’은 어느새 변질되었다. 여기서 ‘어떤 관점’이 아닌 ‘다른 관점’은 애초 여당의 정체성이 처음부터 그랬다는 것이다. 그런 주장도 가능하지만, 어쨌든 앞으로의 희망을 논하려면 이걸 되돌리는 게 먼저다.

추미애 전 법무부 장관 (사진=연합뉴스)

물론 서울시장을 배출한 야당이 TBS와 김어준 씨를 공격하는 것은 과도하다. 언론의 자유를 위축시킬 수 있다.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김어준 씨가 방송을 통해 한 모든 일들, 가령 틀린 주장을 해놓고 이를 바로잡지도 않고 그에 대한 책임도 지지 않는 것 등이 정당화 되는 것은 아니다. 여기서 정답은 언론을 정치권력이 흔들어서는 안 된다는 취지로 야당의 공격을 비판하면서도 잘못된 것에 대해선 분명한 비판적 태도를 취하는 것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추미애 전 장관과 일부 전당대회 출마자 등 의원들 덕에 김어준 씨 문제는 ‘정체성’ 논란이 돼버렸다. 다른 언론들은 상업주의에 경도돼 편향됐으나 그나마 김어준 씨 방송이 진실을 말하고 있다는 식의 현실 인식은 과연 이들의 상식이 다른 이들의 그것과 같은 것인지를 의심케 한다. 기성 언론이 정파적으로 편향돼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김어준 씨 방송은 또 다른 의미의 편향일 뿐 모범적 저널리즘이라고 볼 순 없다. 그런 차원에서 추미애 전 장관 등의 주장은 “우리 편이니까 방어해야 한다”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갖지 못한다.

이걸 과연 몰라서들 하는 말일까? 아니라고 본다. 추미애 전 장관도 대권을 꿈꾼다고들 하는데, 다들 자기 자신이라는 정치적 상품이 먹힐 ‘시장’을 냉정하게 판단한 결과가 아닌가? 물론 정치인은 원래 그런 존재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러한 단세포적 욕심이 한국 정치를 망치고 있다. 이제 깨달을 때도 됐는데, 기대하기는 어려운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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