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스=조항제 칼럼] 수신료, 정확하게 ‘텔레비전수신료’는 한국 헌법재판소의 결정에 의하면 ‘공영방송이라는 특정한 공익사업의 경비를 충당하기 위한 특별 부담금’이다. 전기요금에 병산해서 한전이 대리 징수하는데, 액수는 ‘수상기를 소지한 자’(사실상 가구)에 한 달에 2,500원, 연간 30,000원이 부과된다.

한국의 수신료가 특이한 이유는 이 액수가 41년 이전인 1980년에 책정되어 지금까지 단 한 차례도 인상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같은 기간 수신료를 징수하는 다른 나라의 방송들은 많게는 3배에서 대체로 2배 이상 인상했고, 아무리 인상률을 낮춰 잡더라도 도무지 정상적인 일이 아니다.

수신료가 이처럼 기록적인 정체를 벗어나지 못한 가장 큰 이유로는 1980년대 벌어진 ‘시청료 거부운동’의 영향을 꼽을 수 있다. 주지하다시피 5공하의 시청자들은 체제의 압제와 KBS의 노골적인 편파성에 ‘안보기’와 ‘안내기’로 저항했다. 당초에는 ‘시청’이라는 능동적인 의미를 지녔던 이름(‘시청료’)이 그저 ‘받을’ 뿐인 수동적 ‘수신료’로 바뀌는 데에는 바로 이런 안보기와 안내기 운동이 크게 작용했다.

이미지 출처 게티이미지뱅크

이런 저항이 정치적으로 큰 의미를 지닌다는 건 명약관화할 것이다. 그러나 무소불위의 당시 체제를 감안해 볼 때, KBS에만 책임을 묻는다는 건 다소 가혹하다. 시청자들도 이 점을 어느 정도는 알았던 듯하다. 민주화 이후, 수신료가 전기료에 병산되면서 완전히 강제화된 것에는 묵시적 긍정을 보냈기 때문이다. 노조를 만들고 제작 거부를 하는 등 KBS가 나름으로 노력한 점도 이런 긍정에 보탬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후로도 수신료는 전혀 인상되지 않았다. 예기치 않게 IMF 위기가 발생하면서 가계가 급속히 축소되었고, 유료방송(케이블TV) 시대가 열리면서 이 분야 지출이 크게 늘어났기 때문이다. 디지털화를 하면서 채널을 늘렸다면 기회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채널을 늘리기보다 화질을 높이는 쪽을 택했다. 수상기가 바뀌고 화질은 좋아졌지만, 공영방송의 채널 수는 그대로여서 시청자들을 설득시킬 명분이 별반 크지 않았다.

그러나 이들 모두보다 큰 이유는 여야가 교차하면서 방송을 계속 지배하려 했던 ‘정치적 후견주의’일 것이다. 보수는 보수대로 또 진보는 진보대로 집권세력이면 모두 방송을 놓아주지 않았다. KBS 사장의 임명을 둘러싼 극한 갈등은 이를 웅변해주는 증표라 할 수 있다. 양자 모두 나름의 이유는 있었다. 그러나 그로 인해 수신료는 상대에 트집을 잡는 일종의 볼모가 되어버렸다.

그래도 정말 방송에 돈이 없었다면 수신료는 인상되었을지 모른다. 행인지 불행인지 몰라도 KBS를 비롯한 한국의 방송에는 모두 광고비가 있었다. 특히 KBS 2TV는 상업방송과 다를 바 없는 광고량을 소화했다. 수신료는 인상되지 않았지만 광고가 꾸준해 방송들의 경영 성적은 나빠지지 않았고, 방송인들 역시 상대적으로 높은 복지를 누릴 수 있었다. 최근 문제가 된 높은 연봉도 이에 기인한다.

1987년 민주화와 1997년의 정권 교체 이래 한국의 방송정책에 사회적 합의가 있다면 아마도 그것은 제대로 된 공영방송의 수립일 것이다. 정치와 시장에 독립적인 공영방송이야말로 한국방송의 이상이다. 수신료는 이런 공영방송에 최적인 재원이다. 물론 공영방송이라 해서 모두 수신료에만 의존하지는 않는다. 한 조사에 따르면, 공영방송이 있는 41개국 중 21개국에만 수신료 제도가 있다. 숫자로는 반 정도이지만, 자국 내 방송 지위는 비수신료-공영방송이 상대가 안 된다. 수신료는 그만큼 인기 있고 자격 있는 공영방송의 징표 같은 것이다.

지리적으로는 대부분 서부 유럽에 있는 이 나라 공영방송들의 수신료는 대체로 우리의 8〜10배에 달하는 엄청난 액수다. 물론 전체적인 부도 우리보다 높은 나라들이고, 공영방송이 제공하는 서비스도 우리보다 많다. 그러나 이들 나라에도 수신료 저항이 있고, 매번 인상할 때마다 큰 진통을 겪는다. 수신료를 받기 위해 공영방송들은 사력을 다해 프로그램을 만들고, 긴축 경영을 일상화하며, 우수한 인력을 채용하기 위해 노력한다. 이런 노력이야말로 공영방송을 공영방송답게 만든다.

우리도 이제 이런 선순환제도를 정착시켜야 한다. 지난 41년간의 뼈아픈 경험과 격변하는 방송환경을 거울삼으면 안 될 것도 없다. 먼저 미래의 방송에서 방송의 공공성을 어떤 가치로 삼을지, 공영방송의 지위와 영역을 어느 정도로 인정할지에 대해 다시 합의하자. 이미 목도하다시피 지금의 환경은 구래의 방송 개념이나 용어를 계속 사용하는 것이 이상할 정도로 탈방송의 방향으로 가고 있다. 이미 지상파방송의 지위는 급전직하했으며, 낮은 수신료를 보전해주었던 광고비 역시 급감하고 있다. 시청자들의 주미디어가 텔레비전수상기가 아닌지도 오래되었고, 지불 액수나 의도도 이전과 완전히 다르다. 지난 10년간 판이 완전히 바뀐 것이다.

공공성에 대한 합의가 잘 이루어진다면, 다음 얼개가 필요한데, 수신료는 이에 해당한다. 시청자가 직접 지불하는 수신료는 상방 경직성이 강하다. 올리는 데 한계가 있다는 뜻이다. 특히 지금의 시청자들은 이 분야의 지출이 과거에 비해 훨씬 많이 늘었다. 과거에는 무료가 보편이었지만, 지금은 오히려 유료가 보편이 될 지경이다. 이런 가운데 잘 보지도 않는 방송에 지출액을 늘리는 것은 설사 절대액수가 크지 않더라도 자칫 화약을 지고 불 속에 뛰어드는 일이 된다. 정치인들이 극구 손사래를 치는 게 이해가 안 가는 게 아니다.

그래서 앞의 합의가 좀 더 깊으면서 정밀해야 한다. 방송사와 시청자, 주무 부처, 그리고 여야가 모두 모여 공영방송과 수신료의 미래에 대해 논의해야 한다. 이제는 수신료를 잘해서 받는 훈장(결과)이 아니라 변화를 유인해내는 계기(원인)로 삼아야 한다. 공정성 같은 정치적 문제나 비효율 같은 경제적 문제도 모두 이 테이블에서 다루도록 하자. 더 이상 과거에 머물러선 더 중요한 가치를 아예 잃을 수도 있다는 절박감을 갖자. 다시 주저앉기에는 너무 이유가 없고, 너무 여유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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