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들어 가장 박진감 넘치는 드라마가 나타났다. 바로 SBS 수목드라마 <뿌리깊은 나무>다. 이 작품은 조선 세종 시대를 그린 사극이다. 올해 초부터 전개됐던 로맨틱코미디 열풍에 이어, 중후반부엔 사극 열풍이 진행되고 있는 중이다. <뿌리깊은 나무>는 현재 사극 열풍의 정점을 찍고 있으며, 이대로 마무리가 잘 된다면 아마도 올해 방영된 드라마 전체를 통틀어서 가장 뛰어난 작품이 될 것으로 보인다.

통상적으로 드라마는 주부들이 집안일을 하다가 힐끗힐끗 봐도 흐름을 따라가는 데에 큰 무리가 없는 수준으로 만들어진다. 그것이 스크린에 온전히 집중해야 하는 영화와 TV 드라마의 큰 차이다. 따라서 드라마는 웬만큼 재미있다고 해도 조금씩은 늘어지는 구석이 있게 마련이다.

또, 영화는 일부러 시간을 내서 능동적으로 보러 가는 것임에 비해 드라마의 시청은 생활 습관과 관계가 깊다. 생활리듬상 보게 되면 보는 것이지, 굳이 드라마를 보기 위해 생활을 조정하지는 않는다는 뜻이다.

아주 가끔씩 이런 드라마의 일반적 특성에서 벗어나는 괴작들이 탄생한다. 대표적으로 <모래시계>가 그랬다. 이 작품은 잠시도 눈을 뗄 수 없었다. 당시 사람들은 이 작품을 보기 위해 생활패턴까지 조정했다. <모래시계>가 잘 만든 영화에 필적할 만한 완성도와 주제의식을 보여줬기 때문이었다.

2011년엔 <뿌리깊은 나무>가 그런 괴작으로 기록될 것 같다. 이제 겨우 중반일 뿐이지만 벌써부터 올해 최고작으로 예측하는 것은, 만듦새가 그만큼 뛰어나기 때문이다. 최근 여러 사극들이 방영됐지만 <뿌리깊은 나무>는 그 사극들 전체를 단연 압도하고 있다.

압도적인 연기력

<뿌리깊은 나무>는 사극판 <나는 가수다>를 보여주고 있다. 사람들은 <나는 가수다> 출연 가수들의 압도적인 역량에 깜짝 놀랐었다. 그래서 '신들의 경연'이라는 말까지 나왔다. 여타 음악프로그램들을 보다가 <나는 가수다>를 접하면, 그 차원이 다른 실력에 가슴까지 후련해졌다. <뿌리깊은 나무>의 주요배우들이 그렇다.

이 작품의 초반을 장식한 건 백윤식과 송중기의 불꽃 튀는 대립이었다. 백윤식은 친족과 처족, 사돈까지 도륙내는 태종의 카리스마를 그대로 재현했다. 꽃미남 유망주라고만 여겨졌떤 송중기는 의외로 백윤식에게 눌리지 않는 존재감을 보여줬다.

여기에 장혁이 가세했다. 장혁에게서 풍기는 '짐승남의 포스'는 이 작품에 뜨거운 숨결을 불어넣었다. 장혁은 <추노>에 이어 처절한 민중 영웅 캐릭터의 대표 배우로 자리잡을 기세다. 장혁의 곁에 포진한 북방 출신 군관과 천민들도 이 작품을 생생하게 만들고 있다.

그리고 한석규! 세종대왕 역할에 한석규가 돌아왔다. 아버지로 인한 트라우마에 몸부림치며, 백성을 무시하고 명나라만 섬기려는 사대부들의 타성에 대적하며, 생을 바쳐 조선의 문물을 정비하고자 전전반측하는 세종대왕. 그저 인자하기만 한 대왕이 아니라 상처와 열정과 분노, 그리고 광기까지 간직한 그런 세종이다. 한석규는 세종대왕을 완벽하게 표현하며 시청자에게 육박해온다.

배우들이 이렇게 열연하는데 작품이 안 될 리가 없다. <뿌리깊은 나무>는 모처럼 주요 배우들이 마주 보고만 있어도 박진감이 느껴지는, 그런 연기력의 스펙타클을 보여주고 있다. 최근 사극에선 이런 장면들을 보기 힘들었다.

<계백>에선 제2의 미실이라던 오연수가 기대를 저버렸다. 남녀주인공인 이서진과 송지효도 대사가 시원시원하게 들리지 않는다. <무사 백동수>의 주인공인 지창욱도 대사에 힘이 없었다. 그의 연인이었던 신현빈도 마찬가지다. 그렇기 때문에 박진감이 살아나지 못했다. 반면에 <광개토태왕>에선 배우들이 시종일관 소리를 질러서, 힘은 느껴지지만 감정의 세밀함이 부족했다. 이러던 차에 <뿌리깊은 나무>의 연기는 마치 <나는 가수다>처럼 후련함을 안겨주고 있다.

탁월한 완성도

연기력에서 끝이 아니다. <뿌리깊은 나무>는 작품 자체의 완성도에서도 압도적인 차이를 보여준다. 최근 인기를 모았던 <공주의 남자>는 <계백>이나 <무사 백동수>와는 달리 젊은 남녀 주인공들이 모두 안정적인 연기를 보여줘서 눈길을 끌었다. 하지만 극 자체는 통속적인 멜로물에서 벗어나지 못했었다. 게다가 수양대군과 김종서를 선악구도로 나눈 것도 진부했다. 배우들은 나무랄 데 없었으나 작품이 평범했던 것이다.

<뿌리깊은 나무>는 다르다. 빛나는 배우에 비범한 작품이다. 일단 호흡이 빠르다. <계백>, <무사 백동수>, <공주의 남자>가 일반적인 한국 드라마의 호흡이라면, <뿌리깊은 나무>는 족히 세 배는 더 속도감이 느껴진다.

그리고 치밀하다. 인물과 인물의 대립, 사건의 실타래를 풀어가는 과정이 대단히 촘촘해서 잠시도 긴장을 늦출 수가 없다. 세밀한 전개와 날렵한 편집이 잘 만든 미국드라마를 떠올리게 할 정도다. 미국드라마는 편당 제작비가 우리의 영화 제작비 수준일 정도로 물량이 많이 들어간다. 한국드라마가 그 정도 수준을 따라간다는 건 대단한 성취다.

<뿌리깊은 나무>는 이렇게 치밀한 전개로 지적 쾌감을 안겨주는 동시에, 시각적 쾌감까지 선사해준다. 바로 액션이다. 세종대왕을 그린 사극인데도, 무사나 장군을 소재로 한 여타 사극들보다 훨씬 볼 만한 액션이 나온다. 대중성과 작품성의 행복한 결합이다. 우린 모처럼 괴물 같은 사극을 만났다.

<뿌리깊은 나무>에서 <선덕여왕>과 <추노>가 만나다

<뿌리깊은 나무>는 <선덕여왕>의 김영현, 박상연 작가가 썼다. <선덕여왕>도 미스테리를 풀어가는 치밀한 전개로 찬사를 받았었다. 이 작품에서 그런 치밀함이 그대로 재현됐다. 또 <선덕여왕>에선 덕만과 미실의 정치적 이상 차이에 따른 대립이 치열하게 그려졌었다. <뿌리깊은 나무>에서도 태종과 세종, 그리고 정도전 계열의 정치적 이상이 치열하게 대립한다.

한편 장혁은 이 작품에 <추노>의 기운을 불러들인다. 진짜 민초의 느낌, 그리고 위험한 사내의 내음이다. 궁궐이 주 무대인 역대 사극 중에 이렇게 밑바닥의 느낌까지 담아낸 작품은 없었다. 결국 2009년 최고의 작품이었던 <선덕여왕>과 2010년 최고의 작품이었던 <추노>가 2011년에 <뿌리깊은 나무>에서 만난 셈이다. 이 점이 또 <뿌리깊은 나무>를 올 최고의 작품으로 기대하게 되는 이유다.

문화평론가, 블로그 http://ooljiana.tistory.com/를 운영하고 있다. 성룡과 퀸을 좋아했었고 영화감독을 잠시 꿈꿨었던 날라리다. 애국심이 과해서 가끔 불끈하다 욕을 바가지로 먹는 아픔이 있다.

저작권자 © 미디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