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스=김동찬 언론개혁시민연대 사무처장] 수신료 인상은 오래된 과제다. 여론은 녹록지 않고, 조건은 한층 악화했다. 공영방송 재원 조달과 고비용 구조에 대한 압력은 증가하는 데 반해 공영방송 법제도 개선과 그 실체로서 KBS의 혁신은 제자리걸음이다. 수신료 논쟁은 인상이 먼저냐, 개혁이 먼저냐는 이분법의 구도를 좀처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필자는 수신료가 여전히 공영방송 재원을 조달하기 위한 가장 좋은 모델 중에 하나라고 믿는다. 수신료 인상은 공공서비스를 확대할 수 있는 유용한 방편임이 틀림없다. 하지만 제도적인 규범이나 당위만으로 분담자인 시민들에게 수신료 인상을 강요할 수는 없다. 수신료는 시청자의 신뢰와 자발성에 기초해야 하며, 시민의 미디어 소비 습관에 조응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정당화될 수 있다.

(사진=KBS)

다시 말해, 공영방송에 더 많은 지원을 요구하기 위해서는 수신료를 정당화할 수 있는 구체적인 구조를 가져야 한다. 특히 한국처럼 제도와 실체의 양면에서 모두 공영방송에 대한 신뢰가 낮은 사회에서는 시청자의 자발적 지지를 확보하기 위한 전향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공영방송을 구성하는 요소 전반에 수용자 신뢰 확보를 위한 노력이 반영되어야 하며, 이를 위해 ‘극단적 조치(extreme measures)’도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EBU, 2020) 이러한 노력 없이 강제적 방식으로 수신료 인상을 시도/성공할 경우 도리어 강한 저항을 불러일으켜 공영방송 제도 자체에 대한 불신을 가중할 위험이 크다.

수신료 인상과 병행하여 또는 그와 상관없이 수신료 징수와 사용(배분)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는 얘기다. 이런 인식에 기초하여 이 글에서는 시민들이 공영방송의 수신료 사용과 프로그램 편성의 의사결정에 직접 참여하게 함으로써 수용자 선택을 강화하는 방안을 검토하려고 한다. 이 방안은 보편성의 측면에서 수신료 분담 의무를 유지하되, 그들이 납부하는 수신료의 일부를 어떤 서비스나 프로그램에 투여할지 선택할 기회를 부여한다.

이것은 단지 시민의 권리 강화를 위한 방편이 아니다. △공영방송 편성에 대한 정치적 압력에 대항하여 시민에게 권한을 부여하는 것 △수동적이고 소극적인 청중을 그들이 좋아하는 공영방송 프로그램을 돌보는 더욱 충실하고, 책임감 있는 시청자로 변화시키는 것 △전통적인 공영방송의 가치를 활성화하고, 현대 디지털 문화의 전형적인 참여의 차원으로 업데이트하는 것(Bonini&Pais, 2017)을 목표로 한다. 이를 통해 공영방송의 필요성을 다양한 차원에서 인식하고 경험할 수 있는 경로를 확보하기 위함이다. 수신료의 정당성 위기를 맞아 공영방송과 시청자의 새로운 관계 형성에 주목하고, 수신료를 매개로 한 시민참여의 가능성을 탐색하는 데 목적을 둔다.

시청자와 새로운 관계 맺기를 위한 출발점

이 방안은 “시민들이 보다 좋은 환경에서 (공영방송과) 수신료 제도를 살피면 어떻게 될까?”라는 생각에서 출발한다. 정당성의 원천으로써 심층적인 공공토론과 협의의 효과에 주목하는 것이다. 이러한 방안이 효과를 내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준비단계가 선행되어야 한다.

첫째, 공급자 편의주의에서 벗어나기 전기료에 붙여 수신료를 부과하는 통합징수 방식의 개선, 수신료 회계분리 요구에 대한 완강한 거부는 공급자 편의주의의 산물이다. 수용자와 미디어 환경 전반이 파편화되고 디지털화하는 ‘네트워크 사회’와 연결하기(Connecting to a Networked Society) 위해서는 ‘생산자가 제공하는’ 서비스 중심의 단방향 논의구조를, 수요자/사회와의 상호작용을 통한 양방향으로 전환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공영방송은 폐쇄적이거나 요새 같은 기관으로부터 개방적이며, 사람·공동체·문화 단체 및 시민 사회의 네트워크와 연결되는 기관으로 전환되어야 한다.❞(EBU, 2020)

둘째, 경청의 중요성을 인식하기 각종 미디어 기술과 서비스의 발달을 통해 시민들은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표현의 도구를 사용하고 있다. 이러한 소통환경에서 청취자와 긴밀하게 연결되고, 특별한 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설명하고, 설득하는 기술보다 경청(듣기)의 역량을 갖추는 게 더욱 중요하다. 경청은 “미디어 풍부성이 오히려 소통을 방해하는 커뮤니케이션의 역설 현상”(한선, 2019)을 극복하기 위해 공영방송이 가져야 할 새로운 역할이기도 하다. 수신료 역시 공청의 형식적 한계를 넘어서는 경청의 과정을 거쳐 논의해야 한다.

셋째, 권한을 부여하고, 책임을 공유하기 지금까지 공영방송은 예산과 편성의 결정에 관한 시민의 관여를 불필요하고, 불편한 것으로 치부해왔다. 그러나 공영방송 사장을 시민이 평가하고, 선출하는 시대에 시청자의 참여와 협력은 공영방송의 가치를 증명하기 위한 필수불가결한 요소가 됐다. 수신료 용처에 대한 의사결정 참여는 시민의 자발성과 지불의사를 높이는 데 기여할 수 있다.

시청자 참여예산 또는 시민 편성제 제안

공영방송에 대한 시민참여를 활성화하기 위해서는 수신료 운용 및 프로그램 편성에 대한 구조적 참여를 포함해야 한다. 우리가 상상하는 모델의 하나는 시청자참여예산제이다. KBS 집행기관의 수신료(예산) 편성 권한을 시청자와 공유하여 시청자의 공공서비스 수요와 선호, 주요 서비스에 대한 의견을 반영하는 것이다.

참여예산제는 이미 서울시를 비롯한 여러 지방자치단체들이 도입하여 참여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중요한 수단으로 활용하는 제도이다. 서울시의 시민참여예산 규모는 700억 원(숙의예산 6천억 원)에 달하며, 경기도는 2021년 예산에 154억여 원을 반영했다.

이 모델을 수신료 예산편성에 적용하여 월 2,500원 중 1%(25원)만 할당하더라도 연간 70억여 원 규모를 시청자 참여예산으로 운용할 수 있다. 시청자 참여예산은 서울시(또는 지자체) 모델을 따라 사업 공모와 심사를 거쳐 이사회가 의결하는 단계로 이루어질 수 있다. 또는 이사회가 지명한 시민, 전문가, 단체들로 구성된 시청자예산위원회에서 시청자가 선택할 프로그램과 서비스의 목록을 작성한 후 KBS앱을 이용한 모바일 투표로 우선순위를 정하는 방식을 검토할 수도 있다. 다양한 디지털 기술을 접목한 참여의 설계가 얼마든지 가능할 것이다.

중요한 건 수신료 과정에 참여하고, 협의하는 과정을 통해 공영방송과 시민이 상호 책임 있는 결속을 이루는 것이다. 서울시 시민참여예산제에 참가하는 시민의 규모가 전자 투표 참가자, 사업제안자, 예산학교 회원, 예산위원 등을 포함해 연간 15만 명에 이른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이들은 전자 투표에서부터 공공토론과 협의, 숙의에 필요한 예산(학교)교육을 경험하며 민주시민의 역량을 강화하고, 권한과 책임을 공유한다. 이런 경험은 공공서비스미디어와 그 재원의 운영 과정에도 필요한 것이다.

또 다른 모델은 시민편성제이다. 이것 역시 완전히 새로운 발상은 아니다. 이미 방송법은 시청자위원회에 방송편성에 관해 의견을 제시하고, 시정을 요구할 수 있는 법적 권한을 부여하고 있다. 그러나 시청자위원회는 사후 평가만 할 뿐 공영방송이 제공하는 서비스 포트폴리오 구성의 결정에는 직접 참여하지 않는다.

이런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tbs는 2020년 「시민제안 오픈 테이블」 사업을 시행했다. 이 사업은 △시민참여·협력프로그램 기획안 공모 △TBS 제작진과 전문가가 참여하는 선정위원회 심사 △시민제안 오픈테이블 운영 △시민제안 기획안 반영 계획 수립 △제작 및 편성의 단계를 거쳐 시행되었다. 이를 통해 <노인 이야기 들어주는 동네 예술가>, <서울을 만드는 시민의 일상>, <아빠 육아 스토리-아육스> 등 3편이 방송되었다.

시민편성제는 시민의 아이디어를 방송으로 만드는 기획을 넘어 공영방송의 편성계획 수립이나 평가 과정 전반에 적용할 수 있다. 예컨대 KBS 음악 프로그램 편성을 논의한다고 가정해보자. 논의에 참여한 시민들은 우선 KBS가 현재 편성하고 있는 프로그램 목록을 검토할 것이다. <표>와 같이 KBS는 10·20대(뮤직뱅크), 30·40대(유희열의 스케치북), 50대 이상(가요무대) 등 전 세대를 커버하는 편성목록을 가지고 있으며 장르적으로도 전통가요, K-POP은 물론 국악, 클래식, 순수예술에 이르는 다양한 프로그램을 편성하고 있다. 전국노래자랑으로 대표되는 시청자 참여 프로그램이 많은 것도 특징이다.

편성목록을 검토한 시민편성위원들은 KBS가 수행하는 공적역할을 구체적으로 확인한 뒤 유지·개편·폐지하거나 새롭게 추가해야 할 프로그램 목록을 제안할 수 있다. 시청자가 만족할 수 있는 품질을 유지하기에 적정한 제작비가 투입되는지 살펴보고 수신료 사용과 배분에 관한 의견도 제시하게 될 것이다.

이런 과정을 통해 시청자들은 상업방송과 차별화되는 공영방송의 전통적 필요성을 인식할 수 있다. 방송을 넘어 디지털플랫폼을 활용한 공공서비스의 대안적 필요성을 체감하게 될 수도 있을 거다. 시청자들은 이제 그들이 원하는 콘텐츠뿐만 아니라 타인이 필요로 하는 공영방송 프로그램을 존중하고, 그것을 돌보는 일에 더욱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다.

시민과 협력하여 위기를 돌파하기

시청자참여예산과 시민편성제는 많은 단점을 포함하고 있으며, 면밀한 검토가 필요한 제안이다. 수신료 정당성의 위기를 해소할 수 있는 완전한 해법도 아니다. 그러나 필자는 또한 공영방송 제도가 처한 심각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수신료에 대한 선택권과 관여도를 시민이 체감할 수 있는 수준으로 높여야 한다고 강조하고 싶다. 다시 말하지만 ‘극단적인 조치’도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

필자는 KBS가 “숙의 민주주의 방식으로 수신료 인상을 설득해나간다”는 데 전적으로 찬성하지만, 이와 함께 ‘수신료의 운용을 숙의 민주주의 방식으로 바꾸는 일’을 선행(또는 병행)해야 한다고 믿는다. 공영방송의 미래를 위해 더욱 중요한 것은 수신료 인상이 아니라 신뢰의 향상이기 때문이다. 전지적 시청자 시점에서 공영방송 이용자 경험을 변화시켜야 한다.

* 이 칼럼은 언론연대 뉴스레터에 게재한 글을 일부 수정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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