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스=이정희] “하루가 너무 길어” <나빌레라>의 주인공 덕출(박인환 분)이 편의점 배달원으로 일하는 후배에게 툭 던진 말이다. 노년을 이보다 더 잘 설명할 말이 있을까?

심덕출 씨는 한국전쟁 때 태어났다. 쌀가게 점원이었던 아버지는 덕출이 몸 쓰는 일 대신 펜쓰는 일을 하기를 원했다. 하지만 덕출은 77년 집배원 공채 시험에 합격해 평생을 우편배달원으로 살다 퇴직했다. 최해남(나문희 분)과 결혼해 세 아이를 낳고 가장으로 성실하게 살았다. 아이들도 다 컸고 은퇴도 했다. 이제 일흔, 그런데 하루가 너무 길다.

하루가 긴 덕출은 가끔 요양원을 찾았다. 친구 교석이 있기 때문이다. 처자식도 들여다보지 않는 교석을 덕출은 찾아간다. 그런데 이제 그마저도 갈 수 없게 되었다. 평생 배를 만들었지만 정작 자신의 배 전진호를 완성하지 못했다던 친구가 어느 날 밤 자신의 방 창문 앞에 펼쳐진 바다에 종이배 '전진호'와 함께 떠났기 때문이다.

tvN 월화드라마 <나빌레라>

‘늙으면 이별도 익숙해지니까’, 친구를 보냈다. 하지만 마지막 만났을 때 친구가 했던 말이 덕출의 가슴에 남는다. “덕출아, 너는 가슴에 품은 게 있냐? 지금이다. 아직 안 늦었어. 다리에 힘 있고 정신 말짱할 때 하고 싶은 거 있으면 해!”

“저는요, 한번도 해보고 싶은 걸 해본 적이 없습니다.”

친구의 장례식장에서 그를 끌어당긴 음악 소리, 그곳에서 덕출의 가슴이 다시 뛰었다. 발레를 하는 채록(송강 분)을 보며 자신도 다시 한번 훨훨 날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발레를 하기로 했다. 나이 일흔, 너무 늦었을지 몰라도, 이제라도 하고 싶은 걸 해보고 싶다.

일흔, 꿈이 시작되었습니다

3월 22일 첫선을 보인 tvN 월화드라마 <나빌레라> 원작은 카카오 웹툰을 통해 인기를 끌었던 작품이다. Hun 글, 지민 그림으로 2016년부터 연재된 웹툰 <나빌레라>는 '발레'라는 생소한 소재를 통해 새롭게 시작하고자 하는 70대 노인과 방황하는 20대 청년을 조우케 한다. <나쁜 녀석들>, <청일전자 미쓰리>의 한동화 피디와 <터널>의 이은미 작가가 의기투합했고, 덕출 역에 박인환 배우와 그의 아내 해남에 나문희 배우가 합류했다. 이미 두 배우의 출연만으로도 <나빌레라>의 정서적 온도가 전달된다.

tvN 월화드라마 <나빌레라>

드라마는 일흔의 하루를 힘겹게 보내는 덕출의 시점에서 시작된다. '하루가 너무 길다'는 덕출의 대사는 나이 든 사람들이라면 누구라도 공감할 것이다. 힘들다 하면서도 가족을 위해 무언가 해야 할 일이 있던 시절에서 '방출'된 사람이라면 공통적으로 느끼는 막막함이 아닐까 싶다.

'저는요. 한번도 해보고 싶은 걸 해본 적이 없습니다'까지는 아니라도 결혼해 자식을 낳아 키우는 시간은 삶의 방점이 늘 가족에게, 나 이외의 누군가에게 찍혀져 가는 시간이다. 그런데 자식들을 다 키우고 나면 그 가족에 찍혀졌던 방점이 방황하기 시작한다. 더구나 직장에 다니며 가장으로 살아왔던 아버지의 자리는 '정년퇴직'과 함께 삶의 또 다른 국면으로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떠밀려 가게 된다.

누군가를 위해 살아왔던 그 삶의 방식이 더이상 여의치 않은 상황, 그게 바로 노년의 가장 큰 숙제가 아닐까. 물론 <나빌레라> 속 덕출의 아내 해남처럼 여전히 다 큰 자식들을 품고 살아가는 이들이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건 정말 품 안의 자식이 아니라, 그저 품 안의 자식이라 ‘여기고’ 싶은 경우가 많다. 덕출의 도전만큼, 자식과 남편까지 끌어안고 사는 해남의 행보도 그래서 궁금하다.

tvN 월화드라마 <나빌레라>

우리는 살아가며 온전히 나로 서기를 갈망하지만 막상 ‘온전히’ 나밖에 존재하지 않는 시간이 다가오면 두렵다. 왜냐하면 '나로' 살아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나빌레라>의 덕출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그는 남아도는 시간을 주체하지 못해 나이 70에 후배가 하는 패스트푸드점 배달 일이라도 하고자 한다.

그런 덕출에게 죽어가던 교석이 메시지를 던졌고, 발레를 하는 채록이 영감을 깨운다. 홀로 발레를 보러 다니고 은퇴한 발레리노 승주의 팬이라 할 만큼 발레를 좋아했던 덕출이 관객의 자리를 박차고 '무대'에 서고자 한다.

왜 ‘발레’였을까? 70대의 발레는 덕출의 말대로 시작부터 ‘지고 들어가는’ 게임이다. 우리 사회는 승산 있는 싸움, 성공, 쟁취가 화두가 되는 사회다. 덕출이 하겠다고 나선 발레는 그래서 ‘역설적으로’ 그런 사회의 링에서 내려온 노년의 삶은 어떠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이 된다.

tvN 월화드라마 <나빌레라>

덕출의 세대는 평생 무언가를 해보고 싶다고 생각하는 것조차 '언감생심'이었던 세대일 것이다. 어디 덕출뿐이랴. 결혼해 자식을 낳고 가정을 꾸려온 많은 사람들 역시 자신이 하고 싶은 것에 대해 한편으로 밀어두며 살아가지 않을까.

그런데 자식 다 키우고 퇴직을 하고 본의 아니게 홀로 서며 '자신'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시간이 다가온다. 남은 노년의 시간, 오로지 나만이 남겨진 시간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라고. 늙은 사람들이 보내는 ‘나머지 시간’이 아닌, 주체적으로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질문을 드라마는 던진다.

그런 의미에서 드라마 <나빌레라>는 길고 긴 시간을 '나'로서 살아가야 하는 노년에 대한 유의미한 숙제를 안긴다. 과연 이제부터 나는 무엇을 하며 남은 인생을 살아갈 것인가? 나는 무엇을 하고 싶은가? 이 질문에 발레를 보는 덕출처럼 당신의 가슴이 설레고 뛰기 시작한다면 그래도 희망적이지 않을까? 그 희망의 과정을 12부작 <나빌레라>가 함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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