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우리 집은 안양이다. 작년 말부터 지하철로 출퇴근할 때면 역 부근에서 실종자를 찾는 벽보와 현수막을 볼 수 있었다. 실종자는 두 명의 어린 여자아이였다. 나와는 관계없는 일이라며 별 관심을 갖지 않았던 게 사실이었다.

2. 벽보가 지하철 역사의 일부로 인식될 때쯤, <추격자>가 개봉했다. 유영철 사건을 다룬 이 영화는 평단과 관객의 전폭적인 지지를 업고 승승장구했다. <추격자>로 장편 신고식을 치른 나홍진 감독은 한국영화의 기대주로 찬사를 받았고, <추격자>는 412만 명의 관객을 동원하며 올해 최고의 흥행작에 이름을 올렸다.

3. 지난 3월 11일 오후, 경기도 수원의 야산에서 암매장된 여아의 시신이 향토방위훈련중인 예비군에 의해 발견했다. 시신은 작년 12월 안양에서 실종된 이혜진양으로 확인됐다. 수사 초기, 경찰은 수사본부 수사관 70여명과 전경 6개 중대 480여명, 수색견 3마리를 동원했지만 아이들의 흔적조차 찾지 못했다. 예비군의 수색능력은 가히 상상을 초월한다.

▲ 영화 '추격자'
4. <추격자>에서 중호는 홀로 범인을 추격한다. 경찰도, 이웃도 중호에게 어떤 도움을 주지 못한다. (경찰의) 무능함도 문제지만 (시민들의) 무관심은 더 큰 문제다. 벽보와 현수막을 조금만 더 관심 있게 봤다면. 혹시 그 아이들을 어디선가 본 적이 있었다면. 나의 작은 관심으로 인해 아이들이 시신으로 발견되지 않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서슬 퍼런 죄책감이 온 몸을 옭죈다.

5. 안양 초등학생 유괴·살해사건을 놓고 경찰과 유력 용의자 정씨가 벌이는 행각은 <추격자>의 그것과 비슷하다. 명백한 물증을 확보하지 못해 자백에 의존해야 하는 경찰과 이를 교묘하게 이용하는 용의자. 만일, 경기 서남부지역에서 지난 4년 사이 발생했던 미제의 여성 실종사건들(2004년 7월 군포 전화방 도우미 실종사건, 2006년 12월 군포와 수원에서 열흘 간격으로 발생했던 3건의 노래방 도우미 연쇄 실종사건, 2007년 1월 수원 여대생 실종사건)과도 정씨가 연관이 있다면? 현실은 영화보다 더 드라마틱하다.

6. 지난 3월 18일, 군자8교~6교 사이 지점에서 수색작업 중 우예슬양의 것으로 추정되는 토막 난 시신이 발견됐다. 수사본부는 19일 시신의 나머지 일부를 찾기 위해 정씨가 시신 유기장소로 진술한 시흥시 시화공단 내 군자천에 대해 수색작업을 재개하기로 결정했다. 전, 의경 1개 중대 등 150명과 한국수자원공사, 소방서, 자원봉사단체 등 200여명을 동원할 예정이란다. 예비군을 투입해야하지 않을까? <추격자>에서 살인마를 잡은 중호도 '전직' 형사다.

▲ 영화전문포털 '조이씨네' 서정환 편집장
7. 화성연쇄살인사건, 이형호 유괴살해사건 등 미제사건은 물론이고, 범인이 검거된 사건도 우리의 가슴을 무겁고 아프게 만들기는 마찬가지다. '미치도록 잡고 싶었다'는 <살인의 추억>의 외침도, '현상수배극'을 표방한 <그놈 목소리>의 절박함도, '놈을 잡은 건 경찰도 검찰도 아니었다'는 <추격자>의 울분도 매한가지다. 참혹한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이 영화들이 300만 이상의 관객을 동원하며 이슈가 될 수 있었던 이유는, 영화의 재미와 함께 현실을 돌아보고 각성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주었기 때문이다. 비록 그것이 상처 입은 가슴에 또 한 번 생채기를 낸다하더라도, 의미 있는 작업이 되리란 걸 믿어 의심치 않는다. 작가의 진정성이 모순된 현실을 피하지 않고 직시했을 때, 영화는 또 다른 힘을 얻게 된다.

8. 이혜진양을 비롯한, 이유도 영문도 모른 채 끔찍한 고통과 공포 속에서 죽음을 맞이해야했던 많은 희생자와 유가족들의 아픔이 하루빨리 치유되길 바라며,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저작권자 © 미디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