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스=송창한 기자] 한겨레 현장기자 41명이 자사 법조기사가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 쓰였다고 문제를 제기하자 사회부장 사퇴, 편집국장의 후속조처 약속, '이용구 차관 관련 보도' 사과 등이 이뤄지고 있다. 한편에서 한겨레 내부 게시판에 익명으로 '젊은 기자들의 성찰을 바란다'는 제목의 글이 게재됐다.

'한겨레 기자'라는 아이디로 내부 게시판에 글을 게재한 작성자는 "젊은 기자들이 성명에서 말한 '성역 없는 비판의 칼날'이란 표현이 마음에 걸린다. 검찰이 문재인 정부를 상대로 선택적인 수사를 벌이면서 '살아있는 권력 수사'라고 말하는 것이 떠오르기 때문"이라고 말문을 열었다.

한겨레 사옥(사진=미디어스)

글 작성자는 "'성역 없는 비판의 칼날'이라도 아무한테나 마구 휘둘러서는 안 된다. 상대와 상황을 봐가면서 공정하고 균형있게 휘둘러야 한다"며 "그런 거시적이고 신중한 고려가 없는 '성역 없는 비판의 칼날'은 어떤 경우엔 망나니의 미친 칼날이 될 수 있다"고 밝혔다.

작성자는 "여러분은 기사의 내용이나 방향이 데스크들에 의해 일방적으로 결정되거나 지시된다고 비판했다. 그런데 기사의 방향은 현장의 보고와 데스크(부장과 팀장)의 판단을 토대로 해서 편집위원회가 결정하는 것"이라며 "현장에서의 판단이 옳을 수도 있고, 데스크나 편집위원회의 판단이 틀릴 수도 있다. 그러나 결정은 데스크와 편집위원회가 하는 것이다. 그게 우리의 시스템"이라고 강조했다.

작성자는 "만약 여러분이 도저히 동의할 수 없는 기사가 여러분의 이름으로 나간다면 그냥 이름을 빼달라고 하라"며 "그러면 그 데스크는 그 기사를 자기 이름으로 내보내든가 여러분의 뜻에 맞게 고치든가 할 것"이라고 말했다.

작성자는 한겨레가 '파시즘적'이라는 비판을 받는다는 데에 동의하기 어렵다고 했다. 작성자는 "문재인 정부에서 ‘친정부적’이라는 비판을 받을 수는 있다고 생각한다"며 예를 들어 한겨레가 공수처 설치 추진에 찬성하고, 에너지 전환 정책에 검찰수사가 무리하다고 비판하는 것을 '친정부적 태도'라고 볼 수 있느냐고 반문했다.

작성자는 한겨레가 진보적 가치를 추구해왔고, 언제나 개별적인 작은 사실들보다는 더 큰 진실을 추구해왔다면서 "여러분은 한겨레의 저널리즘 원칙에 따라줘야 한다"고 했다. 작성자는 "여러분이 말한 것처럼 '특정 정파·좌우 진영 가릴 것 없이 공정한 잣대로 보도하는 것'은 절반만 좋은 저널리즘"이라며 "여러분이 가치와 방향에 대해서도 공정한 잣대를 들이대고 싶다면 한겨레에서 일하기보다 중도적인 성향의 매체로 옮기기를 권한다"고 했다.

또 작성자는 회사 내 문제점을 다룰 때 신중해야 한다며 "이번 성명이 나오자마자 보수 매체들은 신이 나서 기사를 쓰고 있다. 이번 성명이 또 한겨레의 평판과 독자에 어떤 영향을 줄지 깊이 우려된다"며 "여러분의 선의가 좋은 결과로 이어지도록 신중하고 말하고 행동해야 한다. 선의가 나쁜 결과로 이어진다면 과연 그것을 선의라고 말할 수 있나"라고 물었다.

그러면서 작성자는 "편집국 지도부를 포함한 선배들도 이번 성명을 다시 한번 심각하게 생각해봐야 한다. 젊은 기자들이 제기한 문제들이 타당한지, 타당하다면 한겨레를 어떻게 고쳐나가야 하는지 말이다"라며 "동시에 젊은 기자들도 깊이 생각해보길 바란다. 과연 여러분의 성명이 한겨레에 도움이 되는지, 여러분이 주장하는 가치와 방향이 한겨레에 어울리는지 말이다"라고 했다. 해당 글에는 공감을 표하는 댓글이 달리고 있다고 전해졌다.

지난 26일 한겨레 현장기자 41명은 편집국 국·부장단 성명을 내어 국장단과 사회부장, 법조팀장에게 법조 기사와 관련 사설에 대한 경위 설명을 요구하고 공식 사과와 재발방지책 마련에 나설 것을 촉구했다. 현장기자들은 최근 추미애-윤석열 갈등, 이용구 법무부 차관 폭행, 김학의 불법출국 금지 의혹 등을 다룬 자사 기사가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 쓰여지고 있다고 비판했다.

이에 28일 한겨레 사회부장과 법조팀장은 보직에서 사퇴하겠다는 의사를 표명했다. 같은 날 임석규 한겨레 편집국장은 한겨레 구성원들에게 보낸 이메일에서 "성역을 두지 않고 권력과 자본을 비판해온 한겨레 기자로서 자긍심을 훼손당하지 않으려는 비명 같은 외침이라고 믿는다"며 "그 마음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데서 출발하고자 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임 편집국장은 "머뭇거리다가 때를 놓치고, 더 달라붙어야 할 때 물러서기도 했다. 공정하지 못한 보도도 더러 있었다고 인정한다"면서 "다만 특정 정당, 정치세력을 이롭게 하려는 목적으로 기사를 다루지 않았다는 점만은 분명하게 말씀드릴 수 있다"고 했다.

이어 임 편집국장은 "성명에는 법조 보도에 대한 여러 사례가 나온다. 사내 구성원 중엔 거론된 내용에 견해를 달리하는 분들도 있을 것"이라며 "그렇다고 성명에서 거론된 사례나 세부 내용을 두고 논박을 이어가다 보면 본질을 놓칠 우려가 있다. 구체적 내용과 경위에 대해선 차후 대면 또는 비대면 방식의 간담회 등을 통해 깊이 있게 의견을 교환하는 게 좋을 것 같다"고 했다.

임 편집국장은 "편집국장으로서 현장 기자들의 성명을 무겁게 받아들이며, 공정 보도를 위한 후속 조처를 책임 있게 추진해나가겠다"며 "성명에서 요구한 대로 다양한 형태로 토론단위를 확대하고 보도를 점검하는 자리를 마련하겠다. 현장 기자들의 목소리를 콘텐츠에 충실히 반영할 수 있는 제도와 기구, 조직 등도 조속히 마련하겠다"고 약속했다.

한겨레는 29일 지면을 통해 이용구 법무부 차관 관련 보도에 대해 사과했다. 한겨레는 "사실관계를 충분히 확인하지 않았고 사안의 본질과 정확한 진실을 전달하는 데 미흡했다"고 밝혔다. 한겨레는 지난해 12월 이 차관 택시기사 폭행 사건과 관련해 2016년 서울중앙지검 수사실무상 특정범죄가중처벌법을 적용할 수 없다고 보도했다. 그러나 해당 수사실무의 개정시점은 2013년이었고, 특가법상 관련 조항은 2015년 개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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