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스=고브릭의 실눈뜨기] 성인이라면 연말연시에 아마 이 말을 가장 많이 들었을 거다. 그때 샀어야 했는데...그때 들어갔어야 했는데...코로나 쇼크로 장중 최저점 1,439P를 찍으며 무너질 것 같았던 코스피는 극적 반전에 성공하며 사상 최초로 3,000P 시대를 열었다. 미국에서는 끝 모르고 상승곡선을 그리며 결국 오너인 앨론 머스크를 세계제일의 갑부로 만든 테슬라가 있었다. 디지털 세상에서는 전고점 2만 달러를 아득히 뚫고 5만 달러에 육박한 비트코인의 부활을 목격했다. 수많은 매수 타이밍을 방관만 하며 보냈던 아쉬움과 함께 2021년이 그렇게 시작됐다.

허나 ‘그때’가 다시 돌아와도 주식이나 비트코인에 전 재산을 올인 하는 일은 드물 것이다. 왜냐하면 때(time)의 수식어가 옳고 그른지는 시간이 지나야만 검증 가능하기 때문이다. 언제나 현재를 사는 우리는 지금이 좋은 때(Good time)인지 나쁜 때(Bad time)인지 알 수 없다. 지금의 코스피 지수가 고점인지 저점인지 판단할 수 없듯 말이다.

사프디 형제의 영화 <굿 타임(Good time)>은 제목부터 실패를 암시하고 있다. ‘굿 타임’은 역설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지금이 좋다는 말은 그때는 나빴다는 말이다. 주인공들이 극한상황을 극복하는 일반적인 플롯의 재난 영화를 떠올려보자. 재난이 지나간 뒤의 제목은 없고 가장 나빴던 그때를 주로 사용한다. 반대 상황은 유추하기는 쉽다. 가장 아름답고 찬란한 시절이라는 화양연화까지 갈 것도 없다. 단순히 그때가 좋았다 정도로 말하려면 지금이 나쁜 상황이어야 한다.

영화 <굿타임>

가까이 보면 비극, 멀리서 보면 희극, 더 멀리서 보면 자연 다큐멘터리

<굿 타임>의 상황은 이렇다. 동생 닉 니카스(베니 사프디)는 지적 장애가 있다. 형 코니 니카스(로버트 패틴슨)는 동생을 교육시설에 맡기기보다 함께 은행을 털고 할머니가 있는 버지니아로 가기로 계획한다. 형제는 은행털이에 성공하지만 동생이 붙잡힌다. 형은 경찰의 추적을 받는 동시에 동생의 보석금 1만 달러를 하루 안에 만들어야 한다. 코니는 나이 많은 여자친구 코리(제니퍼 제이슨 리)에게 돈을 빌리려고 하지만 코리의 카드는 지급정지 상태.

설상가상으로 코니는 닉이 구치소에서 싸우다가 다쳐 병원으로 이송됐다는 소식을 듣는다. 위험을 무릅쓰고 경찰들의 눈을 피해 병원으로 숨어든 코니. 붕대로 얼굴을 칭칭 감은 동생을 몰래 빼내지만 힘들게 데려온 남자는 동생이 아니라 생면부지의 마약쟁이 레이(버디 듀레스)였다. 잠시 좌절. 그런데 레이가 솔깃한 정보를 건넨다. 거래하려던 마약을 가까운 놀이동산에 숨겨놨다는 것이다.

이제 코니의 목표는 마약회수다. 야밤에 놀이동산에 침입해 마약을 찾는 데까지는 성공하지만 그 과정에서 경비원을 때려눕히는 바람에 경찰의 포위망이 점점 좁혀온다. 마약을 거래하기로 한 또 다른 약쟁이와도 협상이 원활하지 않다. 요약하면 이렇다. 이 영화는 시작 10분 만에 은행을 털고 15분도 되지 않아 동생이 붙잡힌다. 나머지 85분은 코니의 실패와 판단미스로 채워진다.

코니는 왜 실패하는가? 그때가 좋은 때인지 몰랐기 때문이다. 코니에게는 실패하지 않을 기회가 있었다. 영화의 첫 장면은 전문가와 상담하는 닉의 모습이 그려진다. 이때 코니가 들어와 전문가에게 다짜고짜 욕설을 퍼붓고 동생을 끌고나간다. 이어지는 질문. 코니는 왜 동생을 교육시설에서 데리고 나갔나? 알 수 없다. 영화 내에서는 살짝 과거의 어떤 사건을 암시하지만 자세한 상황은 설명되지 않는다.

수시로 ‘세상에는 우리뿐이다, 사랑한다‘고 말하며 도움은커녕 오히려 걸리적거리는 동생과 굳이 함께 은행을 터는 걸로 보아 코니가 닉을 지극히 아낀다는 건 알겠다. 그런데 왜 그렇게 아끼는지는 모른다. 단지 피를 나눈 형제라서? 충분한 대답이 되지 못한다. 좋은 때를 모른다는 건 바꿔 말해 결국 이해가 깊지 않다는 말이다. 코니가 닉의 장애정도를 이해했다면 교육시설에 두는 게 최상이고 함께 은행털이에 나서지 않는 게 차악이라는 것을 알았을 거다. 아무리 정신이 없었어도 병원에서 생판 모르는 사람을 데려오는 일도 없었을 거고.

영화 <굿타임>

단지 열심히만 하는 코니의 모습을 보며 불쾌함과 답답함만이 교대로 쌓인다. 그런데 묘하게 이 부분에서 공감대가 형성된다. 왜 해야 하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선의를 갖고 열심히 했으나 결과는 반대일 때. 우리는 이와 같은 상황을 자주, 어쩌면 매일 겪는다. 본인이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 정확히 알고 출근하는 직장인이 몇 명이나 될까. 부지런하고 멍청한 상사가 최악이라고 욕하지만, 왜 하는지도 모르고 만원 전철에 몸을 싣는 우리도 은행을 털지 않았다뿐이지 코니와 별반 다르지 않다.

사프디 형제는 적절한 영화적 기법을 통해 이 비참한 공감대를 영리하게 증폭시킨다. 카메라 구도의 활용이 눈에 띈다. 영화를 양분하는 구도는 클로즈업과 롱샷/부감이다. 사프디 형제는 화면이 답답하게 느껴질 정도로 등장인물의 얼굴을 클로즈업 한다. 초조하고 절박하며 피곤에 찌든 표정은 여과 없이 관객에게 전달된다. 그리고 중간 과정(미디움샷) 없이 곧장 롱샷/부감으로 넘어간다. 인물이 아무리 고군분투 중이라도 개미처럼 조그맣게 보인다면 그 존재감은 하염없이 가벼워질 수밖에 없다. 가까이 보면 비극, 멀리서 보면 희극, 더 멀리서 보면 자연 다큐멘터리다.

극중극이라는 선택도 사실과 허구의 경계를 무너뜨리고 관객을 영화에 몰입시키는 사프디 형제의 탁월한 아이디어다. <굿 타임>에는 TV프로그램이 자주 등장한다. 동생을 빼돌렸다고 생각한 코니는 잠시 휴식을 취하며 TV를 본다. 칼을 든 여성의 일화가 나오는데 그녀는 경찰과 대치하다가 자기가 들고 있던 칼에 찔린다. 바로 얼마 후. 코니는 깨진 유리병을 든 레이에게 위협을 받는다. 마약 거래 직전에는 뉴스로 생중계 되며 코니는 전에 보았던 TV프로그램과 똑같은 상황에 처한다. TV를 보는 코니가 TV의 주인공이 된다면, 영화 속 코니의 모습을 보는 우리의 미래도 어렵지 않게 예상해볼 수 있지 않을까.

영화 <굿타임>

영화 같은 인생, 인생 같은 영화

결국 코니는 경찰에 잡힌다. 반대로 닉은 보석금 없이도 가석방 된다. 지적장애가 있으니 애초에 코니가 그리 날뛰지 않아도 될 일이었다. 지리멸렬한 헛수고 끝에 닉은 오프닝에 나왔던 교육시설로 혼자 돌아와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과 교실에 모인다. 지적장애인들은 친절하게 인사를 건네며 닉을 환영한다. 사람들을 양측에 일렬로 세운 뒤 상담사는 말한다.

“어떤 걸 좋아하면 방을 건너가세요. 건너갈지 안 갈지는 여러분이 정하는 거예요. 하지만 꼭 안 건너가도 돼요. 자기의 비밀이겠죠. 자기의 진실을 선택하세요.“

사탕을 좋아하면, 사랑해 본적이 있으면, 거짓말을 한 적이 있으면... 여러 질문에 멈춰있던 닉은 ‘가족과 문제가 있었다면’을 듣고 천천히 방을 가로지른다. 또 다른 질문이 이어지고 닉은 담은 카메라는 서서히 멀어진다. 닉은 곰곰이 생각하다가 때로 멈추고, 때로는 방을 건넌다.

<굿 타임>에는 악당이 없다. 카르텔을 형성해 지들끼리 다 해먹는 21세기 악당들 대신 시시한 아마추어들이 권총 한 자루 없이 은행을 턴다. 성공해봐야 일확천금, 인생역전은 꿈도 못 꾸고 가족의 품으로 돌아갈 정도인 본전치기, 푼돈을 위해 형제는 분투한다. 분투의 끝에 한 명은 감옥에 갇히고, 또 한 명은 시작점으로 되돌아온다. 애초에 성공담 자체가 존재할 수 없는 환경에서 참담한 실패만 투사하는 영화 <굿 타임>의 미덕은 역설적으로 여기에 있다.

<굿 타임>은 일탈과 범죄를 대의명분으로 포장하지도 않고 무리한 해피엔딩으로 끝맺지 않고 선택의 흔적을 자연스럽게 남길 뿐이다. 어떤 선택도 하지 않는다면 좋은 때를 놓치고 지금을 탓할 수도 있지만 나쁜 때를 피하며 현재에 감사할 일도 없다.

조용히 방 건너기에 몰입하는 닉에게 지금은 좋은 때인가 나쁜 때인가. 알 수 없다. 다만 혼자 비밀리에 간직하는 진실은 남았다. 이처럼 크레딧의 마지막 줄까지 올라가도 모를 영화가 있다. 살아봐도 모르는 일은 인생이라 부른다. 그래서 영화 같은 인생이 있고, 인생 같은 영화가 있다. <굿 타임>은 진실을 남기는 후자에 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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