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스=김민하 칼럼] 대통령의 신년 기자회견은 한국 사회에서 대통령이란 어떤 존재고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대한 많은 고민을 하게 한다. 말 한마디가 사회 전체를 뒤흔드는 것을 볼 때 대통령은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존재처럼 보이지만, 기자회견 내용을 뜯어보면 대통령도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일이 너무 많다는 인식이 전해져 오기 때문이다. 이 간극의 원인이 무엇인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간극을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가 전직 대통령 사면 논란이다. 보수야당이 주장하는 대로 사면권의 행사는 전적인 대통령의 판단으로 이뤄진다. 그런데 대통령은 국민의 공감대가 없으면 사면은 어렵다고 했다. 이 시점에서는 사면권 행사의 목표인 국민통합을 이루기 어렵다는 것이다. 다만 그러면서도 임기 말 사면의 가능성은 여전히 열어 놓았는데, 여전히 전직 대통령들의 사면은 유력하게 검토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대통령의 고민 근거에 지지율이나 재보선 영향 등 공학적 요인이 완전히 배제된 건 아닐 거다. 그러나 오직 그것만으로 설명할 문제가 아닌 것도 사실이다. 사면이라는 권한이 대통령에게 있는 한, 그것을 언제 어떻게 쓸지를 결정하는 것은 언제나 정치적 논쟁거리일 수밖에 없다. 그런 맥락에서 이 정권에서 일어난 일의 부담을 다음 정권으로 넘기는 것은 어떤 윤리의 차원에서 봐도 부담이 있는 게 현실이다. 따라서 대통령의 속내는 사면권을 행사하고 싶다는 것에 가까울 가능성이 크다.

생각해볼 것은 이게 과연 시점의 문제겠느냐는 것이다. 이명박 박근혜 전 대통령을 지금까지도 강력하게 지지하는 사람들을 제외한 계층의 여론을 가정해보자. 여당 지지층은 어떤 조건에서든 전직 대통령들에 대한 사면을 받아들일 수 없다. 그들에 대한 ‘반대’가 정체성의 핵심이기에 그렇다.

이른바 중도층은 또다른 의미에서 수용이 쉽지 않다. 그 핵심은 한 마디로 ‘봐줘선 안 된다’는 것, 즉 공정성에 대한 희구이다. 대통령 출신이든 누구든 잘못을 했으면 그에 합당한 벌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노력을 했으면 그에 합당한 보상을 받아야 한다는 개념과 동전의 양면이다. 이 논리는 상황에 따라 ‘노력을 하지 않은 사람’을 자의적으로 규정해 ‘정상’의 범주에서 배제하는 데 활용되기도 하고, 세상 만사를 ‘잘못’과 ‘잘못이 아닌 것’으로 나누거나 오직 ‘피해자’로서의 자기 정체성을 호소하는 일에 기만적으로 쓰이기도 한다. 이런 차원에서 보면 ‘죄를 지었으면 벌을 받아야 한다’는 개념을 거슬러 국민이 전직 대통령들의 사면을 합당한 일로 수용할 수 있게 하는 건 쉽지 않아 보인다.

문재인 대통령이 18일 청와대 춘추관에서 열린 신년 기자회견에서 기자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연합뉴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에 대한 판결은 이런 여론이 기성 체제에 어떻게 반영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이다. 2년 6개월의 실형 선고와 법정 구속은 법원의 고뇌를 방증한다. 파기환송심 재판부는 재판 초기부터 형 감경 사유를 만들기 위한 여러 노력을 했다. 실제 선고 내용을 뜯어보면 삼성이 기대에 호응하지 못했음에도 재판부가 이재용 부회장을 위해 해줄 수 있는 거의 모든 것을 해줬다는 느낌이 강하다.

그럼에도 재판부는 집행유예라는 마지막 ‘레드라인’은 넘지 못했다. 이 단 한 가지 요소로 재판부의 판결은 ’정의 실현’의 맥락에서 받아들여지고 있다. 언뜻 보기에 권력을 독점하고 있는 재벌 총수도 신체를 구속당하는 형벌은 피할 수 없다는 서사를 현실에서 구현한 듯 보이기 때문이다. 물론 법리판단이 가장 중요했겠지만, 재판부가 이러한 여론을 외면하지 못한 것은 어느 정도 사실로 생각된다. 전직 대통령 사면도 비슷한 얘기가 될 것이다.

이 문제에 있어선 이낙연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결국 ‘독박’을 쓰는 모양새가 됐다는 평이 많다. 중도층을 겨냥한 승부수였다지만 본전도 못 찾는 결과가 될 가능성이 커졌다. 여러 분석이 있지만 결국은 안일했다는 평가를 피할 수 없다. 정치는 같은 행위를 해도 무슨 맥락이냐에 따라 평가가 완전히 달라지는 영역이다. 이낙연 대표는 “지지율을 생각했다면 이런 제안은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했으나 피해를 감수하고 승부수를 던지기 위해선 이미 그 이전에 중도를 겨냥하는 정치적 맥락이 형성돼 있어야 했다. 누구도 이재명 경기도지사에게 ‘성인군자’가 될 것을 요구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낙연 총리’의 행보에는 중도에 어필할 맥락이 있었다. 하지만 ‘이낙연 대표’는 아니었다. 예를 들어 이재명 지사가 새해 벽두에 성인군자로 거듭나고자 했다면 ‘위선’이라는 손가락질을 당했을 것이다. 마찬가지다.

대통령이 이낙연 대표와 교감했거나, 최소한 이낙연 대표의 계획을 적극적으로 거부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추정은 권력이 마찬가지로 이 문제에 안이하게 접근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갖게 한다. 이런 안이함은 기자회견의 다른 대목에서도 드러나는데 예를 들면 윤석열 검찰총장 문제이다. 대통령은 윤석열 검찰총장을 ‘문재인 정부의 검찰총장’이라 칭했고 지난해 법무부 장관과의 충돌국면에 대해서도 재차 사과했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비검찰 출신이 검찰을 지휘하는 환경의 결과물이라고 주장하거나 징계 집행정지 등에 대해선 삼권분립이 잘 작동하고 있다고 평하는 것으로 핵심을 비켜갔다.

대통령의 이런 태도는 ‘윤석열 검찰총장 징계 청구는 (대통령이 아니라) 법무부 장관이 주도한 것’이라는 인식을 보여주는 듯하다. 실제 대통령 자신은 윤석열 검찰총장 징계를 소극적으로만 인정했을 수 있고 ‘적절한 메신저’를 통해 임기를 보장했을 수도 있다. 문제는 그럼에도 상황이 이렇게 흘러온 이유가 어디에 있느냐는 것이다. 때마다 제왕적 대통령제가 문제이고 장관 권한을 실제적으로 보장해야 한다거나 책임총리제를 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는 게 사실이지만, 거의 1년 넘게 국민적 분열을 야기한 이런 문제에 있어서도 그런 주장을 형식적으로 적용하는 것은 맞지 않다. 대통령이 만기친람해서는 안 되겠지만 나서야 할 때 나서지 못한 것은 문제일 수밖에 없다.

이런 문제는 어디서 기인하는 것일까? 대통령을 보좌하는 청와대 참모진의 ‘프로 의식’이 문제일 수도 있다. 그렇다 하더라도 문제는 어떤 기술의 부족에서 발생한다기보다는 역시 안이함에서 나오는 것이 아닌가 싶다. 대통령의 결단력 부족이나 상황 판단에 있어서의 실책은 여론의 온도가 얼마나 그대로 대통령에게 전달되는가에 있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대통령 기자회견에서 가장 논란이 컸던 ‘입양’ 관련 발언은 이걸 보여주는 대목이다. 대통령이 지구상의 모든 문제에 답을 가질 필요는 없으나 국민이 관심을 갖는 문제에 대해선 다른 태도였어야 했다. ‘온도’는 어떻게 하면 전달될 수 있을까? 여론조사나 정보수집도 중요하지만 그것만으로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언론과의 접촉면과 소통의 횟수를 늘리는 게 정답이다. 기자들의 질문은 언론사의 논조나 성향에 크게 좌우되는 경우가 있는 게 사실이지만, 집합적으로 봤을 때는 결국 여론의 온도를 의식한 결과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대통령이 언론의 질문에 답하는 게 일상화 된다면 어떤 말 실수나 안이함의 문제를 바로잡을 기회도 그만큼 늘어날 수 있다. 지금은 조금이라도 실수하면 큰일나는 존재처럼 돼있고, 참모 조직도 이런 이미지를 연출하는 데 몰두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바람직하지 않다. 대통령도 매일 실수하고 잘못된 판단을 하지만 그러면서도 문제를 고쳐나가는 일상의 존재라는 맥락이 필요하다. 문재인 대통령의 남은 임기 동안에라도 폐쇄성이 안이함으로 이어지는 이 문제는 개선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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