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스=송창한 기자] 정부가 내놓은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이 노동자 산업재해 사망 등 중대재해를 막겠다는 법 취지에서 크게 후퇴했다는 언론 비판이 이어진다. 거듭되는 중대재해법 후퇴에 '차 떼고 포 뗐다', '누더기 법안', '빈껍데기' 등의 수식어가 나붙고 있다. 중대재해 발생 시 장관과 지자체장 등 정부 책임을 제외한 정부안에 보수언론에서마저 기업만 옥죈다는 비판이 나온다.

정부는 29일 책임 범위와 처벌 대상을 축소한 중대재해법 수정안을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에 제출했다. 정부안은 더불어민주당 의원들이 발의한 안보다도 대폭 후퇴한 법안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민주당은 50인 미만 사업장에 대한 법 적용을 4년간 유예하는 안을 검토해 왔는데, 정부는 여기에 '100인 미만 사업장 2년 유예' 내용을 추가했다.

백혜련 국회 법사위 법안심사제1소위 위원장(오른쪽부터)이 29일 오전 국회에서 열린 법사위 법안심사제1소위원회에 참석하며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제정을 촉구하는 정의당 강은미 원내대표, 고 김용균씨 어머니 김미숙 김용균재단이사장, 고 이한빛PD 아버지 이용관씨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중대산업재해를 '사망자가 1명 이상 발생한 재해'로 규정한 조항과 관련해 정부는 '동시에 2명 이상 사망한 재해'라는 수정의견을 제시했다. 중대재해법 처벌 수위가 높아 '사망자 2명'으로 중대재해 기준을 높이거나, '사망자 1명' 조항 유지 시 처벌 수위를 낮춰야 한다는 것이다. 이른바 '징벌적 손해배상' 내용은 손배액의 '상한선'(손해액 5배 이하)을 정해 기존안(손해액 5배 이상)을 약화시켰다.

'인과관계 추정' 조항은 삭제됐다. 당초 민주당 박주민·이탄희 의원 법안은 산업재해 사망사고 발생 시 사업주가 원인을 제공했다고 입증하지 못하더라도 추정을 통해 사업주 책임을 묻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사고발생 5년 전부터 안전·보건조치 의무 위반 사실이 3회 이상 확인됐을 때, 사업주 사건 은폐 지시 등 산업재해 인과관계를 추정할 수 있을 때 경영자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취지에서 담긴 내용이지만 정부는 형사법상 '무죄추정의 원칙'에 반한다는 이유를 삭제 이유로 들었다.

중대재해 처벌 대상에서는 중앙행정기관장과 지자체장은 제외됐다. 또한 정부는 임대·용역 사업의 경우 원청(사업주·법인·기관 등)에 안전보건 책임을 묻는 조항에는 재검토가 필요하다는 의견을 냈다.

한겨레 12월 30일 05면 갈무리

언론에서는 이런 '누더기 법안'으로 현재 발생하고 있는 산재를 막을 수 없다는 비판이 나온다. 한겨레는 30일 기사 <구의역·이천화재도 처벌 못하는 '중대재해법'>에서 "정부안은 중대재해의 '정의'부터 갈팡질팡하고 있다"며 '사망자 2명' 기준으로 결론날 땐 혼자 일하다 숨진 태안화력발전소 김용균 씨, 구의역 스크린도어 수리작업 도중 숨진 김 군 사례에는 법이 적용되지 않는다고 보도했다.

정부안대로라면 38명의 사망자가 발생한 이천 물류창고 화재 참사와 같은 사례가 2년 이내 재발했을 때 중대재해법 적용은 불가하다. 사건 당시 시공사 주식회사 '건우'는 임직원이 62명인 중소기업이었다. 한겨레는 사설 <중대재해법, 끝내 '빈껍데기'로 만들겠다는 건가>에서 "전체 사업장의 99%가 50인 미만이고, 중대재해의 85%가 이들 사업장에서 발생하는 게 작금의 현실"이라고 했다.

한겨레는 "핵심 조항 대부분이 정의당과 민주당은 물론 국민의힘 의원들의 발의안보다도 한참을 후퇴했다. 반년 이상 법제정 논의를 미적거리다 막판에 와서야 이런 '누더기 법안'을 내놓다니 기가 찰 노릇"이라며 "중대재해기업 '처벌법'을 만들라고 했더니 거꾸로 '보호법'을 만들었다는 말이 딱 들어 맞는다"고 질타했다.

경향신문은 사설 <중대재해법 후퇴 또 후퇴, 여권은 왜 유독 이 법에 몸사리나>에서 "용두사미, 유명무실이라는 말이 이렇게 들어맞기도 어렵다"며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이 '누더기 법안'으로 전락하고 있다"고 총평했다. 경향신문은 "여당이 사실상 법 제정의 기초 단일안으로 삼겠다고 밝힌 '정부 협의안'이 앞서 제출된 5개 의원입법안의 뼈대와 입법 취지를 뿌리째 흔들고 있다"며 "이름만 무섭고 내용은 전혀 딴판이다. 법안의 후퇴에 강력한 유감을 표하며 여야의 자세 전환을 강력히 요구한다"고 했다.

서울신문은 사설 <‘차 떼고 포 뗀’ 정부의 중대재해법, 산재사망 못 줄인다>에서 "그야말로 ‘차 떼고 포 뗀’ 법안이라고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정부안으로는 산재사망을 확실히 줄일 수 없다"며 "문재인 대통령이 산재사망을 줄이라고 지시했다고 정부가 생색내기 법안을 내고 이를 여당이 단독입법한다면, 산재사망이 발생할 때마다 집권여당은 냉혹한 정치적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할 것"이라고 했다.

12월 30일 한겨레, 경향신문 사설 갈무리

정부안은 처벌 대상에서 장관과 지자체장 등 정부책임자를 제외시킨 탓에 재계 입장 대변에 적극적인 주요 보수언론에서마저 비판받고 있다. 보수언론은 정부안을 긍정평가하거나 여전히 과잉규제라는 논조를 보이면서 '정부 책임자 제외'를 비판하고 있다.

중앙일보는 기사 <중대재해 윗선 처벌한다며 장관·지자체장은 뺐다>에서 "기업에 대해서는 최고경영자와 오너까지 관리 책임을 물으면서, 장관·지자체장은 처벌 대상에서 슬그머니 뺐다"며 "법안 명칭도 기존 '중대재해에 대한 기업 및 정부 책임자 처벌법안'에서 '정부 책임자'를 빼고 '중대재해 기업 및 경영책임자 등의 처벌에 관한 법률'로 바뀌었다"고 비판했다. 중앙일보는 "위헌 시비가 거론된 조항만 미세 조정했을 뿐 기업들이 우려하는 과도한 처벌 조항은 실제적으로 바뀐 게 없다"며 "결국 이 정부에서 가장 만만한 존재가 기업인 것이 또다시 증명된 셈"이라는 한 10대 그룹 부사장 발언을 덧붙였다.

동아일보는 사설 <장관·지자체장 등 빼고 '기업인 重罰'만 고수한 중대재해법>에서 "현실에 맞춰 일부 조항이 수정된 것은 바람직한 일"이라면서 "예기치 못한 사고로 중소기업인이 수감돼 수십, 수백 명 직원이 길거리에 나앉는 건 어쩔 수 없고, 사고예방 관리책임이 있는 고위공무원은 현실적으로 책임을 묻기 곤란하다는 이중적인 기준 적용"이라고 했다. 조선일보는 관련 기사의 제목을 <장관·지자체장 책임은 빼고 기업주만 처벌하는 '중대재해법'>이라고 뽑았다.

서울경제는 사설 <'묻지마 규제' 장벽에 기업 할 맛 나겠나>에서 "국회에 제출된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정부 안은 기업을 경영할 의욕을 꺾는 대표적인 과잉 규제 사례"라며 "특히 장관과 지방자치단체장 등 공무원은 쏙 빼고 기업 최고경영자(CEO)에게만 중대 과실의 책임을 부과해 산업재해를 기업 탓으로만 돌리려 하고 있다"고 썼다.

정부안은 처벌 대상에서 장관과 지자체장 등 정부책임자를 제외시킨 탓에 재계입장 대변에 적극적인 주요 보수언론에서마저 비판받고 있다.

한편, 산업재해 사망자 유가족들은 29일 국회 앞에서 중대재해법 제정을 촉구하며 2400배에 나섰다. '2400'은 한 해에 산업재로 숨지는 노동자 수를 의미한다. 고 김용균씨 어머니 김미숙 김용균재단 이사장, 고 이한빛PD 아버지 이용관 한빛센터 이사장의 국회 앞 단식은 30일 기준 20일째를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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