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스=김혜인 기자] 코미디언 A씨는 수년간 준비 끝에 방송사 코미디언 공채시험에 합격해 2년 전속계약을 체결했다. 주 1회 40만 원의 출연료로 생계를 유지해야 했고 출연하지 못할 경우에는 돈을 받지 못했다. 그럼에도 A씨는 유명한 코미디언이 되고자 회의, 리허설, 촬영에 임했지만 프로그램이 폐지돼 계약기간을 채우지 못했다. A씨는 현재 택배와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다.

이는 코미디언 A 씨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연기자 10명 중 8명은 연 천만 원 미만의 출연료를 받고 있었으며 생계유지를 위해 투잡을 뛰는 경우도 절반 이상인 것으로 집계됐다. 이와 함께 10명 중 5명 만이 서면으로 계약서를 작성하는 등 제작 현장의 불공정 관행이 만연한 것으로 나타났다.

서울시와 한국방송연기자노동조합이 방송 연기자들의 출연계약 및 보수지급거래 관행 등을 파악하기 위해 벌인 실태조사 결과를 28일 발표했다. 방송연기자 560명(배우 72%, 성우 10.2%, 코미디언 9.6%, 무술연기 8.2%)을 대상으로 한 계약체결 및 거래 관행 설문조사와 연기자노동조합원 4,968명을 대상으로 한 수입조사 두 가지 방식으로 진행됐다.

(자료제공=서울시)

연기자노동조합원 4,968명의 출연수입을 분석한 결과, 2015년 평균 2천 8백만 원이던 출연료는 2천623만 원(2016년), 2천 301만 원(2017년), 2천 94만 원(2018년), 1천 988만 원(2019년)으로 매년 감소했다.

금액별로 따져보면 10명 중 8명 (79.4%)이 연소득 1,000만 원 미만이었으며 1억 원을 넘는 경우는 4.8%에 불과했다. 지출된 출연료를 보면 1억 원 이상 수입을 올리는 연기자가 전체 출연료 지급분의 70.1%를 차지했고, 수입 1천만 원 미만 연기자에 대한 지급분은 5%에 불과해 양극화가 매우 심각한 것으로 나타났다.

방송연기자 560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 결과도 비슷했다. 529명의 연평균 출연료 수입은 1,997만 원이었고 연기자 외 다른 일자리를 병행한다는 사람은 전체의 58.2%였다. 다른 일자리를 병행하는 이유는 생계비 보전이 78.5%로 가장 많았다.

표준계약서 미사용, 불투명한 출연료 정산 등 불공정계약 만연

출연계약서를 서면으로 작성한 경우는 2명 중 1명에 불과했다. 조사대상 560명이 출연한 1,030개(2019년~조사시점까지) 프로그램에 대한 ’계약 관련 조사 결과‘ 49.4%는 서면으로 계약서를 작성했고 29%는 구두계약, 21.6%는 등급확인서(방송사가 1~18등급으로 연기자 경력·등급 평가) 등 다른 문서로 대체한 것으로 나타났다.

대중문화예술산업발전법에 따라 서면 계약체결의무 위반 시 500만 원 이하 과태료를 부과받을 수 있지만, 서면계약 체결은 잘 되지 않고 있다.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 출연자는 방송 연기자보다 심각한 상황이다. 서면계약이 42%에 불과했으며 46.7%가 구두계약을 맺고 작업에 참여하고 있었다.

이 외에 촬영이 끝난 이후 야외수당, 식비, 가산료 등 출연보수에 대한 정확한 정산내용을 받지 못했다는 답변(43.2%)이 많았다. 서울시는 이에 제작진과 출연자 간 출연료에 대한 불신의 원인이 될 수도 있어 조속한 해결방법 마련이 필요한 상황이라고 진단했다.

(자료제공=서울시)

쪽대본, 18시간 이상 연속촬영 등 불공정 관행 여전

일명 ‘쪽대본’으로 불리는 촬영 직전 대본을 받은 경험은 33.4%로 나타났으며 ▲차기 출연을 이유로 출연료를 삭감(27.1%)하거나 ▲야외비·식대 미지급(21.8%) ▲18시간 이상 연속촬영(17.9%) ▲편집 등의 이유로 출연료 삭감(12.5%) ▲계약조건과 다른 활동 강요(10.5%) 등 불공정한 관행이 조사됐다.

문화체육관광부가 제정한 ‘대중문화예술인 방송출연표준계약서(배우)’는 촬영일 2일 전까지 대본을 제공하고, 1일 최대 촬영시간은 18시간을 초과할 수 없으며 추가촬영 시 야외비 및 제수당을 지급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아동·청소년 배우에 대한 조사를 함께 진행한 결과, 서면계약서 작성은 성인 연기자(50.9%)에 한참 미치지 못하는 30.7% 수준이다. 응답자 중 66.7%가 10시 이후 야간촬영 경험이 있다고 답했다. 촬영 전 동의를 구하고 촬영했다고 답변한 응답자는 43.3%에 불과했다. 대중문화예술산업발전법 제22조에 따르면 10시 이후 미성년자의 촬영은 제한된다.

아동·청소년 배우 중 62.2%는 성인 연기자와 비교해 출연료 차별을 받았다고 답했다. 계약 체결이나 제작 현장에서 부당한 대우나 차별, 인권침해를 당한 경우, ‘그냥 참고 넘어간다’가 60.5%로 가장 많았다.

(자료제공=서울시)

방송연기자 출연계약서 8종 살펴보니...불공정 약관 다수 발견

서울시가 방송연기자 출연계약서 8종을 입수해 법률검토를 진행한 결과, 표준계약서 미사용을 비롯해 ▲제작사 책임 축소 및 면책, 전가 ▲연기자의 지적재산권 포괄적 이전 ▲소송제기 금지 ▲과도한 위약금 등 불공정약관이 의심되는 조항들이 다수 발견됐다.

서울시는 이와 관련해 방송사 및 제작사에 검토의견을 전달하는 등 연기자들의 권익개선에 필요한 방안을 마련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서울시와 한국방송연기노동조합은 "이번 실태조사 결과를 종합해 관련 법령 및 제도개선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관계 부서, 국회, 방송사·외주제작사와 협력해 개선방안을 도출해나갈 계획"이라며 "계약서 사전검토 및 수익배분·저작권 침해 등의 피해구제, 법률서식(고소장, 내용증명 등) 작성 등을 무료로 지원하는 ‘문화예술 불공정상담센터’를 통한 방송 연기자 지원도 확대해 나가겠다"고 밝혔다.

서성만 서울시 노동민생정책관은 “열악한 여건과 불공정한 관행으로 인한 연기자들의 창작의욕 저하는 대중문화산업 위축으로까지 이어질 수 있다”며 “지속가능한 문화산업 성장을 위해 방송사, 외주제작사, 국회, 유관부서 등과 협업해 개선방안을 도출해나가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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