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악마는 사라지지 않는다>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미디어스=고브릭의 실눈뜨기] 어렵다고 알려졌지만 <악마는 사라지지 않는다>는 사실 친절한 영화다. 넷플릭스에 적힌 공식 소개만 잘 따라가면 된다. 소개는 다음과 같다.

“그의 헌신이 문제였을까, 아니면 그저 일어날 일이었을까. 소중한 이들을 지키고 싶은 한 남자의 주변에 악한 자들이 들러붙는다. 도망갈 곳도 없는 작은 마을에서“

첫 문장부터 살펴보자. 유사 이래 수많은 철학자가 논쟁을 펼친 질문이다. 운명은 노력으로 바꿀 수 있을까, 불가능할까. 영화는 138분 동안 빠르지는 않지만 단호하게 말한다. 불가능하다고.

영화 <악마는 사라지지 않는다>

한 노인의 텁텁한 내레이션으로 영화가 시작된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원작을 집필한 도널드 레이 폴록이다. 원작자를 쓴 이유는 명확하다. 소설의 시작과 끝을 알고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당연히 내레이션도 1인칭이 아닌 전지적 시점이다. 등장인물의 현재 심리뿐 아니라 미래에 일어날 일까지 꼼꼼하게 예견한다.

동시에 미국 전도(全圖)가 화면을 채운다. 마치 전능한 존재가 우리의 존재를 현미경으로 관찰하듯 전도는 오하이오와 웨스트버지니아를 확대한 주도(州圖)에서 영화의 배경인 노컴스티프의 시도(市圖)로 점차 범위가 좁혀지고 마침내 한 대의 자동차로 초점이 맞춰진다. 주인공 아빈(톰 홀랜드)의 아버지 윌러드(빌 스카스카드)다. 이때 내레이션은 영화의 메시지를 이해하기 위해서 꼭 짚고 넘어가야 할 문장을 읊는다.

“1957년 노컴스티프에는 대략 400명이 살고 있었다. 이런저런 악행과 비운으로 인해 그중 대부분이 혈연관계였다. 이유가 욕망이었든 필요였든 단순한 무지였든 간에 말이다.”

부모와 자식 관계를 흔히 천륜(天倫)이라고 한다. 하늘의 도리라는 뜻이다. 등장인물이 어떤 사건에 휘말릴지 단서 하나 남기지 않고 하늘의 도리 앞에 ‘악행과 비운’이라는 수식어를 붙였다. 미리 이야기하지만, 이 영화는 아빈의 비극적인 운명을 그린다. 오해는 말자. 아빈이 겪는 비운은 그의 사주팔자 때문이 아니라 그냥 인간으로 태어난 탓이다.

두 번째 시퀀스도 피할 수 없는 운명론에 무게를 더 한다. 노컴스티프의 식당에서 윌러드와 샬롯, 칼과 샌디가 처음 만나는 장면이다. 샬롯과 샌디는 식당종업원이고 막 전역한 윌러드가 군복을 입고 식당에 들어온다. 바에 앉아있던 칼이 자리를 양보해 창가로 간다. 샬롯은 샌디에게 창가의 손님에게 주문을 받으라고 말한다. 칼이 윌러드에게 자리를 양보하지 않았거나, 샬롯이 샌디 대신 창가로 주문을 받으러 갔다면 아빈은 비극의 주인공이 되지 않았을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으니 알 수 없다.

영화 <악마는 사라지지 않는다>

악마가 들러붙는 2가지 이유

아빈이 비극을 겪는 이유는 무엇인가. 다시 소개 문구로 돌아가 두 번째 문장을 보자. 주변에서 들러붙는 악한 자. 즉 악마 탓이다. 악마의 탄생을 보는 관점을 대체로 두 가지다. 신이 부재할 때. 또는 악마가 신의 자리를 대신할 때. 불운하지만 너무나 인간적으로 아빈은 신의 부재와 악이 신을 참칭하는 상황에 모두 처하게 된다.

윌러드는 2차 대전 참전 용사다. 남태평양에서 일본군과 싸우며 참혹한 전장을 보고 신의 부재를 느낀다. 전쟁에서 돌아온 그는 고향마을 근처 식당의 점원이었던 샬롯(헤일리 베넷)에게 한눈에 반하고 결혼에 성공해 아들인 아빈을 낳는다. 하지만 샬롯은 곧 암에 걸리고 윌러드는 아내를 살려달라며 집 뒤편에 십자가를 만들고 신을 애타게 찾는다. 물론 기적은 일어나지 않고 낙담한 윌러드는 아들을 남겨둔 채 극단적인 선택을 한다.

목사 로이(해리 멜링)는 윌러드와 다른 방향에서 신의 부재를 목격한다. 로이는 기적 체험이 주특기다. 본인이 신의 보살핌을 받는다며 신도들 앞에서 거미 떼를 머리에 뒤집어쓰는 퍼포먼스를 보이는 것이다. 그러다 거미에 뺨을 물려 죽을 고비를 넘긴 후 신의 권능이 임했다는 망상에 빠진다. 로이는 아내인 헬렌(미아 바시코브스카)을 죽인 뒤 부활시키려고 하지만 아무리 애타게 ‘주님’을 외쳐도 그녀는 살아 돌아오지 못한다. 현실을 깨달은 로이는 현장을 벗어나 도망치지만, 연쇄살인마 칼과 샌디를 만나 살해당한다. 어린 딸 리노라만 남긴 채.

영화 <악마는 사라지지 않는다>

이제 신의 자리를 대체하려는 인물들이 등장한다. 칼(우디 해럴슨)과 샌디(라일리 키오)의 먹잇감은 히치하이커다. 히치하이커를 태워 인적이 드문 곳으로 데려가 샌디와 성관계를 맺도록 유혹한 뒤 무방비상태일 때 살해한다. 칼은 성관계 장면과 죽어가는 장면을 카메라에 담아 사진을 차곡차곡 모아 나간다. 아무런 죄책감 없이 인간의 생사를 주관한다는 점에서 이들은 등장인물 중 가장 전지전능하다.

샌디의 친오빠이자, 고아가 된 아빈을 할머니에게 인도한 보안관 보데커(세바스찬 스탠). 그는 노컴스티프에서는 전능에 가까운 권력자다. 그러나 그는 갱들에게 뇌물을 받는 부패 경찰이자 재선만 바라는 탐욕스러운 정치인이다. 우연히 샌디의 살인을 알게 되어도 체포 대신 다가올 선거에 방해가 될까 걱정뿐이다. 갱들에게 협박을 받자 오히려 그들을 죽이기까지 한다. 그가 가진 권능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만 남용된다.

노컴스티프에 새로 부임한 목사 프레스턴은 가장 비열한 놈이다. 리노라는 학교의 문제아들에게 왕따를 당하지만 열렬한 신앙심을 겨우겨우 버텨내는 중이다. 프레스턴을 그 사실을 알고 리노라의 신앙심을 이용해 불순하게 접근해 유혹한다. 결국 “주님 앞에서 옷을 벗어본 적 있니”라며 관계를 맺고, 리노라가 자신의 아이를 임신했다고 말하자 망상에 걸렸다며 비난하며 낙태할 방법을 찾아보라고 다그친다. 절망한 리노라는 결국 스스로 생을 마감한다.

우연이든 필연이든 신을 참칭하거나 권능을 악용한 악마들은 무신론자(에 가까운) 아빈에게 심판받는다. 아빈은 동생처럼 아끼던 리노라를 죽음으로 몰고 간 프레스턴을 교회에서 총으로 쏜 뒤 히치하이킹 한다. 아빈을 태운 건 칼과 샌디. 인적 드문 곳까지 끌려간 뒤 이상한 낌새를 느낀 아빈은 다시 한 권 방아쇠를 당겨 두 악인을 처단한다. 두 살인사건을 파헤치며 아빈을 뒤쫓은 보데커에게도 결국 옛집의 십자가 앞에서 총알을 날리고 아빈은 도망치듯 다시 히치하이킹을 한다.

히치하이킹으로 어떤 남자의 트럭에 타게 된 아빈. 라디오에서는 존슨 대통령이 베트남 파병 병력을 대폭 증원한다는 방송이 흘러나오고 또다시 전지적 시점의 내레이션이 시작된다. 아빈은 ‘낯선 사람의 차에서는 잠들지 말아야 된다’고 애쓰지만 몰려오는 잠에 취해, 앞으로 가는지 뒤로 가는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어떤 군인의 모습을 본다. 아버지인 윌러드인 것도, 자기인 것도 같다‘고 말이다. 아마도 아빈은 베트남전에 참전하게 될 것이다.

영화 <악마는 사라지지 않는다>

본격적인 중부극 시대 개막

이제 공식 소개의 마지막 문장을 보자. ‘도망갈 곳도 없는 작은 마을에서‘다. 2대에 걸친 지긋지긋하고 비극적인 아빈의 사건들을 운명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건 충분히 이해했으리라 본다. 그럼 마지막 질문이 남았다. 이 비극적 사건의 배경이 되는 작은 마을은 도대체 어디인가. 시대와 배경 설정이 힌트가 될지 모르겠다.

윌러드가 참전한 2차 세계대전은 정의로운 전쟁. 아빈이 참전할지 모르는 베트남전은 비열한 전쟁으로 기억되고 있다. 유사 이래 가장 압도적인 국력을 자랑했다는 전후 10여 년 동안 미국인들에게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당시 미국인들의 의식변화를 등장인물과 엮어 보는 재미도 있을 것이다.

더 나아가 현대 정치에 관심이 많다면 도식적이고 헐겁지만 2차 대전과 베트남전 사이의 변화를 오바마 시대와 트럼프의 등장으로 대입해 설명해보는 것도 영화를 깊이 즐기는 하나의 방법일 것 같다. 같은 지역의 이야기인 <힐빌리의 노래>는 아빈의 자식, 손주의 이야기 같기도 하다. 다른 제목을 붙이자면 <힐빌리의 노래: 비긴즈>도 나쁘지 않아 보인다. 아무래도 넷플릭스는 새로운 10년의 금광을 러스트벨트에서 찾은 것 같다.

시간이 조금 더 흘러 운이 좋다면 이 영화가 중부극의 시대를 연 작품으로 기억될지 모르겠다. 여전히 그리고 앞으로도 악마는 절대 사라지지 않을 테니까. 그 이유가 신의 부재든, 신의 참칭이든. 현재 지구상에서 가장 신에 가까운 사람은 미합중국의 대통령이고 우리는 그 영향력에서 벗어날 수 없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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