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스=윤광은 칼럼] 2년 전, 한 격투기 선수가 개인 방송을 하던 도중 아동 성폭행을 저지르고 수감 중인 조두순이 출소하면 자기 손으로 응징하겠다고 예고한 일이 있었다. 소식을 듣고 들었던 생각은 그저 의아함이었다. 왜 이 격투기 선수는 저런 일을 하려는 걸까. 그런 일에 교훈이 있거나 쓸모가 있다고 생각하는 걸까. 당연히 조두순은 징역 12년이 아까운 흉악 범죄자다. 그걸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왜 그 자신이 징벌을 하려고 하는지 의아한 것이다.

범죄 행위를 바로잡기 위한 대책은 무엇일까. 먼저 피해자를 구제하고 지원하는 것이 우선이다. 다음으로 사법 절차에 따라 범죄자를 처벌하며 죄값을 물어야 한다. 그리고 범죄로 침해된 사회적 가치를 수복하고 범죄가 재발하지 않도록 예방에 힘써야 한다. 범죄자를 완력으로 응징하는 것이 저 중 무엇에 도움이 될까. 오히려 사인들의 자의적 폭력 행사를 금지하는 근대적 법치 체계의 또 다른 사회적 가치를 훼손할 뿐이다. 이미 판결을 받고 복역 중인 인물을 내가 징벌하겠다 나서는 것은 사법 체계를 무시하는 걸 넘어 자신에 대한 과신이다. 누구나 비인간적 범죄를 저지른 인물에게 분노할 수 있다. 하지만 사법 기관을 대신해 정의를 집행할 권한은 누구에게도 없다. 사람을 때리는 기술을 익힌 격투기 선수라고 하더라도 말이다. 타인보다 우월한 완력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은 어떠한 도덕적 권위도 안겨주지 않는다.

아동 성범죄자 조두순이 출소한 12일 오전 구로구 서울남부교도소 앞에서 조두순의 출소를 반대하는 집회 참가자들이 바닥에 누워 구호를 외치고 있다. Ⓒ연합뉴스

조두순은 지난주 12년간의 복역을 마치고 출소했다. 그가 교도소에서 걸어 나오는 현장은 아수라장이었다. 저 격투기 선수와 비슷한 생각을 품은 이들이 많았던 모양이다. 보수단체 회원과 숱한 유튜버, 인터넷 방송 비제이가 몰려들었다. 패륜적 범죄를 저지른 범죄자가 검거되거나 출소하는 순간에 군중이 몰려들어 공분을 토하는 건 오래전부터 있었던 낯익은 광경이다. 낯선 점이 있다면 저 유튜버들은 저마다 스마트폰과 휴대용 방송 장비를 손에 쥐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들은 욕설을 뱉고 고함을 지르고 흡사 고담시의 배트맨이 된 것마냥 몸을 날려 호송 차량을 향해 덤벼들었다. 그렇게 격앙된 몸짓을 표현하는 와중에도 어찌 된 일인지 스마트폰 카메라를 촬영 가능한 각도로 파지 하는 건 잊지 않았다. 행렬은 조두순의 집까지 이어졌다. 악인을 심판하겠노라는 허세, 연출된 공분... 이런 것들이 갖은 기행으로 이어져 주민들에게 피해를 주고 있다고 한다.

조두순 집 앞 개인방송 경쟁 Ⓒ연합뉴스

촬영 기기의 휴대화와 개인 방송 플랫폼, 스트리밍 서비스의 보급은 사람들의 시신경을 연결 지었다. 내밀하고 사적인 장소, 긴박하거나 폐쇄적인 상황일지라도 스마트폰 카메라를 켜면 멀리 떨어진 이들에게 내가 보는 광경을 실시간으로 보여줄 수 있다. 마치 봉건국가 시대 죄수가 저잣거리에서 돌팔매질당하듯 범죄자가 출소하여 군중에게 포위되는 광경은 물론, 그가 사는 자택의 모습과 위치까지 생생하게 구경할 수 있다. 그것은 스마트폰 액정과 컴퓨터 모니터라는 미디어 체험의 프레임 속에서, 새로운 장르의 개인 방송 콘텐츠로 소비된다. 현장에선 조두순을 향한 단죄의 막말이 난무했지만, 그 말을 뱉은 유튜버들은 물론 그 광경을 지켜보는 시청자들까지, 거기에 어떠한 진지한 의미를 둔 사람은 아무도 없었을 것이다.

가스 밸브를 잠그고 집 밖에서 고함을 지르고 집을 포위하는 행동은 집단적 가학 행위고 사적 폭력이다. 조두순이 피해자에게 가한 고통은 이것과 비교할 수 없이 크겠지만, 피해자의 고통을 달래는 것과 상관관계가 없는 또 다른 일탈 행위다. 그들은 희희낙락한 표정이었으며 흡사 몬스터를 집단적으로 사냥하는 온라인 게임 '레이드'를 뛰러 모인 사람들 같았다. 왜 이런 행동을 떳떳이 저지를 수 있을까? 조두순이 "어떤 짓을 당해도 싼 절대 악인"이기에 보란 듯이 조롱하고 괴롭히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조두순의 악행은 그들이 가학을 실행하고 전시하고 그걸로 구독자를 유치하기 위한 최적의 명분에 지나지 않는다.

조두순의 출소는 스릴러 영화 속 악당이 현실에 나타난 것 같은 흥분감을 주고 사람들은 자극적인 이야기에 굶주려 있다. 정의의 관념은 올바른 일을 실천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 사람 대다수와 교집합이 없을 만큼 악마화된 강력 범죄자 하나를 린치하는 것으로 재현되고 있다. 아동 성범죄는 꾸준히 발생하는 사회 문제이며, 성범죄는 권력관계와 문화적 요인 등이 빚어내는 보편적 범죄다. 구조적 대책과 토론을 요구하는 논점이 조두순 이름 석 자로 대치된 채 가장된 정의감으로 휘발돼 버리고 있다. 듣자 하니 악마를 잊지 말고 기억하자는 취지로 조두순의 얼굴을 프린팅 한 티셔츠까지 출시되었다고 한다. 세상의 성범죄를 조두순이 모두 저지르는 것도 아닌데 이게 대체 무슨 촌극일까.

형기를 마치고 출소한 아동 성범죄자 조두순이 탑승한 관용차량이 12일 오전 경기도 안산시 법무부안산준법지원센터에서 나오던 중 일부 시민과 유튜버 등에 가로막혀 있다. (안산=연합뉴스)

유튜버, 비제이들의 기행은 많은 사람에게 비웃음을 사고 있다. 하지만, 저들이 연행하는 소극은 사회 정서, 가치관과 단절돼 있지 않다. 흉악 범죄자이기 때문에 무슨 짓을 가해도 상관없다는 사고방식은 “범죄자의 인권을 왜 지켜주느냐”는 사회 정서와 통한다. 완력으로 조두순을 징벌하겠다는 발상은 힘을 지닌 강자가 각종 민폐 꾼(‘빌런’)을 통쾌하게 응징하는 인터넷 사회 기층에 퍼진 ‘참교육’ 서사와 이어진다. 이 사회가 범죄 앞에서 수호해야 하는 건 피해자의 인권이요, 그러므로 인권의 보편적 체계다. 조두순을 응징하러 찾아간 이들은 “왜 경찰이 범죄자를 보호해 주는지 모르겠다”라고 불평했다 한다. 하지만 경찰이 보호한 건 조두순이 아니다. 민주주의 국가, 법치 국가의 이념이다. 사적 폭력과 자력 구제는 금지돼 있고, 시민을 징벌하는 권력은 형법에 의해 제한적으로 행사되어야 한다. 악인을 징벌할 수 있는 ‘힘’을 내세우고 거기 도취하는 건 그 악인이 제가 지닌 힘으로 타인을 약자로 다루며 가해한 작태와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을까? 어쩌면 저 유튜버와 비제이들은 이 사회가 암암리에 공유하는 가치관을 조회 수 경쟁의 선정적 형태로 가시화한 것일지도 모른다.

일군의 눈먼 정의감은 성범죄 피해자를 위한 상황도, 성범죄가 발생한 시점도 아닌, 12년 전 성범죄를 저지른 인물이 세상에 나타나면서 준동했다. 가장 알기 쉽게 극단화된 범죄에 대해서만 범죄자를 가학하는 방식으로 정의감이 작동한다. 이 사회에서 통용되는 정의감, 그러니까 법과 도덕, 인권을 대하는 가치관이 얼마나 무디고 삐뚤어져 있는지 암시하는 경보음이다.

저작권자 © 미디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