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이하 삼토반)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미디어스=고브릭의 실눈뜨기] <삼토반>에는 결정적인 고증실패가 있다. 그룹 소방차가 2005년 발표한 곡 ‘넥타이부대’가 1995년이 배경인 영화의 아침체조시간에 나왔다는 건 아니다. 되돌릴 수 없는 고증실패는 바로 토익 수업에서 말하기를 한다는 사실이다. 중학교 영어 시간에 리슨(Listen)과 히어링(Hearing)이 다르다고 배우듯 입에서 소리가 난다고 다같은 말하기는 아니다.

타일러 라쉬가 연기한 원어민 교사는 수업 시간에 지문을 따라읽는 쉐도잉(Shadowing)이 아니라 의견이 들어간 스피킹(Speaking)을 시킨다. 토익 공부를 해본 사람은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일찍 일어나는 새가 벌레를 잡는다’는 문장은 토익의 PART 1,2,3,4에 나올 지문들과는 전혀 상관없다는 사실을. 대기업에서 강의를 하지만 극중에서 타일러는 좋은 영어선생님일 수는 있어도 훌륭한 토익 강사는 아니었던 것 같다.

영화 <삼진그룹 영어토익반>

흥미로운 점은 (의도적이라 확신되는)고증실패가 영화의 메시지를 훨씬 풍성하게 만든다는 사실이다. 토익은 영어실력과 상관관계가 적다. 영어 실력이 뛰어난 사람은 토익에서 고득점을 얻겠지만, 토익 고득점자는 영어에 능숙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왜냐면 토익이 측정하고자 하는 능력은 듣기와 읽기 뿐. 말하기와 쓰기가 아닌 탓이다.

토익 600점은 대리로 승진하기 위한 자격이지만 수업에 참여하는 건 자율복장인 대졸사원들과 달리 유니폼 착용을 강요 받은 ‘고졸출신 여직원들’뿐이다. 전국의 상업고등학교에서 가장 뛰어난 성적을 거두고 입사했지만 커피 타고 복사하고 서류 정리하고 숫자를 맞추는 이들에게는 말하기와 쓰기 능력이 필요 없고 주어지지도 않는다. 듣기와 읽기만 필요한 토익이 승진의 필수조건인 이유와 자연스럽게 일치된다.

물론 반론도 나올 수 있다. 군사정권이 끝나고 문민정부가 들어섰지만, 군사문화의 잔재가 또렷하게 남아있던 그 시대에는 모두 그렇게 살지 않았냐는 것이다. 최 대리도 홍 과장 앞에서 벌벌 떨며 상명하복에 응한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최 대리는 스피킹은 어려워도 라이팅(writing)은 가능한 대졸 사원이다. 최초로 페놀 방류에 의혹을 제시하는 기안서의 틀은 이자영(고아성)이 만들었지만 결국 상신한 건 최 대리였다.

발화(發話)는 권력이다. 고졸 여사원들은 발화권력이 없다. 말할 수 없는 존재다. 공익신고자(=내부고발자)는 영미권에서 휘슬블로어(whistle-blower)라고 불린다. 호루라기 부는 사람이란 뜻이다. 휘슬블로어는 인간의 말이 아니라 호루라기를 불어 경고를 한다. 말을 해도 듣지 않고 쉽사리 은폐되기 때문이다.

클라이막스에서 또박또박한 한국식 영어발음으로 당당하게 스피킹 하는 자영(고아성)의 모습에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이유는 호루라기의 경고음이 아니라 주장을 담은 인간의 언어로 당당히 외치는 존재로 성장하는 드라마 끝에 등장한 덕분이다. <삼토반>의 흥행 역주행이 가능한 까닭은 이렇게 정교한 설계의 영향이 크다. 여성들의 연대만을 강조하는 단층적 작품에서 그치지 않고 다층적인 레이어로 다양한 층위에서 관객과의 접점을 만들어 가도록 각본이 구성됐다.

영화 <삼진그룹 영어토익반>

Where가 아니라 Who를 더 고려했다면

하지만 <삼토반>의 영화적 완성도가 높다고 선뜻 칭찬만을 남기기는 어딘가 꺼려진다. 이종필 감독은 ‘배경으로의 실화는 있지만 스토리로서의 실화는 없다’는 점이 어려웠다고 인터뷰했다. 그의 말처럼 영화는 후반부에서 좌회전 깜박이 켜고 우회전 하는 것마냥 방향을 잃고 흔들린다. 전작인 <전국노래자랑>, <도리화가>가 평이한 전개라는 비판을 받아 반전을 넣어 마지막까지 긴장감을 유지해야 한다는 강박이 있어서였을까.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건지 헷갈린다.

자본 앞에서 철저히 무시된 기업윤리와 생명경시 풍조를 고발하는 사회고발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면 사건의 해결방법으로 가장 냉혹한 자본논리인 ‘1주1표’를 택한 건 모순적으로 보일 수 밖에 없다. 누가 가장 악당인지도 모호하다. 해외자본의 사주를 받고 헐값에 기업을 매각하려던 빌리 박인가? 노조가 꼴보기 싫다며 무단으로 폐수방류를 지시한 오 상무인가? 능력없는 아들을 낙하산으로 보낸 탓에 모든 사건의 빌미를 제공한 오 회장은 심지어 직원들의 절대적인 신임을 얻고 있다.

이처럼 모호한 악당의 존재가 <삼토반>의 가장 큰 문제다. 아동유괴 범죄을 다룬 <친절한 금자씨>를 잠시 떠올려보자. <금자씨>에는 등장인물을 소개하거나 심리를 설명하기 위해 보이스오버 내레이션이 자주 사용된다. 하지만 금자(이영애)에게 유괴를 교사한 백 선생(최민식)의 심리를 드러내는 내레이션은 한 문장도 없다. 이에 대해 박찬욱 감독은 “자기 마음이나 처지나 그런 것을 설명할 자격이 없는 놈이죠”라고 이유를 밝혔다.

빌리 박과 오 상무는 사건이 해결된 뒤 구속수감이라는 법의 철퇴를 맞았지만, 내부고발의 배후조종자로 조용히 생을 마감한 봉 부장은 자기 사람인 보람(박혜수)과 여사원들을 알뜰히 챙겼다는 이유만으로 애도를 받고 정신적 멘토로 추대되기까지 한다. 전재산이 29만원 밖에 없다던 내란수괴도 자기 부하들은 알뜰하게 챙기던 보스 중의 보스였다고 한다. 그 시절에 여성의 재능을 알아보고 다독여줬다고 해서 너무나 쉽게 면죄부를 발급받는 장면이 쉽게 납득이 될까.

<삼토반>의 모티브이자 지금까지도 낙동강 페놀 방류사건이라고 잘못 이름 붙여진 ‘두산그룹 페놀 무단방류 사건’은 임산부를 비롯해 대구에서 부산에 이르는 경상도 주민들에게 어마어마한 피해를 입혔다. 이종필 감독은 ‘다른 내부고발 이야기들과 달리 기업 밖이 아니라 안에서 싸우는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며 ‘계몽적이고 도식적인 결론으로의 비약은 인물들의 잘못이 아니다’라고 밝혔지만, 안팎이라는 장소를 고민할 게 아니라 누구와 싸울지 판단하는 피아구분에 더 신경썼어야 하지 않았을까하는 아쉬움이 진하게 남는다.

영화 <삼진그룹 영어토익반>

후속작을 기대하며 외쳐보자

진지한 주제에 함몰되지 않고 경쾌한 스텝으로 복합적인 레이어를 뚫고 나오는 통쾌한 카타르시스를 남기는 영화인지. 레트로에 기대어 찜찜함만 남기는 모순적 결말인지에 대해서는 더 많은 논쟁이 필요해 보인다. 하지만 주인공 3인방. 고아성, 이솜, 박혜수의 매력과 조화만큼은 단연 만장일치일 거라고 단언할 수 있다. 전문가가 아닌 평범한 시민들의 다소 헐렁한 탐정물이자 성장영화의 성격을 띄고 있는 ‘코지 미스터리’라는 세부장르로의 성공은 이 셋의 활약이 없었다면 애초에 불가능 했을 것이다.

각본을 쓴 홍수영 작가에 따르면 <삼토반> 초안에서는 ‘페놀방류사건’과 ‘미투운동’ 두 가지 아이템을 다루었다고 한다. 25년이 흘러 2020년을 배경으로 3인방이 멘토로 활약하는 후속작에서 미투운동을 다룬다면? 자연스럽게 티켓을 예매하는 사람도 적지는 않으리라. 주목하는 사람이 적었던 27세 커리어우먼들의 이야기가 코로나로 침체됐던 한국영화의 숨통을 틔웠다면, 52세 중년여성들의 이야기로 코로나 이후의 한국을 상상하는 것도 ‘이그젝틀리 파서블’하지 않을까? 그러니 그날까지 힘내서 외쳐보자. 아이 캔 두 잇. 유 캔 두잇. 위 캔 두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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