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철수 교수의 갑작스런 등장으로 크게 흔들렸던 서울시장 구도가 서서히 확정되어 가고 있는 분위기다. 안철수 교수가 만들어낸 비정치인, 비정당인 선호 구도에 여권과 야권에서 각각 이석연 변호사와 박원순 아름다운재단 상임이사가 출사표를 던졌고 이에 대한 각 정당의 새로운 반격이 가해지는 모양새다.

여권의 경우 대중적 경쟁력을 무기로 갖고 있는 나경원 최고위원이 초반에 거론됐으나 친박계의 부정적 정서 때문에 차선을 찾는 분위기로 흘러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친박계로서는 나경원 최고위원이 범친이계인사로 분류될 수 있고 이번 서울시장 보궐선거의 원인이 된 오세훈 전 서울시장의 주민투표에 대해 '성전'이라 부를 정도의 적극적 옹호 입장을 피력했기 때문에 부담스러웠을 수 있다. 박근혜 전 대표 입장에서는 최대한 오세훈 전 서울시장이 만들어 놓은 선거 구도에서 벗어나 무상급식 등의 복지 정책이 중심적인 이슈가 되지 않으면서 승리할 수 있는 최선의 구도가 만들어지길 바랐을 것이다. 안철수 교수의 등장 등으로 대세론이 흔들리는 상황에서 서울시장 보궐선거에 조기등판하지 않을 수 없고, 여기서 성과를 내지 못하면 대세론에 더 큰 상처를 입을 수 있는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즉, 박근혜 전 대표로서는 서울시장 보궐선거 지원유세에 등장하지 않아도 감점, 등장해서 져도 감점인데 이기면 본전을 지키는 정도라는 점이 매우 부담스러운 상황이다.

▲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좌)와 나경원 최고위원(우)
게다가 나경원 최고위원과 박근혜 전 대표의 성별이 같은 여성이라는 점도 선거 구도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판단을 했을 것이다. 여성 서울시장이 탄생하면 여성이 대통령을 하는 것에 대한 반작용 정서가 나타날 수 있다. 반대로 여성 후보가 서울시장 선거에서 낙마하면 '여성은 한국사회에서는 아직 시기상조'라는 부당한 관념이 강화될 수 있다. 이래도 문제, 저래도 문제다. 때문에 친박계 인사들로서는 나경원 최고위원이 서울시장 선거에 출마하는 것 자체가 별로 달가운 일이 아닐 수 있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당내에서는 나경원 최고위원보다 적합한 인물을 도저히 찾을 수 없는 상황이다.

때문에 등장한 것이 '외부 영입론'이다. 친박계 인사들은 지속적으로 '종합 행정 경험이 있는 사람'의 서울시장 선거 출마를 이런 저런 경로를 통해 주문해왔다. 그리고 이명박 대통령 역시 이러한 요구에 일부 화답하는 언급을 통해 세간에서는 김황식 총리가 나서게 되는 것 아니냐는 소문이 있었다. 하지만 총리가 서울시장에 출마하는 모양새가 좋지 않기 때문에 불발로 그치고 만 것 같다.

사실 친박계 인사들이 김황식 총리를 선호했던 또 하나의 이유는 김황식 총리의 고향이 호남이라는 점이었을 것이다. 야권의 유력한 후보 박원순 이사의 고향은 경남 창녕이다. 이런 상황에서 여당이 호남 출신의 인사를 후보로 내면 여당 대 야당, 보수 대 진보, 영남 대 호남, MB 대 반MB의 전통적 선거 프레임을 희석시킬 수 있고 그렇게 하는 것이 전체 선거 구도에 도움이 되리라 생각했을 것이다. 일종의 전술적 지역주의다.

범여권의 또 다른 후보 이석연 변호사의 출마는 바로 이 맥락에서 봐야 한다. 이석연 변호사의 고향 역시 호남이다. 게다가 박원순 이사의 출신 조직인 참여연대와 여러모로 비교되는 경실련 출신이다. 만약 이석연 변호사가 범여권 후보가 되어 박원순 이사와 1:1로 맞붙게 된다면 지금까지와는 다른 새로운 선거 구도가 형성된다.

하지만 역시 문제는 경쟁력이다. 이석연 변호사의 경우 기대했던 것만큼의 지지는 획득하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렇게 되면 결국 여권의 서울시장 후보 자리는 돌고 돌아서 나경원 최고위원에게 다시 돌아가게 될 가능성이 높아진다. 친박계 인사들도 '나경원 최고위원을 딱히 비토하지는 않는다'는 언급을 흘리기 시작했다. 일각에서 이석연 변호사의 불출마, 사퇴 등을 예상하는 한 이유다. 비정당, 비정치에 대한 정당정치의 반격이 시작되는 셈이다.

▲ 손학규 민주당 대표(좌)와 박원순 서울시장 후보(우)
야권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이러한 흐름이 나타나고 있는 것 같다. 원래 박원순 이사 출마는 손학규 대표 측이 주도하려고 했을 것이다. 이것을 민감한 문제로 여기고 정동영 최고위원과 동맹을 맺고 있는 천정배 최고위원이 매우 빠른 타이밍에 출마선언을 하여 '천사인 볼트'라는 별명을 얻기도 한 것을 생각해보면 이러한 심증은 더욱 굳어진다.

문제는 안철수 교수의 등장 덕분에 박원순 이사는 이미 손학규 대표의 손을 떠난 문제가 됐다는 것이다. 이에 더해서 손학규 대표로서는 거센 역풍까지 맞게 됐다. 당외 인사들이 이렇게 큰 이슈의 중심에 설 동안 도대체 민주당은 무엇을 했느냐는 불만이다. 한명숙 전 총리의 불출마를 계기로 박원순 이사의 민주당 입당을 추진해보려고도 했으나 잘 안 됐다. 오히려 박원순 이사 측은 민주노동당 등 진보세력에 먼저 손을 내미는 제스츄어를 취하고 있다.

따라서 손학규 대표 입장에서는 당내 인사들에게 서울시장 후보 경선에 출마하라는 '격문'을 날릴 수 밖에 없는 입장이 됐던 것이다. 천정배 최고위원이 출마를 선언할 때 되도록 경선을 안 하려고 했던 입장과는 완전히 딴판이다. 손학규 대표 측에 있는 인사들이 몰려가 설득에 설득을 거듭한 끝에 박영선, 추미애, 신계륜이라는 새로운 멤버들이 긴급 투입됐다. 박영선 정책위의장에게는 새로운 정치 이력으로의 도약을 준비하는 희생을 요구했을 것이고, 추미애 의원에게는 '추미애 노조법'으로 손상된 이미지를 회복할 수 있는 기회로 작용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했을 것이다.

손학규 대표 입장에서 가장 좋은 그림은 박원순 이사가 입당을 결심하고 나머지 경선 후보들이 사실상의 들러리를 서며 결과적으로 이기는 것이다. 이러면 손학규도 살고 박원순도 살고 안철수도 산다.

두 번째로 좋은 그림은 민주당 박영선 정책위의장이 박원순 이사를 이기고 서울시장에 당선되는 것이다. 이러면 손학규는 살지만 박원순, 안철수는 죽는다. 안철수 교수가 잠재적 대권 경쟁자이므로 이 경우가 좋은 것 아니냐는 판단을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어차피 출마를 안 할 것이라 얘기하는 상황에서 그런 계산은 지금 의미가 없다. 더군다나 이 상황이 현실이 되면 진보세력의 지지를 잃을 수 있다. 자기가 판을 만들어 놓고 결국 박원순 이사를 버린 그림이 되기 때문이다.

가장 안 좋은 그림은 그냥 서울시장 선거를 지는 것이다. 이러면 손학규의 수도권 프리미엄도 없어지고, 서울시장 후보 경선 과정에서의 잡음 때문에 리더십도 없어진다. 게다가 12월에 당대표 직을 내놔야 하기 때문에 이것을 만회할 시간도 갖지 못하는 상황이 된다.

그렇다면 박근혜 전 대표 입장에서는 어떨까? 그의 입장에서는 서울시장 선거를 이기든 지든 가시밭길을 걸어가게 될 가능성이 크다. 그가 나서서 서울시장 선거를 이기면 그럭저럭 대세론을 이어갈 수 있게 될테지만 그럴 가능성이 크지 않다. 서울시장 선거를 어떤 형태로든 지는 순간 박근혜 전 대표는 엄청난 도전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범친이계 인사들을 중심으로 '박근혜 불가론', '대표선수 교체론' 등이 급격하게 퍼지기 시작할 것이고, 이것이 당내 역학구도에 영향을 미쳐 공천 문제와 맞물리면 박근혜 전 대표는 지금 단언하기는 시기상조지만 그야말로 붕괴할 수 있다.

이것이 일각에서 이번 서울시장 선거를 손학규와 박근혜의 운명을 가르는 사건이 될 것이라고 관측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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