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스=이정희] 넷플릭스 영화 <에놀라 홈즈>는 낸시 스프링어의 청소년 소설 『에놀라 홈즈 미스터리』 1권 ‘사라진 후작’을 영화화한 작품이다. 낸시 스프링어는 “<셜록 홈즈>에게 여동생이 있었다면?”이라는 질문으로 소설을 연다. 여전히 다른 버전으로 각색되어 21세기에도 회자되는 명탐정 셜록 홈즈. 그에게 여동생이 있었다면, 그녀도 셜록처럼 '탐정'의 능력을 지녔을까?

셜록 홈즈의 21세기 버전 <셜록>에서 이미 여동생으로 유로스가 등장한 바 있다. 셜록만큼의 지적 능력을 가졌으면서, 또한 셜록보다 더 '사이코패스'적인 유로스의 등장은 그 자체로 극적 긴장감을 자아냈다. 그렇다면 원작의 빅토리아 시대에 등장한 셜록의 동생은 어떤 모습일까?

셜록의 동생, 홀로 엄마를 찾아 떠나다

에놀라(밀리 바비 브라운 분)는 자신의 오빠 셜록(헨리 카빌 분)을 '학자며 화학자이자 최고의 바이올린 연주자이자 사격의 명수, 검술사, 권투선수, 명석한 연역적 사상가'로 소개한다. 그런 오빠의 동생 에놀라는 어떨까? '읽을 수 있고 쓸 수 있고 산수도 잘하며, 새 둥지도 찾을 수 있고 지렁이도 파낼 수 있고 고기도 잡을 수 있고 자전거도 탈 수 있다’고 영화 초반 자신을 소개한다.

그런데 에놀라의 이런 정체성은 에놀라가 살던 시대가 요구하는 여성의 정체성에 '위배'된다. 여왕 빅토리아가 지배하던 '해가 지지 않는 나라' 영국은 신사라 불리는 남성들이 사회적 주도권을 가지고 세상을 점령하던 때다. 여성들은 영화 속에서 오랜만에 돌아온 두 오빠가 에놀라를 보고 질색하듯, 거기에 후견인을 자처한 큰오빠가 에놀라를 기숙학교에 보내 강제적인 교육을 시키려고 하듯 '정숙한 아내'로서 존재가 여성의 전부라 인식되던 시절이다.

대나무 광주리 같은 걸로 엉덩이를 부풀리고 물고기 뼈로 만든 갑옷 같은 보정물로 허리를 잔뜩 조인 옷을 입고, 정숙하게 말하고 행동하는 것을 배우고 바느질로 시간을 보내야 하는 여성들. 에놀라는 그 시절의 여성들에게 요구되는 것을 하나도 배우지 않은 대신, 읽고 쓰고 생각하는 법을 배웠다. 누구에게서? 바로 에놀라의 엄마 유도리아에게서다.

엄마는 거기에 한 술 더 떠서 에놀라에게 낱말 맞히기를, 스스로 자신을 지킬 수 있는 호신술을 가르쳤다. 일찍이 집을 떠난 두 오빠들, 에놀라는 엄마 유도리아를 통해 당시 여성들과는 다른 길을 걷게 되었다. 그런데 그런 정신적 보호자이자 유일한 스승이었던 엄마가 에놀라가 16살 되던 생일에 사라졌다. 돌아온 오빠들은 엄마를 찾는 한편, 그들이 보기에 천방지축인 에놀라를 기숙학교로 보내려 한다.

하지만 에놀라는 오빠들의 그런 결정과 달리 '스스로' 엄마를 찾아 길을 떠난다. 에놀라의 이름 에놀라를 거꾸로 하면 'alone', '홀로' 남겨진 소녀 에놀라가 '홀로' 엄마를 찾는 여정을 떠나게 된 것이다.

사라진 엄마, 사라진 후작

영화는 <사라진 후작>이란 원작 제목처럼, 에놀라가 기차에서 만난 튜크스베리 자작이며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후작의 지위까지 이어받은 '소년'의 실종 사건과, 에놀라의 엄마 찾기가 엇물리며 셜록 홈즈의 원작보다 더 시대적 배경이 생생한 한 편의 추리극으로 탄생되었다.

영화의 배경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극중에도 등장하는 참정권 운동이다. 영화에서 에놀라가 읽었다던 울스턴크래프트의 책. 1792년 울스턴크래프트는 <여성의 권리 옹호>를 통해 여성의 인권신장을 주장했고, 이 책이 여성 참정권 운동의 시작을 알렸다.

오늘날 너무도 당연하게 여겨지는 성별 불문 '한 표의 행사'. 하지만 참정권 운동의 역사는 그 자체로 여성해방운동의 지난한 투쟁의 역사가 된다. 1865년 런던에서 여성참정권위원회가 결성되었지만 1967년 제출된 선거법 수정안은 부결되었다. 하지만 이 부결은 외려 전국 각지에서 참정권위원회를 발족시키게 된다.

왜 같은 인간임에도 여성들의 권리는 외면당했을까? 대부분 가정에 머물렀던 여성들은 납세의 의무를 수행하지 못했다고 여겨졌으며, 심지어 남편에게 아내의 재산을 통제할 권리가 있었던 시대였다. 그러기에 여성들의 주장은 의회에서 번번이 거부되었다. 이에 여성들은 보다 적극적으로 자신들의 주장을 개진하려 했다. 영화 속 에놀라가 찾아간 창고 속에서 등장한 '다이너마이트' 등이 그런 여성들의 간절하고도 적극적인 움직임을 단편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하나뿐인 딸 에놀라에게 당당하고 주체적인 교육을 시켰던 어머니 유도리아. 그런 어머니가 에놀라마저 들어오지 못하게 한 채 늦은 밤 회합을 가졌다. 그리고 사랑하는 딸 에놀라를 홀로 놔둔 채 집을 떠났다. 후에 만난 어머니는 그게 사랑하는 딸을 지키고자 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고 토로한다.

여성 참정권 운동이 격화되어가던 시대적 상황, 사랑하는 딸을 홀로 놔둔 채 집을 떠난 어머니가 사회적 운동의 일원이 되어 운명적인 선택을 했음을 드러내며 가정이라는 울타리를 넘어 '사회적 존재'로서의 여성에 대한 이야기가 펼쳐진다. 그리고 이런 엄마의 선택은 에놀라가 정의감으로 개입한 ‘후작 실종 사건’의 실체가 드러나며 서로 다른 길로 달렸던 열차의 궤도가 하나로 만나듯 하나의 흐름으로 합쳐진다.

의회에서 통과되어야 할 참정권 법안, 진보적인 사상을 가졌던 튜크스베리의 실종 사건, 그리고 참정권 운동을 위해 집을 떠나야 했던 엄마의 실종 사건이 에놀라라는 이제 막 세상에 자신을 던진 '소녀 탐정'을 통해 하나의 사건으로 해결되게 된 것이다.

처음 기차에서 해프닝처럼 조우한 에놀라와 튜크스베리. 기존 남녀 역할을 전복적으로 해석한, 해결사 여주인공과 연약한 남성 캐릭터의 ‘로맨틱 코미디 버전’인가 싶었던 영화는, 에놀라의 전복적 캐릭터의 강점을 발산시키면서도 남주인공의 반전 매력을 통해 사건 해결의 열쇠를 제공한다. 무엇보다 여주인공이 연애 감정이 아니라, 정의감으로 사건에 뛰어들게 되는 상황은 영화가 제시하고자 하는 주제 의식에 걸맞다. 또한 어디선가 셜록이 튀어나올 것 같은 국면에서조차, 아니 심지어 셜록보다 한 발 빠르게 홀로 사건을 파헤치고 해결해 나가는 상황은 그 자체로 새로운 여성 히어로의 탄생을 알린다.

결국 에놀라는 그 도전적인 ‘탐정 데뷔전’을 통해 튜크스베리 후작 실종 사건을 해결함은 물론, 사라질 뻔한 튜크스베리가 의회에 입성하여 한 표를 행사하게 함으로써 엄마로 하여금 사랑하는 딸마저 두고 사라질 수밖에 없었던 참정권 운동의 물꼬를 터준다. 자전거도 잘 탈 수 있다 말하던 시골 소녀 에놀라는 ‘사라진 후작 사건’을 통해 이제 당당하게 런던에서 탐정으로서의 삶을 연다. 초반 무관해 보이던 두 실종 사건이 결국 참정권 운동이라는 물결 속에서의 '주체적인 선택'의 결과였음을 드러내며 보수적인 빅토리아 시대를 살아가던 진보적 인물들의 면면을 보여준다.

2018년 작 다큐멘터리 <우먼 인 할리우드>는 할리우드의 대표 여배우를 비롯해 할리우드에 종사하는 배우, 감독, 제작자 등 여성 96명의 목소리를 담았다. 이 다큐는 원더 우먼이 등장하고 TV 수사 시리즈에서 여성 법의관이 등장한 이후 그걸 보고 자란 여성들의 선택이 달라졌다고 말한다.

에놀라가 ‘탐정’ 에놀라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딸을 홀로 남겨두고 여성 참정권 운동을 위해 집을 떠날 수 있었던, 아니 딸이 홀로 남더라도 충분히 주체적인 삶을 살 수 있도록 키워낸 유도리아가 있었기 때문이다. 진보적인 사상을 가진 엄마가 있었기에, 주체적으로 성장한 딸이 참정권 운동의 물꼬를 터주게 된 것이다. 마찬가지로 이제 영어덜트물 <에놀라 홈즈>를 보고 자란 이 시대의 누군가에게 탐정은 고전의 '셜록'이 아닌 '에놀라'로 기억될지 모를 일이다. 그리고 그렇게 기억된 탐정 에놀라는 그 미래의 선택지를 또 다르게 열어줄지도 모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