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스=이정희] 코로나19로 본의 아닌 언택트 삶이 이어지는 상황이 사람들로 하여금 정신적 혼란을 불러온다고 한다. 뜻대로 되지 않은 여러 가지 일들이 자신의 감정이나 상황을 평소와는 다르게 이끌어낸다. 아마도 미래의 누군가는 이 시대를 '우울의 시대'라 정의 내릴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데 한없이 마음이 가라앉고 행동마저 위축되는 증상이 코로나가 종식되면 없어질까? 어쩌면 코로나 그 이전, 이미 우리의 삶에서 우울은 배태되고 있었던 게 아닐까? 남편과 주변으로부터 '정신병리학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낙인찍힌, 그래서 정신병동으로 강제 이송될 위기에 처한 한 여성에게서 그 답을 찾아보는 건 어떨까? 바로 영화 <어디갔어, 버나뎃>의 버나뎃 폭스이다.

사회부적응 주부 버나뎃

영화 <어디갔어, 버나뎃> 포스터

시애틀의 한적한 교외 주택가, 정갈하게 손질된 단독주택들 사이에 귀신이라도 나올 것처럼 블랙베리 덩굴을 뒤집어쓴 집 한 채가 있다. 옆집에 사는 오드리가 정원사를 앞세우고 찾아와 이 덩굴을 쳐낼 것을 요구하는 처지에 몰린 이 집에는 버나뎃 폭스(케이트 블란쳇 분)가 그의 남편 빌리(빌리 크루덥 분), 딸 비(엠마 넬슨 분)와 함께 살고 있다.

버나뎃 폭스가 '문제 인물'로 취급당하는 이유는 집을 손보지 않기 때문만이 아니다. 마치 반사회적 인격장애라도 가진 것처럼 이웃은 물론 외부인들과의 접촉을 꺼리는 그녀. 교제가 활발하게 이루어지는, 딸이 다니는 학교 학부모 사회에서 그녀는 '은둔형 외톨이'이다. 그런데 그저 은둔하는 것도 여의치 않다. 하교하는 딸을 데리러 간 버나뎃의 과격한 행동이 동네 주민의 '가해자'로 소문의 주인공이 되게 만든다.

소문을 불평할 것도 아니다. 오드리 등을 비롯하여 주변 엄마들을 '각다귀'라 부르며 적대적으로 대하다 못해 '각다귀' 운운하는 플랜카드까지 내건 버나뎃의 태도는 주변 사람은 물론, 남편에게도 쉽게 이해받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그렇게 온라인 비서 만줄라에만 의지해 세상과 적극적으로 '단절'해왔던 버나뎃. 그런 그녀의 삶에 변화가 들이닥쳤다. 우수한 성적으로 중학교를 졸업하고 곧 이 집을 떠나 기숙학교로 갈 딸이 졸업 기념으로 엄마, 아빠에게 남극 여행을 제안한다. 바쁜 남편이 거절하기를 원했지만 하나밖에 없는 딸의 간절한 소망을 외면할 수 없었던 남편이 얼버무리고, 결국 결정된 가족 남극 여행은 그 자체로 자신을 사회로부터 격리시킨 버나뎃에게는 '멘붕'이다.

영화 <어디갔어, 버나뎃> 스틸 이미지

그런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흉가 같은 블랙베리 덩굴 지지대를 잃은 버나뎃 쪽의 언덕이 폭우에 한참 학부모 모임으로 들썩이던 오드리네 집으로 쏟아져 내렸다.

거기다 그간 버나뎃이 유일하게 의지해 왔던 온라인 비서 만줄라가 러시아를 기지로 한 국제 범죄집단이라며 FBI가 들이닥친다. 그러자 안 그래도 주변 사람들에게 버나뎃과 관련한 사건들을 전해 들으며 우려가 깊어졌던 남편 빌리는 이제 버나뎃에게 정신과 강제 입원 같은 조치를 할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 난데없이 나타난 FBI, 자신의 말을 들어주는 대신 정신과 치료진을 앞세운 남편. 버나뎃은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

그런데 버나뎃이 사라졌다. 하늘로 솟은 듯 땅으로 꺼진 듯, 버나뎃의 자취가 없어졌다. 버나뎃은 어디로 간 것일까?

사라진 버나뎃

영화 <어디갔어, 버나뎃> 스틸 이미지

드러난 사건 자체로만 보면 사회부적응에 우울증이 심해 자살 우려가 있는 주부의 실종이지만, 그 속내에는 '좌절한 건축가이자 독박육아에 지친 주부' 버나뎃이 있다.

지금은 흉물 같은 시애틀 교외의 집에 살며 커다란 선글라스를 끼고 사람과의 접촉을 꺼리는 이상한 사람이지만, 한때 버나뎃은 20대 나이에 건축계의 아이콘이 되었던 천재적인 건축가였다. 그녀가 건축한 집이 곧 이슈가 되었던 시절, 그래서 당대 내로라하는 중견의 남성 건축가들 사이에서 당당하게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었다. 하지만 야심 찼던 젊은 건축가 버나뎃의 열정은 그녀가 건축한 집이 단 몇달 만에 철거되는 사건과 함께 주저앉아 버렸다.

남편과 함께 LA를 떠나 시애틀로 온 버나뎃. 하지만 새로운 곳에서 건축가로서 다시 시작해 보기도 전에 그녀의 삶에 새로운 국면이 전개되었다. 아이를 갖고 싶었지만 거듭된 몇 번의 유산, 겨우 태어난 아기는 생사조차 불투명했다. 자신의 일은 전폐하고 오로지 아이를 키우는 데만 전력하는 과정에서 가정에 신경을 쓸 겨를이 없었던 남편과의 사이는 점점 더 멀어져만 갔다.

그렇게 안팎으로 상처받은 버나뎃이 스스로를 지켜내기 위해 선택한 방법이 '단절'이었다. 하나뿐인 딸 비에게는 세상 둘도 없는 엄마였지만, 딸을 제외한 모두에게 버나뎃은 철벽이었다. 그녀가 자신을 지키기 위한 시간은 동시에 불면, 불안과의 싸움이었다.

버나뎃, 자신을 넘다

서점에 가면 우울을 주제로 한 책들이 넘쳐난다. 안 그래도 원자화된 개인의 우울이 20세기의 대표적인 병리 현상이었는데, 코로나 팬데믹은 그런 사회적 경향성에 가속 페달을 밟았다. 우울증이라 대변되는 불면과 불안은 자신을 지키기 위한 대표적 '방어기제'이다. <어디갔어 버나뎃>은 사회적, 가정적으로 상실감에 빠진 한 여성의 상황으로 우리 사회 보편의 아픔을 길어낸다.

하지만 영화는 그 아픔에 천착하는 대신,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라고 말하듯 버나뎃의 인생 역전을 통해 아픔을 승화시킨다. 우연히 식당에서 예전 동료를 만났던 버나뎃. 그 동료에게 두서없이 그리고 장황하게 자신이 처한 상황을 전하자, 동료는 명쾌하게 진단을 내렸다. “버나뎃, 너는 다시 건축을 해야 해. 너 같은 예술가가 자신의 일을 하지 않으니 당연히 고통스럽지.”

영화 <어디갔어, 버나뎃> 스틸 이미지

그렇다면 사라진 버나뎃은 어떤 선택을 했을까? 그저 정신병원 입원이라는 상황에서 도망치기에 급급했던 버나뎃은 딸과 약속했던 남극 여행선에 우선 몸을 싣는다. 사람과 부딪치기조차 힘든 버나뎃에게, 심지어 해류에 따라 요동치는 남극행 여행선은 그 자체로 '지옥행'이었다.

정신을 잃고 쓰러지다시피 했지만, 배의 창문을 통해 눈에 띈 남극의 빙산 그 순백의 세계에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끌리듯 다가선다. 그리고 우연히 만나게 된 남극 연구원을 통해 전해 들은 '남극 기지 재건축' 소식이 오랫동안 침잠했던 건축가로서의 버나뎃을 깨운다.

그동안 버나뎃은 건축가로서의 정체성을 외면해왔다. 오랫동안 자신의 실패에서 한 발자국도 나설 자신이 없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연속되는 유산은 그녀에게 자존감마저 앗아가 버렸다. 오로지 아이를 지킨다는 맹목적인 모성만으로 버텨왔던 버나뎃. 자신을 괴롭히는 정신병적 징후조차 외면했던 버나뎃은 남극의 빙산 앞에서 비로소 자신을 직면한다.

뉴욕타임즈 84주 연속 베스트셀러를 차지했던 마리아 셈플의 동명의 원작은 영화와 달리 편지, 이메일, 문자 메시지, FBI 서류로 구성된 독특한 형식의 소설이다. 이 색다른 구성의 원작을 <비포 선 라이즈> 시리즈와 <보이후드>의 리처드 링클레이터 감독이 버나뎃이라는 여성 캐릭터가 돋보이는 작품으로 재탄생시켰다. 물론 건축가로서의 좌절과 모성의 상처를 사회부적응에 우울증 주부로, 그리고 다시 건축가로서 열정을 되살려낸 인간 승리의 '강약'을 매력적으로 표현해내는 데 케이트 블란쳇이라는 배우의 역할이 지배적이다.

남극 바다에서 대번에 자신의 열정을 되살렸다는 상황은 '코미디'라는 장르에도 불구하고 '작위적'이어 보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방점이 찍혀야 하는 부분은 '내가 외면하고 있었던 나 자신'이라는 지점이다. 영화는 그런 '나와의 직면'을 위해 남극이라는 장치를 보다 드라마틱하게 활용하며 보는 이들에게 스스로 자신을 가둔 울타리에서 벗어나라 독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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