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스=김민하 칼럼] 강경화 외교부 장관이 연거푸 송구하다고 한 것에 신선한 느낌을 받았다. 사실 강경화 장관은 본인 또는 외교부 관련 논란이 불거질 때마다 송구하다는 발언을 반복해왔다. 따라서 기준을 강경화 장관에 놓고 보면 송구하다는 말은 상투적이다. 그럼에도 신선한 느낌을 받은 것은 오랜만에 이 정권 관계자들이 그나마 적절한 수준의 대응을 하는 모습을 본 듯 했기 때문이다.

강경화 장관의 배우자인 이일병 연세대 명예교수는 세상 일에 관심을 두지 않는 타입의 사람 같다. 이 난리에 외교부 권고를 무시하고 장관의 배우자가 요트 구매라는 불가피한 사유로 볼 수 없는 이유로 출국을 강행한 것은 상식을 초월하는 일이다. 본인의 사회적 위치와 이후 불거질 논란을 자각했다면 이런 일은 있을 수 없다. 그러니 세상사에 무관심하거나 알고 판단할 능력이 있어도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 사람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다.

권고를 무시한 것은 위법행위로 볼 수 없고, 이에 수반되는 여러 불이익을 감수하기로 하였다면 공적으로 문제 삼기는 어렵지 않느냐는 일각의 항변은 나름대로 일리가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사회적 비판은 여전히 가능한데, 불법의 여부를 떠나 고위공직자의 가족으로서 부적절한 행위를 한 것임을 부정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혹자는 ‘연좌제’를 언급하지만, 도리를 지키지 않았다는 비판을 부당한 근거에 의한 권리의 제한과 동렬에 놓을 수는 없다. 굳이 따지자면 이 사례는 연좌제보다는 노블리스 오블리주에 관한 문제에 가깝다.

노블리스 오블리주는 민주주의적 엘리트 체제의 부속품이다. 여러 법과 제도를 통한 제한에도 불구 지배계층의 특권화를 원천봉쇄할 수는 없으니 알아서 사회적 책임을 더 엄중하게 감당하라는 의미다. 인공신경망을 전공한 은퇴 교수가 지배계층에 속하느냐는 의문도 있겠으나 적어도 외교부 관련 사안에서 장관 배우자가 보이지 않는 특권의 대상이 될 가능성은 늘 있다. 그러니 알아서 적절히 처신해야 한다. 그런데 그러지 않았다. 그러니 사회적 지탄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강경화 장관의 “송구하다”는 발언은 이런 맥락으로 볼 수 있다. 나름 설득을 시도했으나 배우자의 출국을 말리지 못했고 귀국을 종용하기도 어려우나 어쨌든 이런 상황을 야기한 것에 대해선 유감을 표명한 것이다. 보수세력은 송구하다는 말로는 모자라다는 지적을 하고 있고 국정감사에서도 논란이 예고되고 있으나 본인 설득이 안 되면 귀국하게 만들 방법이 없는 게 사실이다. 그런 점에서 보면 강경화 장관으로서는 거듭 사과를 하는 수밖에는 방법이 없다.

강경화 외교부 장관이 5일 오후 서울 외교부 청사를 나서고 있다. (연합뉴스)

문제는 정치적 측면이다. 최근 이 정부와 여당 관계자들은 송구하다고 말하는 정도의 대응조차도 하지 않는다는 인상을 주고 있다. 대표적 사례는 추미애 법무부 장관이다. 검찰이 무혐의 판단을 내린 걸 근거로 보수야당에 일방적 주장에 대해 책임질 것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애초 검찰 조사를 지켜보자고들 한 것은 의문의 여지를 남기지 않는 수사 결과가 나온다는 것이 전제였다. 그러나 검찰의 결론은 논란의 여지가 없는 것이라고 보기 어렵다. 검찰이 추미애 장관과 보좌관 사이에 오간 메시지 내용을 공개한 것도 이런 시각을 뒷받침한다. 두 사람이 “지시는 없었다”고 입을 맞춘 상황에서 불법으로 판단할 근거가 없기에 의심은 되나 기소할 수 없었다는 항변을 한 셈이기 때문이다.

일부 호사가들은 추미애 장관의 지나치게 공격적인 행보는 재보궐 선거 출마 가능성 등을 겨냥한 것이고 여당 역시 이런 정치 일정을 의식하고 있다는 평을 내놓고 있다. 이런 태도는 국정 전반을 책임지는 것보다 선거 등의 정파적 이익을 앞세우는 세력이라는 평가의 근거가 된다. 최근 상황에서 반복적으로 확인되는 것은 보수세력이 주장하는 내로남불이나 이중잣대가 아니라 국정을 주도하는 세력으로서 그에 걸맞은 책임을 지지 않으려는 태도가 이 정권의 가장 큰 문제라는 거다. 문재인 대통령이 취임 초기 이 정권에 대해 ‘피플파워’라고 한 것도, 조국 전 장관이 입각하면서 자신의 선택을 ‘앙가주망’이라고 한 것도 이제는 이런 해석의 대상이 되는 걸 피할 수 없게 됐다.

기득권과 싸우는 개혁가를 자처하려면 최소한 자신들이 상정한 기득권과의 싸움을 성실하게라도 해야 한다. 그러나 문재인 대통령이 취임 당시 약속한 여러 개혁 과제들은 실종됐거나 애초 약속한 형태를 크게 벗어나게 된 게 사실이다. 물론 현실의 벽이 높은 탓일 수 있다. 개혁을 가로막는 현실이 무엇인지에 대한 평가는 다를 수 있으나 적어도 그런 주장을 하려면 스스로 통치 세력의 책임을 다하려는 태도라도 보여야 한다. 그런 태도의 사례를 찾다 찾다 지친 와중에 강경화 장관이 그나마 송구하다고 해 다행이다. 연말 개각의 대상에 외교부 장관이 포함되는지는 또 다른 문제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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