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세훈 서울시장이 주민투표 최종투표율이 발표된 직후인 24일 오후 서울시청에서 입장을 밝히다 고개를 숙이고 있다.ⓒ연합뉴스
결국 일어나야 할 일이 일어나고야 말았다. 오세훈 시장이 진 것이다. 최종투표율은 25.7%. 33.3%에 한참 못 미친다.

▲ 한나라당 홍준표 대표가 24일 오후 여의도 한나라당사에서 서울시 무상급식 주민투표가 무산된 뒤 가진 기자간담회에서 취재진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홍준표 대표는 이날 주민투표에 대해 "잠정 (투표율) 수치가 25.4% 전후로 나오는 것 같다"며 "이번 투표에서 오세훈 서울시장이 사실상 승리했다고 본다"고 말했다. ⓒ 연합뉴스
홍준표의 정신승리법, 정치가 개그콘서트인가?

25%를 넘겼으니 승리한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말하는 홍준표 대표의 말은 초라한 변명이다. 선수들끼리 하는 수준의 얘기라고 쳐도 이해할 수 없는 얘기다. 오세훈 시장이 잘하고 있었는데 불의의 일격을 맞은 것이 아니다. 누구도 하고 싶지 않았던, 모두가 반대하는 주민투표를 오로지 혼자만의 고집으로 여기까지 끌고 왔다. 그래놓고 이제 와서 야당의 비겁한 전략 때문에 승리의 빛깔이 초라해졌다고 말하는 것은 그야말로 뻔뻔한 것이다. 제발 정신들 좀 차리시라. 정치가 개그콘서트인가?

말이 나와서 말인데, 좀 박한 관전평을 해야겠다. 이런 글을 쓸 때 되도록이면 정치인이 생각하고 행동하는 수준에서 설명을 해보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오세훈 시장의 이 몽니는 그런 관점에서도 쉽게 설명 가능한 것이 아니다. 누가 봐도 망하는 길로 혼자 달려가는 것을 보면서 혹시나 무슨 비책이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봤다. 그러나 결과를 보면 그것도 아니었던 것 같다. 대체 뭘 믿고 이런 일을 벌인 것인지 생각하고 또 생각해 봐도 알 수가 없다.

오세훈 시장은 한나라당이 먼저 제명해야

오세훈 시장이 정말 나쁜 이유는 시민을 볼모로 잡고 어떤 정치적 질서도 존중하지 않은 채 자기 하고 싶은 대로 다 했다는 것이다. 오로지 오세훈 시장의 고집 때문에 그가 속해있는 한나라당은 내외로 엄청난 후폭풍을 맞게 됐고, 투표에 참여한 시민들은 혼란스러운 감정만을 안게 됐으며, 선량한 많은 시민들이 이 뉴스를 보느라 아까운 시간을 허비해야 했다. 오세훈 시장을 제외하고는 여당 정치인들조차도 주민투표를 왜 하는 것인지, 시장직을 왜 거는 것인지 아무도 이해하고 공감하지 못했다. 이것은 있을 수 없는 정치이며 있을 수 없는 행정이다. 이런 정치인은 비록 온갖 특이한 사람들이 다 모여 있는 한나라당이지만 지도부가 나서서 제명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오세훈 시장은 정치인 하지 말고 그냥 집에서 쉬는 게 모두를 위한 길이다.

아무튼. 이런 정말 웃기는 일이 벌어졌지만 그래도 철마는 달린다. 이런 상황에서도 현실정치에 발을 걸치고 있는 사람이라면 이제부터 벌어질 일과 자신의 정치적 득실을 재빨리 계산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한나라당에게도 차라리 10월 보궐선거가 낫다

우선 한나라당의 전망부터 생각해보자. 당장 오세훈 시장의 사퇴 시점이 문제가 된다. 9월 30일 이전에 사퇴하면 10월에 보궐선거를 해야 하고, 10월 이후에 사퇴하면 내년 총선과 보궐선거를 같이 치르게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누구라도 공감할 수 있듯이 정답은 하루라도 빨리 사퇴를 하는 것이다. 물론 핑계는 많을 수 있다. 시정이 혼란스러워지고, 공백을 최소화해야 하며, 지지해준 시민들에게 최소한의 책임을 져야 하고 등등. 하지만 지금과 같은 상황에 그런 것들이 과연 필요한가? 모든 것을 다 내팽개쳐 놓고 이제 와서 뭘 책임진단 말인가?

한나라당으로서는 보궐선거는 최대한 늦게 하고 싶을 것이다. 당장 10월에 하면 질 가능성이 거의 절대적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냉정히 생각해보면 보궐선거를 10월에 하든 내년에 하든 어렵긴 마찬가지다. 시간을 끌어 봐야 야당에게 공격의 빌미를 주게 될 뿐이다. 한 달 내내 물어 뜯기느니 차라리 빨리 사퇴하고 정리를 해버리는 것이 낫다.

한나라당 입장에서 보궐선거를 10월에 하는 것이 나을 수 있는 이유는 또 있다. 당내의 권력투쟁이 거의 기정사실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친이계 인사들은 투표 패배의 책임을 박근혜 전 대표의 협력 거부에서 찾을 것이고, 친박계 인사들은 오세훈 시장과 대통령, 지도부에서 찾을 것이다. 게다가 9월에 공포의 이재오 장관이 돌아오기라도 하면 한나라당의 계파 전쟁은 그야말로 수습불가의 상황으로 치달을 것이다. 그러느니 10월 선거체제로 가면서 내부를 추스르고 박근혜 전 대표 중심으로 보궐선거에 대응하는 방법을 짜는 수밖에 없다.

박근혜 눈치 보다간 '조갑제 신당'과 '보수의 재구성' 가능성도

부정적일 것으로 예상되는 보궐선거 결과로 인해 박근혜 전 대표가 상처를 입을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오세훈 시장 때문에 이미 상처을 입을 대로 입었다. 무상급식 정책에 대해 가장 열렬히 반대를 표현하고 있는 보수층들이 이번 투표 결과를 보고도 박근혜 전 대표에게 변함없는 충성심을 보여주겠는가? 흔들릴 것이다. 거기에 만에 하나 지금 소문만 무성한 ‘조갑제 신당’같은 프로젝트가 현실성을 갖게 되거나 이회창 전 대표와 같은 사람들이 의지를 가지고 판을 엮는 수순으로 가게 되면 ‘보수의 재구성’과 같은 일이 일어날 수도 있다. 이것의 결론이 97년의 ‘이인제 효과’와 같은 것이 아닐 것이라고 누가 장담할 수 있겠는가?

박근혜 전 대표 측은 되도록이면 다치고 싶지 않겠지만, 계속 몸만 사려서 도대체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오히려 그에게 지금은 지도력을 발휘할 수 있는 적기라고 판단하는 게 현명하지 않겠느냐고 말하고 싶다.

▲ 민주당 손학규 대표가 24일 영등포 당사에서 주민투표결과 방송을 지켜보다 전화를 받고 있다. ⓒ 연합뉴스
오세훈 자폭으로 다시 기회 맞은 손학규

이제 야권으로 와보자. 이번 사태로 인해 가장 운신의 폭이 넓어진 인물은 누구인가? 지금 이 상황이 손학규 대표에게 기회로 작용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지금까지 손학규 대표는 상당히 어려운 상황에서 고군분투해왔다. 정동영 최고위원과의 지루한 싸움에 집중하는 동안 순식간에 반대편에서 문재인 노무현재단 이사장이 치고 올라왔다. 최근 여론조사에서 손학규 대표가 야권 1등을 문재인 이사장에게 내주었다는 기사도 나온다. 한마디로 불안한 상황이다.

하지만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수도권에서 야권의 경쟁력은 누가 뭐래도 아직까지 손학규 대표가 프리미엄을 갖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무상급식 주민투표는 수도권에서 일어난 사건이다. 지금 손학규 대표가 문재인 이사장에게 위협당하는 것은 문재인 이사장이 득표력이라는 실리와 호남 고립 해체라는 명분, 양쪽에서 밀리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지금 이 상황 때문에 정국의 초점은 수도권으로 옮겨왔다. 그리고 대선은 일단 수도권에서 이기면 매우 유리한 게임이 된다는 것은 상식이다.

즉, 지금 손학규 대표는 오세훈 시장의 자폭 덕분에 이제는 민주당이 수도권에서 완전한 승기를 잡을 수 있다는 기대를 다른 사람이 아닌 손학규 대표 자신이 짊어지겠다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한다. 10월 재보궐 선거를 주도하면서 손상된 지도력을 다시 회복하고 연말 전당대회에서 적절한 스탠스를 유지하면서 총선까지 이러한 행보를 이어가는 그림을 그려야 한다. 지금처럼 그냥 생각날 때마다 왔다갔다 하는 모습으로는 장기전에서 문재인 이사장을 이길 수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하는 것은 무리다.

이제 사실상 손학규 대표에게 무엇을 시기상조라 말할 수 있는 그런 여유는 남아있지 않다. 지금 명확한 자기 계획을 가지고 움직이지 않으면 대권레이스에서 초라하게 퇴장당하는 것은 순식간이다. 지금 남에게 뭐라고 훈수를 둘 때가 아닌 신세인 나 같은 진보정당지지자마저도 이렇게 생각할 정도라면 그건 문제가 심각한 거다. 전에도 언급했지만 민주당 대권 후보가 되는 가장 빠른 길은 ‘내가 이길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뿐이다. 손학규 대표의 멋진 승부수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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