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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IDF 2020] ‘기생: 꽃의 고백’- 문화 엘리트이자 가교, 최초의 엔터테이너 ‘기생’[미디어비평] 톺아보기
미디어평론가 이정희 | 승인 2020.08.23 12:17

[미디어스=이정희] EBS 국제다큐영화제(EIDF)가 올해로 17회를 맞이했다. 올해는 코로나19 팬데믹의 상황 속에서 '다시 일상으로- 다큐, 내일을 꿈꾸다'라는 슬로건으로 8월 17일부터 23일까지 7일간 진행되고 있다. 

영화제는 경쟁 부문인 페스티벌초이스(글로벌/ 아시아)와 함께 여성, 예술, 교육, 무형유산 등 다양한 분야의 목소리를 전하고자 한다. '다큐 속 무형유산' 부문에서는 우리나라의 씨름 등 세계 각국의 문화유산이 다뤄지고 있다. 그중 <기생: 꽃의 고백>은 세상의 편견 속에 사라져 가는 '기생'의 문화적 존재를 증명하고자 한다. 

부산 박물관 앞에서 벌어진 '수영야류' 공연. 부산 수영구에서 전승되는 이 '탈놀이'가 전수될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동래 권번이 있었기 때문이다. 일제시대 기생들의 조합을 뜻하는 '권번'이 우리 민속 유산과 무슨 관련이 있을까? 

수영야류 보존회장인 이상열 씨는 동래 권번에서 엄격한 교습 과정을 통해 '수영야류'를 배웠던 시절을 회고한다. 교방 검무, 교방 승무 등등 지금 우리의 문화유산이 그 명맥을 이어오는 데 있어 기생들의 권번, 그 역할은 절대적이었다. 하지만, 그 문화적 영향력은 기생에 대한 사회적 편견과 함께 묵살되고 있다. 

엔터테이너로서의 기생 

EIDF 2020 ‘기생: 꽃의 고백’ 스틸컷

김선부, 왕수복, 신일선, 김영월 등은 1930년대를 풍미한 기생들이다. 뛰어난 미모, 모던한 복식으로 당시 신문물이었던 와인과 커피를 즐겼던 사람들. 기생하면 떠올리는 전통무가 아니라 탬버린을 들고 서양식 댄스를 앞서 도입했던 사람들. <봉황의 면류관> 등 당시 영화계에서 캐스팅 1순위였던 사람들, 오늘날 우리가 '엔터테이너'를 생각하면 떠올려지는 것들을 수행한 당대의 ‘문화인’들이다. 

기생들은 시, 글, 그림, 노래, 춤의 전문가들이었다. 왕실에서 가무를 담당했던 이들을 1패 기생으로, 일단 대중을 상대로 가무를 담당했던 이들을 은근자, 2패 기생으로 분류했다. 이들보다 낮은 3패 기생들이 몸을 파는 일을 했는데 이들로 인해 기생 전체에 대한 편견이 생겨났다. 

초창기 기생들은 예술 활동을 하는 예기들이 많았다. 공연 예술의 한 갈래를 담당했으며, 근현대사 문화의 한 축을 담당했다. 문화계를 선도한다는 자부심을 가졌던 기생들은 국산장려 운동, 고아들을 위한 자선 공연 등에 앞장섰다. 

EIDF 2020 ‘기생: 꽃의 고백’ 스틸컷

평양 기생학교에는 학생들이 200여 명이 넘었으며, 서울에도 자체 학습 프로그램을 가질 만큼 예기로서 기생이 되는 과정에는 체계적인 프로그램이 있었다. 아침 10시면 나와 소리와 춤을 배웠으며, 장구, 춤, 소리는 기생으로서는 기본이었다. 한 달에 한번 시험을 봤고, 못하면 체벌을 당하거나 심하면 밥도 굶겼다. 만점을 받아야 비로소 기생으로 활동할 수 있을 만큼 엄격한 수련 과정을 거쳤다. 

이들 기생은 '권번'이라는 조합에 가입되어 있었다. 권번은 기생들의 이른바 '공연비'를 관리했으며 의상, 코디 등을 담당하는 한편, 어린 기생인 동기들을 키워냈다. 이런 과정 자체는 오늘날 '연예 기획사'의 모습과 그리 다르지 않다. 

기생들의 권번은 서울이나 평양뿐 아니라 부산, 군산 등에도 존재했다. 낮에는 식사를 할 수 있고 밤에는 공연을 하는 '명월관'은 그 자체가 브랜드가 되어 서울은 물론 지방에서도 그 명성을 누렸다. 심지어 도쿄에도 '명월관'이 있었다. 평양 기생이었던 노경월이 1929년에서 32년에 걸쳐 나카타초에 열었던 명월관은 단순한 요릿집이 아니었다. 영친왕의 집과 붙어있어 모종의 지원이 추측되는 명월관은 유학파, 독립투사 등 일본에 온 다양한 우리 지식인들의 교류와 정보 교환의 장이었다. 

부정당한 우리의 전통문화

EIDF 2020 ‘기생: 꽃의 고백’ 스틸컷

일본 명월관에 대한 기록조차도 치밀하게 자료를 모은 일본 쪽 연구로 인해 알 수 있듯이, 당시 기생들의 활동에 대한 역사적 기록은 드물다. 한 시대의 문화인으로 풍미했지만, 이후 사회에 퍼진 기생에 대한 낮은 인식으로 인해 한때 기생으로 활동했던 사람들은 후손들을 의식해서 자신이 기생이었음을 좀처럼 드러내려 하지 않는다. 

그런 면에서 마지막 예기라 할 수 있는 군산 소화 권번 기생이었던 장금도 명인의 존재는 소중하다. 이제 90세, 요양병원에 계셔야 할 정도로 노쇠해졌지만 자신을 기리는 공연에서 '춤출 때 보면 그렇게 예쁘다'는 그 옛날의 평판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춤사위를 선보이신다. 

드센 사주팔자 때문에 기생의 길을 걷게 되었다는 장 명인은 아들을 홀로 키우며 잔칫집 춤 공연을 다니기도 했지만, 모습을 감춘 다른 기생들과 달리 '민살풀이' 명인으로 후학들을 길러냈다.

EIDF 2020 ‘기생: 꽃의 고백’ 스틸컷

그러나 어머니와 딸의 관계와도 같은 장금도 명인과 후학 대진대 신명숙 교수와의 관계는 예외적이다. 우리나라에서 여러 분야의 무형 문화재가 된 사람들치고 기생에게 배우지 않은 사람이 드물지만, 모두 드러내어 기생들로부터의 전수 사실을 말하지 않는다. 아니 기생이란 이유만으로 제대로 된 능력자들이 제외되고, 그보다 낮은 기량의 사람들이 문화재가 되기도 했던 것이 현실이다. 

일본 기생문화가 들어오며 소비적이며 말초적인 저급한 접대 방식이 퍼진 데다, 1930년대 대동아전쟁 당시 일본이 기생에게 가무를 금하고 접대를 하도록 했다. 이때부터 기생을 '접대부'로 부르기 시작했으며, 문화적 담당자로서의 이미지 대신 '접대부'라는 이미지가 대중적으로 각인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당시 기생이었던 분들은 자신들은 '가무'를 담당했다며 자부한다. 기생들에게 전통문화를 배웠던 사람들도 그 배움을 부인하기보다, 그 배움이 소중하다는 솔직한 시인이 필요하다. 엄연히 기생은 조선과 근대를 잇는 전통문화의 담당자였다. 후에 그들을 규정한, ‘접대부’라는 저급한 인식을 넘어 예술인으로 그들의 존재를 다시금 정립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다큐는 말을 맺는다. 그들이 없었다면 오늘날 우리가 보는 많은 전통문화 자체가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의 ‘무형유산’으로 기생의 존재를 복기한 <EIDF 2020 –기생 : 꽃의 고백>은 의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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