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스=김민하 칼럼] ‘대쪽 판사 이회창’의 전설은 독재정권으로부터 시작한다. 완벽한 이력이라고 볼 순 없지만, 어쨌든 그는 대한민국 주류 중의 주류 출신이라는 바탕을 십분 활용해 독재에 굴하지 않고 신념을 지킬 수 있었다. 노태우 정권은 그에게 중앙선거관리위원장을 맡겼는데, 부정선거를 하지 말 것을 정치권에 촉구하다가 1년 3개월 만에 직을 던졌다. 이회창은 이후 공직을 수행하면서 비슷한 행위를 반복하는데, 김영삼 정권에서 국무총리를 맡았다가 현직 대통령과의 갈등 끝에 127일 만에 사표를 낸 게 두 번 연속 대권에 도전하는 기반이 됐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정치적 징검다리가 된 직책 중엔 감사원장도 있었다. 김영삼 정권의 출범과 함께 감사원장이 된 이회창은 지나치게 사치스럽다는 이유로 공관 입주를 거부한 것을 시작으로 율곡사업 비리에 대한 감사를 통해 전 국방부 장관, 전 해군 공군참모총장, 전 청와대 수석 등 6명을 검찰에 고발해 강한 인상을 남겼다. ‘대쪽’이란 말 역시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세간에 회자되기 시작했다.

최재형 감사원장의 행보를 놓고 정치권은 이회창 전 총리의 예를 겹쳐 보는 것 같다. 월성 1호기 조기 폐쇄 관련 감사 결과가 정권에 불리한 내용이 될 걸로 예상되자 여당 일부 인사들이 “(차라리) 나가서 정치를 하라”며 윽박지르는 게 그 예다. 일부 의원은 최재형 감사원장의 인척관계를 문제삼기도 했다. 한국원자력연구원과 보수언론에 친인척들이 몸 담고 있다는 것이다. 최재형 감사원장이 감사 과정에 ‘원전마피아’들의 논리를 대변했다거나 아직 나오지 않은 감사 결과가 보수언론에 대문짝만하게 실린 것은 문제라는 지적도 이어졌다.

보수언론과 보수야당은 여당이 이렇게 나오길 기다렸다는 듯한 태도이다. 검찰총장에 이어 감사원장 찍어내기가 시작됐다며 임명할 땐 추켜세워놓고 ‘코드’가 맞지 않으니 내쫓는 일이 또 일어나고 있다는 비판이다. 일부 보수 정치권에선 앞서와 마찬가지 시각으로 최재형 감사원장을 대권주자로 보고 ‘관리’해야 한다는 얘기를 한다고도 한다. 워낙 대권주자라고 할만한 사람이 없으니 온갖 시나리오가 나오는 것 아닌가 한다.

최재형 감사원장이 국회 법사위 전체회의에서 답변하고 있다. (연합뉴스)

월성 1호기는 조기 폐쇄가 맞다고 생각한다. 월성 1호기는 1983년에 지어져 2012년 설계수명을 다했으나 2015년 원자력안전위원회로부터 계속운전을 승인받았다. 그러나 2017년 대법원은 원안위의 수명연장 결정 취소를 판결했다. 원안위가 심사를 제대로 하지 않았다는 게 이유다. 이에 따라 2018년 6월 한국수력원자력 이사회는 월성 1호기 조기 폐쇄를 결정했다.

보수언론은 틈만 나면 수천억을 들여 새 것처럼 만들어 월성 1호기 가동에 아무 문제가 없다고 주장하지만 2017년 당시 판결을 보면 이미 그렇지 않았다는 게 드러난다. 돈을 얼마를 들였든 안전성 제고를 위해 제대로 쓰인 것인지 원안위가 심사를 했어야 하지만 설비교체 등에 들어간 비용에 대해선 과장급 전결로 처리되었다. 시공사 측의 가이드라인 최신 버전이 적용되지 않아 심사 근거가 부실했다는 지적도 있다. 실제 재가동 된 월성 1호기는 2016년 두 차례나 설비 고장으로 발전 정지됐고 2017년까지도 건물 부벽 콘크리트 결함이나 방사성 물질 누출을 막는 차수막 손상 등이 문제가 됐다. 지진에 상대적으로 취약한 부지에 위치해 있다는 분석 결과도 있다.

그러나 사업의 당위를 인정하는 것과 그 절차가 제대로 됐는지를 따지는 것은 다른 문제이다. 보수세력은 연일 외부기관에 의한 경제성 평가 결과와 폐쇄 결정 당시 한수원이사회 회의록이 조작됐다는 주장을 제기하고 있다. 한수원과 산자부는 사실이 아니라는 차원의 해명을 내놓고 있으나 논란을 종식시키기 위해 감사원의 판단을 받아보는 것도 방법이다. 탈원전 정책의 당위와 별개로 그것을 추진하는 과정이 적절하지 않았다면 이에 대해서는 관계자 및 기관이 그에 맞는 책임을 져야 한다.

반대로 말하면, 월성 1호기 폐쇄와 관련한 경제성 평가에 일부 오류가 있다고 해도 이것을 근거로 탈원전 정책의 정당성을 부정할 수 없다는 것 또한 분명히 해야 한다. 실제 한수원과 산자부는 원전 폐쇄에 대해 경제성 뿐 아니라 안전과 지역 주민들의 수용성 또한 고려해 내린 결정이라고 여러 차례 밝힌 바 있다. 박근혜 정권 당시 고리1호기 영구 정지 결정 역시 경제성은 충분하다는 분석에도 불구하고 다른 요인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내린 바 있다.

여당 의원들과 한겨레 등 일부 언론이 최재형 감사원장이 중립을 잃었다는 근거로 드는 “41% 정부” 발언은 그 맥락을 감안해 평가해야 한다. 백운규 전 장관 등이 이미 논란이 제기된 경제성 평가 문제를 묻는 질문에 ‘국민 대다수가 지지한 대통령 공약이니 이견이 있을 수 없다’는 취지의 답을 했다면 “41% 정부”를 말한 것도 이해를 못할 바는 아니다. 민주주의에 도전한다는 식으로 받아들일 일이 아니다. 최재형 감사원장 개인이 탈원전 정책에 비판적 견해를 가졌다고 해도 규정이나 법률이 정하는 바를 넘어 월권을 한 사례 등이 아니라면 문제가 될 것은 없다. 감사원은 말 그대로 감사원이지 탈원전 정책만을 평가하는 기관이 아니다.

‘이회창 감사원장’이 탄생한 배경이 된 사건 중에는 1990년 이문옥 감사관이 언론 제보를 했다가 구속된 사건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당시 이문옥 감사관은 재벌들이 소유하고 있는 비업무용 부동산 보유 현황에 대한 감사원의 감사가 중단된 배경에 청와대의 압력이 있었다고 폭로한 바 있다. 이 결과로 이문옥 감사관은 공무상 기밀누설 혐의로 검찰에 의해 구속 기소됐으나 1993년 1심은 무죄를 선고했고 대법원은 1996년 이를 확정했다.

물론 정경유착을 탈원전과 동렬에 놓고 평가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검찰의 예와 마찬가지로 수사 또는 감찰기관 중립성에 대한 정파적 접근이 반대파에 명분을 실어주는 사례가 다시 나타날 수 있다는 우려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역사는 각기 다른 버전으로 두 번 반복된다는 말도 있다. 그런 차원에서 보면 아마도 약육강식의 논리를 ‘공정’이란 외피로 치장했을 ‘제2의 이회창’은 아직 오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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