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스=소설가 김은희] 글을 잘 쓰고 싶은 욕망은 작가라면 모두 가지고 있다. 작가가 아니어도 글 쓰는 직업을 가진 사람이라면 잘 쓰고 싶은 욕망에서 자유롭기 쉽지 않다.

대학원에서 소설을 쓰던 시절. 당시 이미 등단을 해 작가가 된 사람도 있었고, 등단하기 위해 길고 긴 습작기를 보내고 있는 사람도 있었다. 등단해 작가가 되었든, 등단하기 위해 습작기를 보내고 있든 공통적인 고민은 소재의 빈곤이었다. 쓰고 싶은 소재는 이미 기성 작가들이 모두 다루었고, 기성 작가가 다룬 소재를 더 유려한 문장으로, 새롭게 구성하기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공들여 쓴 작품을 공모전에 응모를 하면 내용과 표현이 식상하다, 신인 같은 신선함이 없다, 기성 작가 같다는 평만 뒤따랐다.

이미지=게티이미지뱅크

소재보다 세계관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시대를 대표하는 소재, 시대를 반영하는 소재, 송곳처럼 폐부를 찌를 수 있는 소재에 대한 목마름이 있었다. 그 시절 소설 쓰는 친구들은 모이면 소설 이야기를 하느라 밤을 새웠다. 쓰려고 생각하고 있었던 이야기가 소설로 작가에 의해 발표되었다고 침울한 표정으로 말하는 친구도 있었고, 새롭고 독특한 소재를 찾아 이곳저곳을 기웃거리고 있다는 친구도 있었다. 물론 소재의 빈곤으로 머리를 쥐어뜯는 친구도 있었지만, 끝도 없이 샘솟는 화수분처럼 새로운 아이디어와 소재로 부지런히 소설을 쓰는 친구도 있었다. 새로운 소재로 끊임없이 소설을 쓰는 친구를 보면 부럽기도 하고 놀랍기도 했다.

소재 빈곤에 시달리다가 흥미로운 이야기를 듣거나, 독특한 캐릭터를 가지고 있는 사람을 만나게 되면 눈이 반짝거린다. 꼭 소재 빈곤 때문만은 아니다. 다른 예도 있다. 소설을 잘 쓰는 사람일수록, 재주를 가지고 있는 사람일수록, 소설을 잘 쓰고 싶다는 욕망이 클수록, 소설 쓰는 일이 재밌어질수록 독특하고 흥미로운 소재와 이야기를 보면 쓰고 싶다는 생각에 손가락이 근질거린다. 그것이 무엇이든, 누구의 이야기든, 누가 피해를 입든 생각하지 않는다. 이것을 써도 되나, 괜찮을까, 라는 생각보다 쓰고 싶다, 누군가 내 소설을 읽고 나도 주목받고 싶다는 마음이 크다. 그럼 일단 쓰게 된다. 먼저 쓰는 사람이 주인이라는 생각에 누군가 먼저 쓰기 전에 소설을 완성하기 위해 전력투구하게 된다.

너의 이야기를 써도 되냐, 당신의 이야기를 써도 되냐 묻고 답을 얻기 전에 일단 쓰고 보자는 마음이 앞선다. 이 마음마저도 없고, 생각하지 않는 경우도 많다. 소설가이기 때문에 이 모든 일이 허용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크다. 이야기가 소설로 지면에 발표된 후 종종 들려오는 시끄러운 말들이 있다. 내 이야기를 훔쳐 갔다, 내 인생을 훔쳐 갔다는 말과 함께 끝내 절연하였다는 안타까운 소식이 전해져 오곤 했다. 한때 가까운 사이였기 때문에, 현재 가까운 사이이기 때문에 나의 속내를, 내밀한 그 심연까지 보여주었는데 한마디 말도 없이 혹은 한마디 말만으로 허락을 받았다고 생각하며 타인의 개인사를 도용하고 무책임하게 모른 척 한다.

최근 사적대화 인용 논란으로 '젊은작가상'을 반납한 김봉곤 작가의 '시절과 기분', '여름, 스피드' (사진=창작과 비평, 문학동네)

직업이 가지고 있는 특성을 오인한 결과이다. 소설은 허구적 세상이므로 무엇이든 써도 되고, 어떤 것보다 우선할 수 있다는 절대적 가치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타인의 그 은밀하고 아픈 이야기를 쓴다.

사소설을 쓸 때 이와 같은 오류가 더 많다. 내밀성 때문이다. 내밀한 내 이야기를 쓴다고 하지만 결국 타인의 삶을 끌어들일 수밖에 없다. 내밀한 이야기를 쓸 때 그 기준이 애매하다. 어디까지 써도 되고, 어디까지 쓰면 안 되는지 선이 모호하다. 내 이야기를 쓸 때, 내 주변 이야기를 쓸 때 더 조심해야 하고 냉철해야 하는 이유가 이 때문이다. 자칫하면 일기 수준의 신변잡기 소설이 될 위험이 있고, 뜻하지 않게-혹은 뜻하게- 타인의 은밀하고 아픈 삶이 노출되거나 도용될 수 있다.

타인의 삶의 도용은 표절과 다른 문제이다. 남의 글을 훔쳐다 내 글처럼 발표하는 일도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지만, 남의 삶의 일부를 혹은 일상을 훔쳐다 가공하지도 않고 날 것으로 발표하는 것은 비윤리적이고, 상식적이지 않다. 작가의 상식은 작가만의 시선, 세계관으로 소재와 이야기를 가공하여 문학적 표현으로 완성하는 것이다. 가공되지 않은 날 것 그대로 작품 속에 넣는 일은 작가정신에 맞지 않는다. 작가는 자동기술자나 서기도 아니다. 타인의 삶을 마음대로 도용할 권리는 더더욱 없다. 한 개인의 이야기를 쓰고 싶다면 먼저 충분히 설명하고 답을 얻을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 것이 소설뿐 아니라 모든 글쓰기의 상식이다.

김은희, 소설가, (12월 23일 생) 대전일보 신춘문예 소설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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