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스=백종훈 칼럼] 2017년 5월 25일 목요일 밤 9시에 뉴욕 존 F. 케네디 국제공항에 도착하는 대한항공 여객기에는 한 달 여 일정으로 한국을 방문하셨던 원불교 미주 동부교구의 우두머리이신 S교감님이 타고 계셨다.

교구사무국 주사로 근무하고 있었던 나는 교구장님을 모시러 갈 채비를 했다. 교구청에서 비행장까지의 거리는 9마일 남짓, 막히지 않으면 15분 거리다. 그러나 교통 정체가 심할지, 항공편이 연착될지, 입국심사가 길어질지 등 갖은 변수 때문에 도무지 감을 잡기 어려워서 일찍 길을 나섰다.

다행히 678번 도로에 차가 밀리지 않았다. 비싼 공항주차비를 아끼려고 공항 입구 노변에 차를 대고 기다리는 이들 곁을 지나 KAL기가 내리는 1번 터미널로 곧장 내달려 타고 온 시에나 승합차를 주차장에 세우고 입국장에 들어섰다.

필자가 찍은 미국 동부 대서양 연안 Jones Beach

혼잡을 막으려고 허리 높이로 쳐 둔 선 뒤로 한국계 이민자들과 중국계 미국인들이 많았는데 한국어와 중국어, 영어가 한데 뒤섞여 왁자지껄 시끄러웠다. 사람들이 가끔 대기 선을 넘으면 주위를 돌던 경찰이 다가와서 호통치며 질서를 잡았다.

한국 시간으로 같은 날 저녁 7시 30분에 이륙한 비행기가 14시간 반을 날아 제 시간에 도착했다는 메시지가 전광판에 뜨자 준비해온 팻말을 챙기는 손길이 바빠지고 옹기종기 모여 몸을 출구 쪽으로 기울였다.

드디어 문이 열리고 비즈니스석 탑승객부터 나오기 시작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차기 대권주자로 한창 주가를 올리던 A 씨와 수행원들이 선두에 나타났다. 갑자기 한인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A 씨는 그를 반기며 내미는 손을 하나하나 잡아줬고 같이 사진 찍자는 분들의 요청을 마다하지 않았다. 교포들의 환대를 받는 도지사의 모습을 촬영하는 비서들은 의기양양했다.

내 옆에 서 계시던 중년부인이 어쩔 줄 몰라 흥분을 감추지 못하는 가운데 두 딸은 한국 소식에 어두운지 저 남자가 도대체 누군데 그러냐며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엄마를 바라봤다. 모녀와 악수를 나누고 인증샷까지 마친 그와 내 눈이 어색하게 마주쳤다.

하지만 나는 반걸음 뒤로 물러나 시선을 옮겼다. 삼성으로부터 15억 원을 받았던 그에 대한 고까운 속내를 감출 수 없었다. 그는 발길을 돌려 출구를 향해 멀어졌고 이틀 뒤 한인신문에 뉴욕에 소재한 업체 두 곳과 모 지자체가 투자협약을 체결했다는 뉴스가 실렸다.

승승장구하던 그는 이듬해 3월 수행비서였던 B 씨가 성폭력을 고발하면서 급격히 몰락하게 된다. 불륜일 뿐이라는 시각도 적지 않으나 설사 그렇다 치더라도 그는 이미 한국사회가 정치지도자에게 요구하는 과거와 다른 기준에 적합하지 않은 인물로 낙인찍혔다.

30년 정치경력도 지자체장으로서의 업적도 정치적 야망도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그와 정치적 미래를 함께 준비했던 분들은 졸지에 쓰라린 좌절을 맛봐야 했으며 그를 지지하던 국민들도 크게 상심했다.

그가 3년 6개월의 수감 기간을 채워 법이 정한 죗값을 다 치를지라도 성폭행범이라는 주홍글씨를 지우기는 어려울 것이다. 숱한 손가락질과 조롱, 비아냥거림, 불명예가 평생 그를 그림자처럼 따라다닐 테다.

그는 과연 이 모든 것을 감내해 낼 수 있을까? 나락으로 떨어져 되돌릴 수 없는 스스로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 티끌만치라도 남아있을 억울함이 복받치더라도 원망이 아닌 참회로 승화시켜 낼 힘을 그는 가지고 있을까? 그가 죽음이 아닌 삶을 선택한 이상 홀로 가시밭길에 선 아픔은 온통 그의 몫이다.

고통의 나날을 달게 받아내고 침묵과 인고의 세월을 다 견뎌내더라도 그를 향한 모멸에 찬 눈길이 절로 사그러지리라 기대하기는 어렵다. 허나 그가 거듭날 어느 날, 세상 모두가 여전히 그를 멸시할 지라도 나만은 눈이 밝아 그를 알아보고 두 손 꼭 잡아 주고 싶다. 죽음 못지않은 삶의 가치를 마침내 증명해내는 그이기를 기도한다. 그대라도 살아있어 고맙다.

살·도·음(殺盜淫)을 행한 악인이라도 마음만 한 번 돌리면 불보살이 될 수 있나니라 - 원불교 대종경 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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