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스=송창한 기자] 세계 최대 규모의 아동·청소년 성착취물 사이트 '웰컴투비디오' 운영자 손모씨(24)에 대해 법원이 미국의 범죄인 인도 요청을 허가하지 않자 언론에서는 '이례적'이라는 평가와 함께 디지털성범죄에 대한 양형기준이 도마 위에 오르고 있다.

서울고등법원 형사20부(강영수 부장판사)는 6일 손씨에 대해 검찰의 미국 범죄인 인도 청구를 기각했다. 손씨는 이른바 '다크웹'이라고 불리는 특정 소프트웨어로만 접속할 수 있는 네트워크 인터넷망에서 사이트를 운영하며 아동 성착취물을 유통한 혐의 등으로 2018년 3월 구속기소됐다. 검찰은 손씨에게 징역 2년을 구형했고, 손씨는 지난해 5월 징역 1년 6개월을 확정 받았다. 아동청소년보호법상 음란물 제작죄의 형량은 '무기징역 또는 5년 이상의 유기징역'이다.

세계 최대 아동 성착취물 사이트 '웰컴투비디오' 운영자인 손모씨(24)가 6일 오후 법원의 미국 송환 불허 결정으로 석방되어 경기도 의왕 서울구치소를 나서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미국 연방대배심은 2018년 8월 손씨를 9개 혐의로 기소했지만 한국 법원이 징역을 확정지으면서 '이중처벌 금지원칙'에 따라 범죄수익 은닉 혐의에 대해서만 인도 청구가 이뤄졌다. 손씨는 지난 4월 27일 만기 출소할 예정이었지만 법무부와 검찰이 손씨에 대한 미국 법무부의 강제송환 요청을 받아들여 법원이 인도 구속영장을 발부, 재구속돼 관련 재판을 받아왔다. 손씨는 이날 법원의 기각결정과 함께 석방됐다. 향후 범죄수익 은닉 혐의에 대한 수사를 받게 된다. 지난 10년간 서울고등법원이 범죄인 인도를 심사한 30건 가운데 불허 결정이 난 건은 1건 뿐이었다는 점에서 '이례적'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재판부는 인도 청구 기각 이유로 "손씨의 신병을 확보해 수사 과정에서 적극 활용할 필요가 있고, 대한민국이 주권 국가로서 형사처벌 권한을 행사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점을 들었다. '웰컴투비디오' 회원 346명 중 대한민국 국적자가 223명, 미국 국적자 53명, 기타 국적자 70명 등이기 때문에 손씨를 미국으로 인도하면 국내 회원들에 대한 수사에 차질을 빚을 수 있다는 게 재판부 설명이다. 재판부는 "손씨를 인도하지 않는 것이 대한민국이 아동·청소년 음란물 제작을 예방하고 억제하는 데 상당한 이익이 된다"고 했다.

그러나 사법부가 이 같은 디지털성범죄 사건 수사의 엄중함을 밝히기 이전에 손씨에 대해 제대로 된 형사처벌을 내리고, 디지털성범죄와 관련한 양형기준을 마련했어야 한다는 비판의 목소리가 높다.

경향신문은 7일 사설 <성착취범 미국 송환 불허한 법원, 양형기준부터 마련하라>에서 "재판부는 이날 국내 아동 성착취물범죄 처벌이 적정하지 못했다고 인정했다. 한국에서 손씨를 엄벌할 수 없는 만큼 미국에서 중형을 선고받게 해야 한다는 주장에도 공감했다"며 "그렇다면 손씨에 대한 미국 송환을 불허하기 전에 이런 범죄를 제대로 처벌하는 장치를 마련해 놓아야 마땅했다"고 비판했다.

경향신문은 "사법부는 지금껏 양형기준 마련에 미적대왔다. 지금이라도 엄벌의지를 입증해야 한다"며 "우선 양형기준을 높이는 데 속도를 내야 한다. 디지털성범죄가 피해자의 인격살인에 해당하는 중한 범죄로 제대로 처벌받도록 해야한다"고 강조했다.

경향신문 7월 7일 <성착취범 미국 송환 불허한 법원, 양형기준부터 마련하라>

대법원 양형위원회는 지난해 6월 디지털성범죄를 양형기준 설정대상 범죄로 선정하고, 디지털성범죄의 특성과 피해회복을 양형기준에 반영하는 작업을 진행 중이다. 애초 대법원 양형위는 지난 5월 양형기준을 의결하고 발표할 예정이었으나, 돌연 성폭력 처벌법 개정을 이유로 들어 양형기준안 의결을 12월로 연기했다.

디지털성범죄 양형기준을 둘러싼 논란은 반복되어 온 '솜방망이' 처벌에서 기인한다. 2010년 무렵부터 디지털성범죄에 대해 엄중 처벌이 필요하다는 목소리는 지속적으로 제기돼 왔다. 국회가 디지털성범죄 관련 특별법을 제정하고, 법개정을 통해 형량을 가중한다 해도 실효성 있는 양형기준이 서지 않으면 무용지물이라는 비판이 이어졌다.

한겨레는 사설 <미국 송환 피한 성착취범, 한국에서 엄벌해야>에서 양형기준 강화만을 기다려서는 이번에도 '솜방망이' 처벌에 그칠 수밖에 없다며 "기존 관행을 넘어서는 과감한 접근"을 사법부에 당부했다. 손씨는 일사부재리 원칙에 따라 성범죄 혐의로는 다시 처벌할 수 없다. 범죄수익 은닉 혐의에 대한 국내법상 최대 형량은 '5년 이하 징역'으로 미국의 4분의 1수준이다.

같은 날 한국일보는 사설에서 "손씨를 미국에 인도해도 아동 성착취물 유포에 대해선 이중처벌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손씨 송환을 요구하는 국민청원에 약 22만명이 동의했던 것은 작동하지 않는 성범죄 사법 처리에 대한 좌절과 분노의 표현"이라며 "아동·청소년 성범죄에 대해 국민이 납득할 수준의 양형 기준을 마련하고, 그 전에라도 판사 개개인이 각성한 태도로 엄한 형량을 선고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서울신문도 사설에서 "한국의 악성 성범죄가 법원의 부실한 선고로 ‘육성된다’는 지적에 귀 기울여야 한다"며 "아동을 성착취한 범죄에 대해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을 구형한 검찰이나 그마저도 1년 6개월로 낮춰 선고한 법원이 손씨가 미국 송환 요청을 받게 된 배경이 아닌지 되돌아 봐야 한다"고 지적했다.

한편, BBC 로라 비커 서울특파원은 6일 자신의 사회관계망서비스(SNS) 계정에 "한국 검찰은 배가 고파서 달걀 18개를 훔친 남성에게 18개월 형을 요구한다. 세계 최대 아동 포르노 사이트를 운영한 손씨와 똑같은 형량"이라고 질타하며 한 기사를 공유했다. 보도에 따르면 지난 3월 경기도 수원에서 한 40대 남성 A씨는 일자리를 잃고 열흘 넘게 굶다가 고시원에 있는 구운달걀 18개, 5천원 어치를 훔쳤다. 이에 대해 검찰은 그가 절도 전과가 있다며 징역 1년 6개월을 구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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