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스=백종훈 칼럼] 개구쟁이 현만이가 결석했다. 이튿날 나타난 그는 근처 미군기지에서 얻어온 초콜릿과 형광 막대기를 친구들에게 한껏 자랑했다. 부러워하던 몇몇 친구들이 수업 마치고 나서 그를 따라가더니 다음날 아침에 미제과자를 한 아름씩 안고 돌아와 급우들과 나눠먹었다. 팀 스피릿 한·미 연합 군사훈련이 한창 진행 중이던 1988년 3월 말, 경기 북부 남양주군의 한 국민학교 교실 풍경이다.

집으로 돌아가는 아스팔트 도로 좌우에는 한 사람이 겨우 지나갈 정도의 여유밖에 없었다. 차가 지나는 길 양편에 붙어 행군하는 미국 병사들과 부딪히지 않으려고 평소에 다니지 않던 마을 비포장 길로 걸었다.

목줄 없는 개 한 마리가 쫓아오길래 겁이 나서 막대기를 주워들어 휘두르며 저리 가라고 소리쳤다. 그런데 물러서던 그 개가 머리를 쳐들고 짖자 여기저기서 동내 개들이 다 모여들었다. 큰일이다 싶어서 운동화를 신은 채로 허겁지겁 개천을 건너 달아나니 더 이상 따라오지 않는다.

한숨 돌리고서 한적한 지름길로 발길을 재촉하는데 이른 봄날, 서북풍을 타고 날아와 텅 빈 논바닥에 나뒹구는 삐라가 눈에 들어왔다. 반짝이는 고급종이에 강렬한 색상, 낯선 필체, 날선 문구가 희한했다. 삐라를 모아다 파출소에 가져다주면 공책이나 연필을 준다는 담임 선생님 말씀이 생각나서 얼씨구나 운수 좋은 날이구나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보이는 대로 거둬들였다.

헌데 어떤 사람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다가오더니 삐라를 줍는다는 이유 하나로 어린 나를 다짜고짜 빨갱이로 몰아붙였다. 학용품 받으려고 그랬다는 자초지종을 말해도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 말만 퍼부었다. 얼굴이 불콰한 걸 보니 낮술을 걸친 게 틀림없다.

상황을 모면하고 부질없는 실랑이를 멈추고자 무조건 잘못했다고 사죄한 후 공손히 인사하고 돌아가려는데 이번에는 자기 집에 가서 저녁 먹고 가라고 횡설수설한다. 소리쳐도 도와줄 이 하나 없는 외진 곳이라 어쩔 수 없이 그자의 손에 이끌려 기어이 소반을 가운데 두고 마주앉았다. 대남전단을 뿌린 놈이나 가진 놈이나 다 빨갱이니 앞으로 다시는 삐라에 손대지 말라는 훈계를 재탕 삼탕 거듭 듣고서야 가까스로 풀려났다.

이듬해에 서울로 전학 간 이후 오래도록 삐라를 잊고 살다가 최근 일부 탈북단체의 대북전단 살포로 불거지는 일련의 소동에 옛 기억이 되살아난다. 동남풍이 불면 그들은 어떻게 해서든 삐라를 북으로 보내려 할 것이다. 그리고 접경지역 어느 들판에서는 삐라에 달려온 미화 1불 지폐를 집으며 횡재라고 좋아하다가 반동분자로 내몰려 곤욕을 치를 소년이 있을지 모른다.

삐라에 적힌 미움과 분노, 혐오, 선동에서 탈북민의 가난한 마음을 본다. 하늘에서 떨어진 1달러를 남모르게 챙기는 불안한 손길에서 북한 인민들의 가난한 살림살이를 엿본다. ‘초콜레또 기브 미’를 먼저 벗어난 우리가 독재 권력을 먼저 이겨낸 우리가 보듬어야 할 겨레가 다름 아닌 그들이다.

동남풍에 실어 보낼 것이 어찌 삐라뿐이겠는가. 신록을 몰고 오는 동남풍이 어찌 자연에서만 불겠는가. 우리네 마음에서도 훈훈한 동남풍을 불릴 수 있으니 굶주림과 독재에 신음하는 북녘 동포와 남녘땅에서 편견과 차별로 소외 받는 새터민들을 따뜻하게 안아주고 민주시민으로 인도하는 역할은 그 길을 먼저 지난 우리 몫이 아니겠는가.

엄동설한에 모든 생령이 음울한 공기 속에서 갖은 고통을 받다가 동남풍의 훈훈한 기운을 만나서 일제히 소생함과 같이 공포에 싸인 생령이 안심을 얻고, 원망에 싸인 생령이 감사를 얻고, 상극(相克)에 싸인 생령이 상생을 얻고, 죄고에 얽힌 생령이 해탈을 얻고, 타락에 처한 생령이 갱생을 얻어서 가정·사회·국가·세계 어느 곳에든지 당하는 곳마다 화하게 된다면 그 얼마나 거룩하고 장한 일이겠는가. 이것이 곧 나의 가르치는 본의요, 그대들이 행할 바 길이니라. - 원불교 대종경 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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