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스=송창한 기자] 국가인권위원회가 지상파3사 저녁종합뉴스(메인뉴스)에 한국수어통역을 제공할 것을 권고했지만 이들 방송사가 수용 입장을 보이지 않자 장애인 단체들이 수용을 촉구하고 나섰다. 지상파3사는 메인뉴스에 수어통역을 제공하는 것은 비장애인 시청권을 제약하는 문제가 있고, 향후 기술적 개선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

장애의 벽을 허무는 사람들(이하 장애벽허물기), 언론개혁시민연대 등 장애인·언론 시민단체들은 2일 오후 서울 여의도 KBS 본관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공영방송인 KBS가 인권위 권고를 즉각 수용할 것을 촉구했다.

장애의 벽을 허무는 사람들, 언론개혁시민연대 등 장애인·언론 시민단체들은 2일 오후 서울 여의도 KBS 본관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공영방송 KBS가 메인뉴스에 수어통역을 제공하라는 국가인권위원회 권고를 수용할 것을 촉구했다. (사진=미디어스)

김주현 장애벽허물기 대표는 "지난해 봄 9시 뉴스를 비롯한 더 많은 프로그램에서의 수어통역을 촉구하기 위해 이 자리에 왔었는데, 오늘 인권위 권고를 들고 다시 이 자리에 섰다"며 "인권위가 본 KBS의 주장은 수어에 대한 관심 부족이었다. 공영방송 KBS는 농인을 시청자로 인식하고 인권위 권고를 적극 수용해야 한다"고 말했다.

청각장애인 강재희 여러가지수어연구소 대표는 "수어는 저의 소중한 언어이지만 지금도 수어를 음성언어의 보조수단으로 생각하고 농인의 수어를 제한하는 경우가 많다"며 "KBS도 마찬가지"라고 비판했다. 강 대표는 "한국수어법을 통해 수어는 언어가 됐고, KBS는 이 점을 바로 알아야 한다. 일하는 농인들도 하루의 가장 중요한 소식을 전하는 저녁종합뉴스를 볼 수 있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김동찬 언론개혁시민연대 사무처장은 메인뉴스에 수어통역을 제공하기 어렵다는 KBS의 주장에 대해 반박했다.

김 사무처장은 "KBS가 대안으로 제시하는 스마트 수어방송, 수어통역 수상기 개발 보급은 공영방송의 올바른 선택지가 아니다"라며 "중요한 건 모든 생활에서 장애인의 권리가 비장애인과 동등하게 보장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음성언어, 자막 등과 동일하게 수어로 메인뉴스를 제공하고, 소수자 권리에 가장 앞장서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또 김 사무처장은 "가장 실망스러운 건 농인들을 대하는 KBS의 태도다. KBS는 작년에도 면담을 거절했고, 이번에는 코로나19를 이유로 거절했다"며 "공영방송의 가장 첫 번째 책무는 시청자가 질문하면 응답하는 '설명책임'이다. 가장 기본적인 책임을 등한시 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KBS는 인권위 권고 수용 여부와 관련 장애인단체들의 면담요청을 코로나19 상황과 인권위 답변 준비 등의 이유로 거절했고, 같은 이유로 장애인단체의 면담요청을 받은 MBC와 SBS는 현재까지 회신을 하지 않은 것으로 전해졌다.

김주현 장애벽허물기 대표(오른쪽)가 KBS측에 '국가인권위원회 권고사항 수용 요청서'를 전달하고 있다. (사진=미디어스)

장애인단체들은 이날 KBS에 인권위 권고를 수용하라는 내용의 요청서를 제출했다. 인권위 권고와 장애인단체들의 비판에 대한 입장을 묻는 질문에 KBS는 "KBS는 수어방송 의무편성 비율을 훨씬 상회해 준수하고 있다. 최근 '뉴스광장' 등 '뉴스9'을 제외한 종합뉴스에 수어를 모두 반영하고 있다"고 밝혔다.

다만 KBS는 "그러나 이번 인권위 권고가 있었던 만큼, 규정대로 90일 이내에 입장을 정리할 계획"이라며 "시한 내에 내부적으로 해외 방송사의 사례나 실제로 청각장애인들의 뉴스 수용 불편 사례가 어느정도인지 등을 충분히 살펴 결정하겠다"고 했다.

앞서 인권위는 장애인단체 등이 제기한 지상파 메인뉴스 수어통역 미제공 차별진정에 대해 지난 4월 20일 KBS·MBC·SBS 등 지상파 3사에 "농인이 장애인이 아닌 사람과 동등하게 피진정방송사 메인뉴스를 신청할 수 있도록 한국수어통역을 제공하라"고 권고했다. 아울러 인권위는 주무부처인 방송통신위원회에 '장애인방송 편성 및 제공 등 장애인 방송접근권 보장에 관한 고시' 개정 등 필요한 조치를 취하라고 권고했다. 해당 권고는 5월 중순 무렵 진정인과 피진정인에 통보됐다.

결정문에서 인권위는 "지상파방송은 공공재로서 공공성과 공익성을 담보해야 하고, '방송법'에도 공공성과 공익성을 지키도록 규정하고 있는데, 피진정방송사가 현재까지 메인뉴스에 한국수어통역을 제공하지 않고 있는 것은 농인에 대한 차별"이라고 못박았다. 또 인권위는 방통위의 '장애인 방송고시'가 지상파 수어통역 의무비율을 5%로 규정, 2013년 기준 그대로 유지하고 있어 농인의 방송접근권이 제한받는 상황 역시 농인에 대한 차별이라고 비판했다.

지상파3사는 그간 메인뉴스에 수어통역을 제공하지 않는 이유로 ▲비장애인 시청권 제약 ▲'장애인 방송고시'에 따른 법적 기준(자막 100%, 화면해설 10%, 수어통역 5%) 충족 ▲'스마트 수어방송' 등 기술개발을 통한 문제 개선 추진 등을 들어왔다. 이들은 장애인단체 차별진정이 제기되자 인권위에 같은 내용의 입장을 제출했으나 인권위는 '농인에 대한 차별'로 결론냈다. 2019년 기준 지상파3사는 7~8%대의 수어통역을 제공하고 있지만 메인뉴스에는 수어통역을 제공하지 않고 있다. 지상파3사의 주장이 헌법정신과 장애인차별금지법, 방송법 등 관련 법률에 맞지 않고, 방통위 고시 기준 역시 문제가 있다는 게 인권위의 판단이다.

인권위는 "피진정 방송사들은 공공재인 전파를 사용하고 있는 지상파 방송으로, 장애인을 포함한 모두에게 동등한 수준으로 시청권이 보장되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인권위는 "피진정방송사들의 주장처럼 수어통역이 방송영상이나 자막을 일부 가리면 농인 아닌 시청자들이 뉴스를 시청하는데 집중력이 다소 떨어질 수 있으나, 영상이나 자막은 뉴스 내용을 이해하 는데 보충적인 자료여서 가린다고 해도 다소 불편할 수는 있지만 뉴스 전반적인 내용을 이해하는데 큰 어려움이 있는 것은 아니다"라고 했다.

이어 인권위는 "반면에 농인이 뉴스를 시청할 때 수어통역을 제공하지 않으면 뉴스내용을 전혀 이해할 수 없다"며 "설령 자막이 나온다고 해도 수어를 제1언어로 사용하는 농인의 경우 한글자막 해독에 어려움이 있기 때문에, 자막 내용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할 수 있으며, 자막 만으로 뉴스 내용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비장애인도 마찬가지"라고 판단했다. 농인은 한글습득을 수어로 한다.

또한 인권위는 ▲방송사들이 다른 시간대 뉴스에 수어통역을 제공하고 있다는 점 ▲대국민적 관심이 집중된 뉴스특보의 경우에도 수어통역을 제공하고 있는 점 ▲수어통역화면으로 인해 화면의 일정부분의 가림은 비장애인에게 내용 자체를 전달받지 못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불편한 정도인 점 등을 들어 "방송사들은 큰 어려움 없이 메인 뉴스에 수어통역을 제공할 수 있는 것으로 보이고, 이를 실현하는 데 있어 현저히 곤란한 사정이 있는 것으로 보이지도 않는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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