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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40년 만에 ‘5·18’ 보도 바로잡아계엄군의 폭력 진압 등 당시 광주 실상 다룬 보도 0건..."5·18의 진실 흐리게 한 책임 통감"
김혜인 기자 | 승인 2020.05.18 11:20

[미디어스=김혜인 기자] 경향신문이 40년 만에 5·18 민주화운동 관련 기사를 바로잡았다. 1980년 당시 대통령 특별성명, 계엄군의 입장에 치중했던 경향신문은 광주의 실상을 추가하고 사망자 수 등 검증 없이 보도한 내용을 일부 수정했다.

경향신문은 18일자 12면을 통째로 할애해 <‘광주의 5월’ 제대로 담지 못한 기사, 40년 만에 바로잡습니다>란 제목의 정정 보도를 냈다. 경향신문은 “대다수 언론은 계엄군이 1980년 광주 시민들을 폭력 진압했을 때 현장을 제대로 기록하지 못했다”며 “계엄사령부 등 당국 발표를 무비판적으로 받아썼다”고 고백했다.

경향신문은 40년 전 신군부 영향에서 자유롭지 못했다고 밝혔다. 1974년 박정희 정부의 언론통폐합 이후 경향신문 경영권은 5·16장학회(현 정수장학회)가 가졌으며 1980년 2월 보안사령관 전두환 씨는 ‘K-공작계획’ 아래 언론을 통제했다. 당시 보안사 장교들은 경향신문 보도를 수시로 검열했다고 전했다.

경향신문은 “과거 보도를 반성한다는 취지”에서 1980년 5월 18일 비상계엄 전국 확대부터 5월 31일까지 휴일을 제외한 13일 간의 자사 보도를 살폈다. 계엄 상황, 광주 현지와 관련된 보도는 총 108건이었지만 계엄군의 폭력 진압 등 당시 광주 실상을 다룬 보도는 0건이었다. 최소 27건의 기사는 계엄사, 정부 등 당국 자료나 계엄사령관 등 관계자의 발언을 그대로 받아서 작성한 것이었다. 경향신문은 전남대 5·18연구소, 5·18기념재단의 감수를 받아 과거 보도를 바로잡았다.

5월 18일 경향신문 12면에 실린 <'광주의 5월' 제대로 담지 못한 기사, 40년 만에 바로잡습니다>

우선 최규하 당시 대통령의 입장만 담긴 기사에 광주의 실상을 추가했다. 1980년 5월 18일 1면에 실린 최 대통령의 특별성명 기사에는 “국가를 보위하고 3700만 국민의 생존권을 수호하며 안정 속에 성장과 발전을 바라고 있는 대다수 국민의 여망에 부응하여 단안을 내리게 된 것”이라는 계엄확대 이유만 담겼다. 경향신문은 이에 “이날 아침 7공수여단은 전남·북에서 학내에 있던 총 79명을 연행했다”는 광주 실상을 더했다. 

다음날인 19일 1면에서도 경향신문은 광주의 상황을 전하지 않았다. “동서간 긴장”, “북한 공산집단의 대남적화” “일부 정치인, 학생 및 근로자의 경거망동” 등을 강조하는 최규하 대통령의 성명만 다뤘다. 경향신문은 제7공수여단은 광주 시내 시위를 진압하기 위해 오후 4시쯤 금남로와 충장로로 이동했고, 당시 공수부대의 무차별 구타로 19일 새벽 3시쯤 사망자가 발생했다는 기록을 추가했다.

21일 1면에는 <광주 일원 소요>라는 제목으로 군경 5명과 민간인 1명이 사망했다는 소식을 전했지만 ‘무비판적 받아쓰기 보도’였다고 시인했다. 전남지방경찰청이 발간한 ‘5·18민주화운동 과정 전남경찰의 역할’(2017)에 따르면 이날 도청 주변에 모인 시민은 20만 명에 이르렀고 공수부대의 잔인한 진압방식이 시민 집결의 원인이었다는 경찰관들의 증언을 추가했다. 이날 사망자 수 역시 전남도청 앞과 금남로에서만 최소 54명 이상이 숨졌다고 바로잡았다.

경향신문은 당시 22일 1면에 실린 이희서 당시 계엄사령관의 담화 내용은 허위사실로 규정했다. 이 사령관은 “상당수의 타 지역 불순인물 및 고정간첩들이 사태를 극한적인 상태로 유도하기 위하여 여러분의 고장에 진입”해 “터무니없는 악성 유언비어의 유포와 공공시설 파괴, 방화, 장비 및 재산 약탈 행위 등을 통하여 계획적으로 지역감정을 자극 선동하고 난동행위를 선도”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법원은 지난 2월 ‘5·18 간첩·북한군이 개입했다’는 지만원 씨 주장을 허위사실로 판단했다.

23일 1면에 실린 박충훈 당시 국무총리 서리의 담화문 보도는 ‘검증 없는 인용 보도’였다고 수정했다. 박충훈 서리는 “군은 정부 명령이 있는 까닭에 발포도 하지 못했다”고 했지만 2007년 국방부 진상규명위에 따르면 이날 오전 광주 주남마을에서 11공수여단의 버스 총격으로 17명이 숨졌다. 20일과 21일엔 광주역과 전남도청 앞에서 계엄군의 집단발표가 있었고 육군 헬기 40여대 중 일부가 21, 27일 시민을 상대로 여러 차례 사격했다.

24일 7면에 실린 <북괴 간첩 1명 검거>기사에 ‘남파된 간첩 이창용(46) 씨’는 광주와 무관한 이였다. 2007년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가 이 씨의 수사 및 재판 기록을 확인한 결과 5·18과 관련한 임무나 광주로 잠입하기 위한 어떤 시도도 발견할 수 없었다.

27일 경향신문은 1면에 계엄사 발표를 인용해 “광주사태를 평화적으로 해결키 위해 전력을 경주해왔으며 지난 25일에는 대통령 각하의 현지 특별담화를 발표했다. 그럼에도 극렬한 폭도들에 의해 호전되기는커녕 오히려 악화되는 조짐이 보였다”고 보도했다. 하지만 22일 새벽 또는 23일 첫 광주 재진압 작전계획 수립 이후 최소 3회 이상 광주 재진입 작전계획이 작성됐으며 당시 군 지휘부 등은 이 작전에 대해 ‘일명타진’, ‘위험한 작전’ ‘엄청난 참사’ 등 표현을 썼다고 2018년 국방부 5·18민주화운동특별조사위원회 조사 결과에 나와 있다.

29일 경향신문은 6면에 5·18 당시 현장 기자들의 목소리를 담은 <취재기자들의 방담으로 엮어본 사태 현장>기사를 실었다. ‘무질서’, ‘경찰관 1명 없어’, ‘경찰관이 없는 거리는 참으로 무섭다’는 등의 소회가 담겼다. 하지만 전남지방경찰청에 따르면 당시 광주 치안상황은 안정적이었다. 법원 판결문으로 확인 가능한 강력 사건은 5건이었고 총기 관련 사건·사고는 경찰 기록에 2건만 나온다. 경력이 시내에 없지 않았다.

31일 경향신문은 1면에 “광주사태로 민간인 144명과 군인 22명, 경찰 4명 등 모두 170명이 사망했고, 부상자는 민간인 127명, 군인 109명, 경찰 144명 등 380명”이라는 계엄사 발표를 담았다.

하지만 5·18관련 정확한 사망자 수는 아직 확정되지 않았다. 2007년 국방부 진상규명위가 “10일간의 광주민주화운동 기간 사망자는 군인 23명, 경찰 4명이었다. 민간인 사망자는 166명으로 파악됐다”고 한 바 있다. 잠정조사결과만 봐도 신군부의 주장보다 민간인 22명, 군인 1명이 사망자 명단에 추가된다. AP통신 테리 앤더슨 기자의 기사 원본에 따르면 시민군 대변인은 시위로 인해 261명이 숨졌고 이 중 100여명의 시신은 신원 미상이라고 기록한 바 있다.

같은 날 경향신문은 사설에서 5·18 40주년에 아직도 진실과 정의를 세우지 못한 데 대해 "한없이 부끄럽고 죄송한 마음뿐"이라고 했다. “진실 보도를 외면한 언론도 5·18의 진실을 흐리게 한 책임을 통감해야 한다”며 “경향신문도 계엄군의 폭력진압 등 광주의 실상을 제대로 알린 보도는 찾아보기 어려웠다”고 썼다. 경향신문은 늦었지만 과거 보도를 바로잡기로 했다며 이런 노력들이 모여 그날의 진실이 온전히 밝혀지고, 정의가 바로 서고, 역사에 자랑스럽게 기록되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김혜인 기자  key_main@mediau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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