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스=김민하 칼럼] 회계라는 것은 숫자가 맞아야 한다. 숫자가 맞지 않으면 거기서부터 논란을 피할 수 없다. 지금까지 제기된 회계 부실 의혹에 대해 정의기억연대는 실무적 부실과 당국의 제도적 미비가 주요 원인이었던 것으로 설명해왔다. ‘숫자가 맞지 않는다’는 것은 원칙상 수용할 수 없는 일이나 이런 해명을 완전히 배척할 이유까진 없다. 그런 점에서 뒤늦게나마 정의기억연대가 외부 감사를 수용한 것은 다행이다.

그런데 주말 동안 제기된 ‘힐링센터’ 의혹은 이런 수준을 넘는다. 윤미향 당선인이 언론 인터뷰를 통해 내놓은 해명은 납득이 어렵다. 지금 상황에서 이 의혹의 실체는 크게 셋 중 하나로 밖에 볼 수 없다. 첫째 그저 졸속적이고 안이한 사업 추진의 결과이거나, 둘째 윤미향 당선인과 당시 정대협이 사기를 당한 것이거나, 셋째 처음부터 관계자들이 한통속으로 비자금을 조성한 것이거나.

사건의 실체가 무엇이든 정의기억연대 차원에서 책임소재를 파악해 책임을 묻고 재발방지를 위한 대책을 수립하는 것은 불가피해보인다. 이 결과에 따라 윤미향 당선인 역시 본인의 진로에 대해서도 진지한 고민을 해야 한다. 만일 세 번째 경우에 해당하는 것임이 밝혀진다면 사퇴가 불가피하다는 것은 두 말할 것도 없다.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 해결을 위한 정의기억연대'에 대한 후원금 회계 관련 의혹이 연일 제기되는 가운데 13일 서울 종로구 옛 일본대사관 앞에서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촉구하는 수요시위가 열리고 있다.(연합뉴스)

시민단체가 고발을 했고 검찰이 수사에 착수했으니 앞으로도 논란이 이어지는 건 불가피해보인다. 그 ‘진실공방’에 각자 장단을 맞추는 광경은 더 지켜보기로 하더라도 본질적으로 논해야 할 문제가 남아있다. 그것은 이 사건이 우리 사회에 주는 정치적 영향이다.

보수세력은 이 문제를 2015년 한일위안부 합의의 정당성 문제로 가져가려는 태세이다. 이런 얘기를 꺼내면 보수정당 소속 인사들은 “회계투명성을 요구하는 것이 친일인가”라고 되묻는다. 집권 여당 일부를 포함한 반일운동가를 자처하는 사람들이 반일캠페인을 정치적으로 활용하려는 모습을 보이는 건 사실이다. 그러나 2015년 한일위안부 합의가 갖는 문제의 본질은 친일이냐 반일이냐가 아니다.

16일자 조선일보 지면에 천영우 전 청와대 외교안보수석이 기고한 글을 보자. 이 글에 드러난 천영우 전 수석의 논리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당시 합의에 따라 일본 정부가 10억엔을 국가 예산에서 지출한 것은 간접적 책임 인정이며 이는 우리가 확보할 수 있는 현실적인 최대치이다. 둘째, 대다수의 피해자들이 보상금 수령을 원했음에도 정대협 등이 합의를 거부하는 입장을 취한 것은 피해자가 아니라 단체의 이익 때문이다. 셋째, 소녀상 등을 도로법을 위반하는 장소나 외교 공관 앞에 세우는 것 역시 단체의 이익을 위해 대한민국을 망가뜨리는 행위이다.

이런 논리에서 드러나는 문제의식은 무엇인가?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마치 교통사고에서 그렇듯 가해자와 피해자가 합의하면 끝나는 문제라는 것이다. 그러나 일본군 위안부 피해는 국제사회가 이를 되풀이 하지 않을 수 있는 반성의 책임을 이끌어 내야 해결되는 문제이다.

애초 합의의 기본 얼개였던, 일본 총리가 반성의 뜻을 밝히며 사죄하면서 군의 개입을 인정하고 일본 정부의 예산으로 재단 출연을 하겠다는 것은 이런 차원에서 유의미한 것이다. 당시 합의가 이명박 정부 당시 일본의 안이었던 ‘사사에안’보다 진일보했다는 평가를 받은 것도 이를 전제로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일 양국의 ‘톱’ 수준에서 합의된 “최종적이고 불가역적인 합의”, “국제사회에서 문제제기 하지 말 것”, “일본 대사관 앞 소녀상의 적절한 처리” 등의 내용은 합의의 기본 취지가 전쟁범죄에 대한 진정어린 반성과는 거리가 있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일상의 언어로 하자면 “너희들이 원하는 대로 사과도 하고 보상도 했으니 더 이상 딴 소리 하지 마라”는 뜻이다. 과거를 기억하며 다시는 같은 잘못을 하지 않겠다는 게 아니라, 부끄러운 과거는 잊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살고 싶다는 얘기다.

이런 점에서, 보수세력이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문제를 좁은 의미에서만 다루려고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단지 친일파의 후손들이기 때문이 아니다. 일본과의 역사 갈등이 어떤 방식으로든 빨리 해소돼야 ‘국익’에 여러모로 유리하기 때문이다. 즉, 친일이냐 반일이냐가 아니라 반전평화의 명분을 지키느냐 경제적 이득이라는 효율성을 추구하느냐의 문제라는 뜻이다.

일부 보수언론은 ‘피해자 중심주의’를 얘기한다. 정의기억연대나 그 전신인 정대협이 피해자들이 원하지 않는 정치캠페인을 계속해왔다는 뜻으로 보인다. 그러나 ‘피해자 중심주의’는 성범죄 피해를 처리하는 데 있어서 피해자 중심의 세계관으로 임하라는 의미다. 이들이 쓰는 맥락을 반영하기 위해선 ‘당사자주의’로 표현하는 게 더 옳을 것 같다.

가령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이 경제적 궁핍에 시달리고 있다면 일본에 책임을 적극적으로 요구하는 국가 입장에서 할 수 있는 만큼 최선을 다해 피해자들을 지원해야 한다. 만일 여러 불가피한 사정에 의해 국가가 그런 역할을 충분히 할 수 없다면 정의기억연대와 같은 시민단체들이 그런 역할을 감당해야 할 필요도 있다. 그런 점에서 최선을 다하지 못한 것은 사실이다. 반성해야 한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2015년과 같은 형태의 합의를 수용했어야 하느냐는 전혀 다른 문제이다. ‘당사자’들의 일이라는 이유로 일본의 전쟁책임을 묻는 일에 우리 사회가 아무런 의견을 가져서는 안 된다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

대의명분을 잃지 않으면서 피해자들의 어려움을 해소하는 방법을 찾는 것은 정치의 역할일 것이다. 그런 역할을 방기하던 사람들이 이제와서 ‘피해자 중심주의’를 말하는 것에는 그 실제 내용인 ‘당사자주의’가 ‘위선적 진보론’과 결합해 보수적 세계관을 구현하는 소재로 쓰일 수 있다는 정파적 판단이 깔려있다. 이 세계관은 이상보다는 현실, 명분보다는 실리, 원칙보다는 효율을 중시하는데 이제 진보의 시대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음에도 이런 가치관은 더 힘을 키워가는 것만 같다.

사실 지난해 일본과의 관계 악화가 불을 붙인 반일캠페인도 순수한 민족주의적 열정이 근원이 됐다기보다는 실리와 효율을 중시한 결과였던 건 마찬가지였다. 이런 점에서 우리가 정말로 잃고 있는 게 무엇인지를 이번 사태를 통해 다시 고찰해볼 필요가 있다. 어떤 사람이 국회의원직을 지키고 잃고는 차라리 부차적인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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