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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인 정 씨로 살다[주관적이고, 사적이고, 사소한 이야기]
김은희 | 승인 2020.05.15 07:43

[미디어스=소설가 김은희] 친할머니는 정 씨다. 사람들은 할머니를 정 씨 할머니라고 불렀다.

할머니는 이웃 사람들에게 정 씨 혹은 정 씨 할머니라고 불렸다. 아니면 오빠의 이름을 따 누구네 할머니, 고향을 따 강릉 할머니라고 불렸다. 친척들도 마찬가지였다. 누군가 할머니 이름을 불러 주는 것을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다. 어릴 적 자주, 한 번도 자신의 이름으로 호명되지 않는 할머니에게 물었다. 할머니는 이름이 뭐야? 정 할머니라고 부르는데 이름이 뭐야? 말간 눈으로 할머니를 쳐다보았다. 이름을 물을 때마다 할머니는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화제를 돌리며 어물어물 넘어갔다. 끈질기게 묻는 날이면 급기야 화를 냈다. 

나는 할머니의 이름이 언년이, 말년이, 귀년이, 종말이 쯤일 것으로 생각했다. 알려주지 못할 정도로 마음에 들지 않는, 창피한 이름일 것이라고 짐작만 했다. 총명한 할머니에게 어울리지 않는 이름이라고 생각하며 속으로 속상해했다. 

이미지=게티이미지뱅크

어머니는 할머니를 보고 아주 똑똑한 사람이라고 했다. 할머니는 특출나게 기억력이 좋았다. 수십 년이 지난 일도 정확하게 기억했고, 사돈의 팔촌에게 생긴 일, 이웃집에 생긴 일도 모조리 기억하고 몇 년이 지나도, 몇십 년이 지나도 틀리지 않고 정확하게 이야기했다.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초등학교 때 짝의 안부를 묻기도 했다. 이것뿐만이 아니었다. 할머니는 글을 읽고 쓸 줄 모르는데 똑같이 생긴 수많은 버스 중에서 집으로 가는 버스를 정확하게 골라 탈 줄 알았다. 

이렇게 총명한 할머니는 정 씨다. 그냥 정 씨. 이름 없이 정 씨. -누구에게나 당연히 이름이 있다고 생각했다. 이름이 없다고 생각을 해 보지 못했기 때문에 충격이 컸다- 할머니는 이름 없이 정 씨로 거의 1세기를 살았다. 묘비에도 이름 없이 정 씨로 새겨졌다. 

할머니에 대해, 정 씨에 대해 글을 쓰려고 한다고 어머니에게 말했다. 할머니는 이름 없이 사는 게 불편하지 않았을까, 서럽지 않았을까, 라는 물음에 어머니는 뜻밖의 대답을 했다. 외할머니도 이름 없었어. 외할머니도 그냥 이 씨였어. 우리 어머니도 이름 없이 이 씨로 평생을 살았어. 엄마한테 물었었는데. 엄마는 왜 이름이 없어. 그럼 어떻게 불렸어, 그랬더니 엄마가 그래. 그냥 언년아, 라고 불렀어. 그런데 이름은 없어.

할머니 정 씨가 이름이 없는 이유는 집안 사정 때문일 것이라고 짐작했다. 할머니는 매 끼니를 걱정해야 할 정도로 가난한 집에 태어나 배를 곯았다고 했다. 할머니 정 씨의 아버지는 딸에게 이름을 지어줄 정도로 여유가 있지도 않았고, 글을 몰랐다. 무엇보다 아주 하찮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던 딸, 여자에 대한 인식이 계집애에게까지 이름을 주는 호사를 누리게 두지 않았다.

그래도 할머니 이 씨는 다를 것으로 생각했다. 할머니 이 씨는 유복한 집의 딸이었다. 아들 둘을 모두 대학까지 공부시킬 정도로 경제적으로 넉넉하고, 할머니 이 씨 아버지는 깨어있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할머니 이 씨만 공부를 시키지 않았다. 공부를 시키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이름도 주지 않았다.

꽃도 이름이 있고, 사물도 이름이 있고, 집에서 키우는 똥개도 이름이 있는데 사람으로 태어난 할머니 정 씨와 할머니 이 씨는 이름도 없이 무명씨로 한평생을 살았다. 

이미지=게티이미지뱅크

모란이 피던 봄, 할머니 정 씨가 잠들어 있는 산소에 다녀왔다. 공원묘지로 이장을 하고 처음 봄 인사를 하러 간 날이었다. 인사를 마치고 다른 가족들의 묘비를 살피던 중 알게 된 사실이 있었다. 할머니 정 씨 외에도 정 씨, 박 씨, 김 씨로 이름이 없이 살다 죽은 할머니들이 상당히 많다는 것이다.

어릴 적, 할머니 정 씨가 이름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누구에게도 불리지-이름이 없었기 때문에-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약속했다. 이름을 지어주겠다고. 아주 예쁜 이름을 지어주겠다고. 아직 그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김춘수의 ‘꽃’처럼 할머니 정 씨도 당신의 빛깔과 향기에 맞는 이름으로,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 마지막 문장은 김춘수의 시 ‘꽃’에서 인용하였습니다.

김은희, 소설가, (12월 23일 생) 대전일보 신춘문예 소설 등단 

김은희  postboat22@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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